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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에디터김의 워킹데이즈

성공과 실패를 글로 배운 여자들에게, 이 언니를 권함!

성공과 실패를 글로 배운 여자들에게, 이 언니를 권함!


by 편집자 A


일과 인생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떠다니는 상투어들이 있다. 예컨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시간이 약이다 하는 말들. 얼핏 그럴듯하지만 대개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점잖은 자리에서 내놓는 이야기라서 일말의 의혹이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 높은 자리까지 직접 올라가 보기 전에는 확실히 알 수도 없는 일이므로, 딱히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좀 그렇다. 그래도 일말의 의혹이 끝끝내 가시지 않을 때, 한 번쯤 참고할 만한 유용한 언니가 있다. 이 언니는 엄친아로 태어나 배운 여자로 살며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골고루 맛보았으되, 절대 속없는 말은 못하는 언니다.

그럼 이 언니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일단 이 언니가 얼마나 잘났는지 요약적으로 살펴보자. 너무 잘나서 다소 배가 아플 수 있으니, 위장이 약한 사람은 주의하시길 바란다.

 

“엄만 일해야 하니까 거기 못 간다고 전하렴.”

어머니는 1년에 몇 번씩 이 문장을 읊조리곤 했다. 당신은 학부모교사연합회 모임 같은 곤란한 일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뜻인 동시에, 당신이 다른 어머니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임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심지어 다른 직장 여성들과도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 산업에는 극소수의 여성들만 일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의상디자이너 이디스 헤드(Edith Head) 같은 사람 말이다. 한번은 어머니가 이 사람을 포함해 다른 동료 여성들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 나를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병행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번번이 강조했다시피, 요리도 맛있게 했다. 내조도 거뜬히 해냈고 심지어 옷도 근사하게 차려 입었다. 이는 모든 걸 다 해내는 슈퍼우먼에 대한 생각이 유행하기도 전의 일이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50~51쪽)


이 언니는 슈퍼우먼에 대한 개념이 탄생하기도 전에 이미 슈퍼우먼이었던 여성을 어머니로 두었다. 여기까지만 인용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작가와 감독들이 이 언니의 집안에 모여서 성대한 파티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 언니 스스로 “별처럼 빛나는 풍경”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화려한 풍경이 집안에 펼쳐진다. 유명하고 부자인 부모를 뒀다는 점에서 일단 엄친아의 기본 조건을 갖춘 셈이다. 또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네 엄마가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주는 것을 보고, 이 친구는 무척 가난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고 하니 이 정도로 가뿐히 엄친아 인증 완료.


부모님은 이 언니에게 부유한 환경뿐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유전자도 물려주셨다. 이 언니는 유명 여대인 웰즐리 대학을 나와, 백악관 인턴십을 거쳐 <뉴욕 포스트>에 취직해서 마침내 어엿한 기자가 된다. 그리고 적성에 딱 맞는 일을 만나, 일을 잘하는 것을 넘어 마침내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는 진정한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난다.


나는 오랫동안 저널리즘을 사랑해왔다. 나는 편집실을 사랑했다.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그 집단을 사랑했다. 담배를 피우고 스카치를 마시고 포커 치는 걸 사랑했다. 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그 직업에 종사했다. 나는 그 스피드를 사랑했고, 마감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신문지로 생선을 포장하는 것을 사랑했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48쪽)


보통의 엄친아라면 여기서 프로필이 얼추 마무리되어야 마땅한데, 이 언니는 한 발 더 나아간다. 평범한 엄친아가 되기를 거부하고 할리우드로 진출함으로써 엄친아 of 엄친아로 등극하는 것이다.


배우들도 너무 좋고, 스태프들도 사랑스럽다.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황야에서 나만 보고 따라온다. 나의 요청으로 그들은 인생 중 6개월이나 1년 정도를 이 영화에 바친다. 이건 나의 파티고, 내가 주최자다. 현장에서 더 좋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싸우기도 했고, 위스콘신 주에서 냉동 커스터드를 공수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가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149~150쪽)


이 언니는 무려 영화감독이 된다. 그것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등을 차례로 쏟아내면서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운 것은 물론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전범을 형성해버린다.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엄친아가 아닐 수 없다.


언론과 영화라는, 잘났다고 자부하는 수컷들이 득시글대는 곳에서 보란 듯이 성공한 이 언니의 사생활은 어땠을까. 남의 인생에 재를 뿌릴 수는 없으니, 아주 큰 것까지 바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쯤 되면 자그마한 불행이 가미되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이를테면 일의 영역에서는 성공했으나 과도한 남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안타깝게도 로맨스의 영역에서는 실패해서 남자들에게 한 번도 대시를 못 받았다던지 하는 종류의 불행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다. 이 언니는 3번 결혼했는데 그 배우자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이었는데다, 심지어 3번째 남편과는 20년 이상 해로하고 있다.


노라 에프런은 결혼을 세 번 했다. 첫 번째 남편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피비 케이츠 주연의 1983년 작 「프라이빗 스쿨」의 시나리오를 쓴 댄 그린버그다. 두 번째 남편은 동료 밥 우드워드와 함께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파헤친 유명 저널리스트 칼 번스타인이다. (그래서 노라 에프런은 워터게이트의 내부 고발자 ‘딥스로트’가 누군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한다.) 세 번째 남편은 프로듀서 겸 시나리오 작가로, 마틴 스코세이지와 함께 「좋은 친구들」, 「카지노」 등의 시나리오 작업을 한 니컬러스 필레기이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186~187쪽)


화룡점정을 찍자면, 이 언니는 기사 쓰고, 영화 찍고, 결혼하고, 애를 낳는 이 바쁜 와중에 취미생활마저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언니의 영화들에 나오는 그 디테일한 취향들은 결코 땅 파서 구한 것이 아니다. 이 언니가 틈틈이 개발한 요리와 미식에 대한 섬세한 취향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 영화의 출처를 증명해주고 있다. 


 달걀노른자 없이 오믈렛을 만들면 안 된다. 노른자를 흰자보다 더 많이 넣어야 한다. 정말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선 온전한 달걀 두 개에 노른자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스크램블드 에그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달걀 샐러드 레시피도 이 자리에서 공개한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94~95쪽)


이 정도면 이 언니가 얼마나 잘난 언니인지 충분히 설명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그 달달한 성공의 열매를 만끽한 언니가 거기서 무슨 교훈을 얻었는가, 그게 통설과 얼마나 대응하는가이다. 이 언니는 성공보다 실패의 순간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하나하나 증명해간다. 남의 잘된 이야기는 들어봐야 배만 아픈 법이니, 아픈 배를 부여잡고 읽어야 할 독자들을 위해, 결코 성공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것을 전면에 내세울 때는 주로 그것이 대비의 효과를 주어 실패의 고통을 더욱 부각시킬 때이다.

그러니까 예컨대 부모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완벽했던 부모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한참 서술하는 이유는 한순간에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해버린 부모를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알코올 중독자 부모는 정말 혼란스러운 존재다. 그들은 틀림없이 나의 부모님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정뱅이다. 나는 그들을 증오한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을 증오한다. 그들에게는 어린 시절 내가 우상화했던 바로 그 모습이 깃들어 있다. 또한 괴물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모습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항상 괴물이 된다. 내게 어마어마한 힘을 행사했던 사람들, (나는 빨간 코트를 구입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심지어 산 다음에도 딱 한 번밖에 안 입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게 된 사람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58~59쪽)


또 3번의 결혼 생활 중 이 책에 등장하는 시점은 하필 어린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남편의 불륜으로 결혼이 파탄 나던 그 즈음이다.


남편이 배신했다는 것을 일단 알게 되면, 아내는 또 다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파헤치게 된다. 결국 스스로 완전히 무너져서, 집에서 나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두 번째 결혼이 끝났을 때 나는 분노했고, 상처받았으며, 충격에 휩싸였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171~172쪽)


이 언니의 솔직함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지금까지 아픈 배를 꾹 참고 읽어온 독자들에게 보답이라고 하겠다는 듯, 눈부신 성공과 쓰라린 실패가 교차하던 순간을 오가며 얻은 소감을 허심탄회하게 밝힌다. 

예컨대, 남편의 배신으로 죽음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던 두 번째 결혼 생활을 떠올리면서 이 언니는 점잖은 교훈을 설파하는 대신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이 약이며 고통을 잊게 될 거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출산할 때 듣는 상투어이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 낳을 때의 고통을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 고통을 기억한다. 진짜 잊어버리는 건 사랑이다.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172쪽)

 

실제로 겪어보니, 시간은 약이 아니더란다.

수많은 히트작을 낸 영화감독이지만 또 그만큼 처절하게 실패했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언니는 그때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실패의 장점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한 성공에 대해, 실패의 힘에 대해 책을 쓴다. 그들은 실패가 성장의 경험이었고, 실패로부터 뭔가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길 바란다. 내가 보기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실패는 꼭 성공의 어머니는 아니더란다.

이런 모든 교훈들은 성공도, 실패도 모두 지나간 과거의 일이 되어버릴 만큼 이 언니가 충분히 나이 들었기 때문에 얻은 것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이 언니는 이제 이혼 경력보다 나이가 더 중요할 정도로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하지만 이 언니는 나이 들었다고 해서 마치 세상의 짐을 내려놓은 듯, 평화로워진 듯 관조하는 척하지 않는다. 나이에서 얻은 통찰을 공유하되,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욕망 또한 감추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당신은 이 작품에 뭔가 희망적인 조짐이 보일 거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는다. 가끔씩 이런 몽상을 한다. 내가 죽어갈 때, 그 작품을 부활시킬 만한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침상에 다가와 작별 인사를 던질 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그 사람은 동의한다. 다른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덧붙인다. “제 희곡을 다시 무대에 올려주시겠어요?”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152~153쪽)

 

최소한의 일상과 사생활을 잃지 않고 성공한 여성 멘토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또 모든 성공에 실과 바늘처럼 뒤따르는 고통과 실패에 대해서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언니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노라 에프런

http://banbi.tistory.com/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