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에디터김의 워킹데이즈

인문학의 평행이론 : 서동욱-신해철 편

인문학의 평행이론 -막 갖다붙이며 오바하는 글쓰기




서동욱-신해철 편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신입생만 400명이 넘으며, 웬만한 타대학 학생들도 복수전공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강의실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경제학과 얘기가 아니다. 너무 많은 고득점자가 몰려서 공대 위기론에 일조한다는 의과대 얘기도 아니다. 이것은 무려 철학과 얘기다. 대한민국의 경기가 한참 좋았다던 그 찬란했던 시절에도 취업난으로는 독보적이었던 그 철학과란 말이다! 서동욱과 신해철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무난히 들어갈 학력고사 점수를 가지고, 당당히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공통점이 아닐 수 없다! 서동욱은 그의 최근 저서 <철학 연습>에서 철학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디테일이어서, 자전적인 경험에서 나온 내용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다함께 감상해 보자.


철학과 학생은 소개팅을 나가 곤욕을 치른다. 눈을 깜빡이며 여학생이 묻는다. “어머, 철학과야? 그럼 관상 좀 봐봐. 손금은 어때? 내 머리통은 똘똘하게 생겼어?” 그러면 어떤 학생은 “철학과에선 그런 거 안 배우거든!” 소리치며 자기 학문의 영예를 지키겠답시고 예쁜 여자를 뒤로한 채 표표히 걸어나가고, 반대로 어떤 학생은 아름다운 관상쟁이의 말로 상대방의 환심을 산다. “누님은 코가 아주 넓고 귀하게 생겼어요. 귀는 부처님처럼 축 늘어졌고요. 흠, 좋아요, 좋아.”


표표히 걸어나가는 학생의 뒷모습에서는 이후 철학도의 길을 쭉 걸어간 서동욱이,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학생의 앞모습에서는 이후 가수로서 백분토론의 단골손님이 된 신해철이 연상되지 않는가? 이렇게 서동욱과 신해철은 비슷한 시기,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입학하며 평행 이론 위에 올라섰다.


기왕 백분토론 이야기가 나왔으니, 백분토론에서 발견한 평행 이론 한 가지를 마저 소개하도록 하자. 최근 백분토론에 출연한 신해철의 모습을 보면서 화들짝 놀랐던 발언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나는 가수다>에 등장한 가수들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검투사에 비유한 부분이다. 신해철은 고대 검투사의 비유를 들어, 오늘날 일밤의 무대에 선 가수들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서바이벌? 강호의 검객들이 일개 검투사가 되면 '아, 저건 여흥이고 난 '명예' 심사위원이구나'하고 놀면 되지 엄지손가락 내렸는데 저놈이 안 죽는다고 난리를 친다.”


현대의 가수들을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검투사에 비유함으로써 신해철은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펼쳤다. 그렇다면 서동욱은? 서동욱의 전공 분야가 현대철학임을 익히 알고 그의 최근 저서 <철학 연습>을 펼쳐든 사람은 프롤로그의 제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평행 이론에 완벽히 부합하는 그 프롤로그의 제목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웹서핑을 했네>이다. 가장 최근의 현대철학 이론을 소개하는 책의 서론을 고대 그리스인으로 시작하다니! 그것도 가장 현대적인 활동의 하나인 웹서핑에 비유하다니! 앞서의 신해철 발언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이와 유사한 비유를 서문에 담은 서동욱의 새 저서가 발간되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평행 이론이 아닐 수 없다.


평행 이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평행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우선 인터넷 서점에서 서동욱이란 이름을 검색해 보자. 처음 검색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하에 뜨는 책들이 모두 한 사람의 책인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힐 것이다. <존재에서 존재자로>, <프루스트와 기호들>과 같은 번역작업들이야 학자들이 흔히 하는 일이지만 <우주전쟁 중의 첫사랑>, <익명의 밤>과 같은 책들은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그렇다! 서동욱은 철학자이자 문학 평론가, 시인으로도 그 이름이 드높다. 서동욱에게 시는 결코 ‘부업’이 아니다. 시 분야에서 서동욱은 뛰어난 감성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한 사람에게 철학자이자 시인, 그리고 문학 평론가라는 다채로운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이는 신해철이 가수이자, 그룹 넥스트의 리더이자,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의 마왕이자 <안녕, 프란체스카>의 앙드레 대교주라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넥스트 리더나 작곡가로서의 활동이야 서동욱이 레비나스의 책을 번역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보여준 마왕으로서의 미친 존재감,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서 팬들에게 경악할 만한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앙드레 대교주로서의 모습은 신해철과 서동욱의 평행 이론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서동욱과 신해철은 취향 면에서도 평행 이론을 달린다. 서동욱의 새 저서 <철학 연습>의 표지 시안이 나왔을 때, 서동욱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옆 팀의 편집자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조언을 해주셨다. 참고로 이 편집자의 발언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는 다음의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출판사 사옥을 방문한 서동욱에게 이 편집자는 인사와 동시에 허리에 디스크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동욱은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더랬다.

“그래도 (술은) 마실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서동욱과 돈독한 사이의 편집자가 <철학 연습>의 최종 표지와는 달리 하얀 운동화 사진이 놓인 심플하디 심플한 시안*을 보자마자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내가 아는 서동욱 샘이라면......좀 더 빠다 냄새가 나도 될 것 같아.”


빠다 냄새! 빠다! 빠다! 이 단어만으로도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신해철과의 평행 이론이 성립함을 알아차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너무 늦게 태어난 탓에 신해철의 젊은 시절을 미처 보지 못해 직감적으로 알 수 없는 분들께는 신해철의 대표 히트곡 중의 하나인 <재즈카페>의 일청을 권한다. 미쿡에서 온 교포 가수들이 ‘범람’하는 요즘과 달리, 느끼한 가수가 많지 않던 90년대 초반 신해철의 <재즈카페>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한마디로 빠다 냄새가 물씬 나는 가수로서 신해철의 이미지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일조했었다. 확인 사살을 위해 <재즈 카페>의 가사 일부를 인용해 보자.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피자 발렌타인데이

까만 머리 까만 눈의 사람들의 목마다 걸려 있는 넥타이

어느 틈에 우리를 둘러싼 우리에게서 오지 않은 것들

우리는 어떤 의미를 입고 먹고 마시는가


도입부의 가사만 보아도 신해철에게서 나는 빠다향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평행 이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신해철의 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꼽히는 <날아라 병아리>를 떠올려보자. 이 곡은 신해철이 어린 시절 키우던 ‘얄리’라는 이름의 병아리를 추억하며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학교 앞에서 팔던 보송보송하고 연약한, 노란 병아리에 대한 저마다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곡은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입혀져 수많은 ‘병아리 구입자’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대히트를 했다. 이 노래를 기억하는 세대로서 서동욱의 이번 저서 <철학 연습>을 펴들고 무심코 읽어 내려가던 독자라면, 제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위그든 씨의 ‘이해의 선물’이 언급되는 부분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평행 이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일까? 마지막 평행 이론이 궁금한 자, <철학 연습>을 구입해 276쪽을 펴들고 읽어 보시라. 이런 애매한 페이지는 온라인 서점에서 미리보기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사서 보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서동욱 - 신해철편'이라고 했지만 연재 여부는 불투명! 과연 편집자는 다음 편을 쓸 수 있을 것인가?


* 당시 <철학 연습>의 표지 시안은 현재의 표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표지 시안 변천사도 조만간 포스팅해야겠네요. ^^
** 신해철 사진 출처 : "신해철 - The Songs For The One"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