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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도서관 기행 (完)

한국 도서관 기행 (8) ~ 어른들의 도서관 정독 도서관 ②

...에 이어 여덟 번째로 소개하는 도서관은 바로 '정독도서관'입니다.  '어른들의 도서관 정독 도서관'편은 3회에 걸쳐서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지난 포스팅은 [도서관 기행] 카테고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 도서관 기행 (8) ~ 어른들의 도서관 정독 도서관 ①편에 이어서...



어른들의 도서관 정독 도서관 ②


by 강예린 & 이치훈



한국 학교 건축 유형의 출발


그림 1. 경기고 시절 운동장을 향해 신식 건물의 파사드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을 도서관의 본관 건물은 이제 울창한 조경 뒤에 숨어있다.


정독도서관의 현재 건물은 1938년 지어진 경기고등학교[1] (당시 6년제 경기공립중학교)이다. 세 채의 교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평범한 학교건물 같지만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2호이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학교건물이었다. 수선과 보수도 여러 번 했고 외관의 페인트 색깔도 몇 번이나 바꿔 칠했지만 건물의 원형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경기고등학교 건물은 군국주의 일제에 의해 시작된 강압적인 근대 교육의 전형적인 학교 건물 유형이다. 지어진 지 8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 이 건물을 전형적인 학교로 느끼는 것은 이곳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학교 건축 유형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이 땅에 있어왔던 학교는 성균관과 향교라는 곳인데 숙식과 책 읽기, 조상에 대한 제례 등이 모두 가능한 일종의 생활공간이었다. 1894년에 과거제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마련되면서 학교라는 공간은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식민지배의 우민화전략,  군국주의의 엄격한 훈육이라는 교육의 목표와 맞물려 서양식 건축을 변용해 일제가 들여온 새로운 형식들로 대체되고 1938년 지어진 경기고등학교 건물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정독도서관은 건축사적으로는 근대의 표준 양식을 중심으로 아르데코와 이탈리아 합리주의를 간략화한 어휘가 섞여 지어졌다. 건물 전면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벽기둥과 탑처럼 높게 솟은 중앙 입구, 사각형의 창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구성된 파사드 등이 그러하다. 모두 1930년대 서양에서 유행하던 건축의 양식이었다.


궁궐과 사대부들의 한옥을 제외하면 사대문 안이 대부분 초가집으로 채워져 있던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 신식 건물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권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초기 근대 건축물의 질서들을 품고 당당하게 서있지만 여기저기 오래된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정독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이다.

 


그림 2. 건물 사이사이 정독도서관은 근대 건축의 순수한 초기 언어들로 채워져있다.



서울에서 80년 가까이 나이든 건축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근대 건축물을 현대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그래서 정독도서관의 공간은 건축사적으로나 교육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그림 3. 세번째 건물의 외관은 조금더 장식적인 언어를 보여준다.




학교에서 도서관으로


학교와 도서관은 어딘가 통해있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학교와 도서관 모두 공부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와 평생교육 공간으로서 도서관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 문화에 비추어 보면 학교 건물이 그 변화를 수용하기에는 다소 경직된 건축의 형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일한 크기의 방이 연속된 편복도식의 구조는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활동과 사람들 사이의 만남을 조직해 내기에 가변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비슷한 감각으로 남아있는 학교 공간에 대한 기억은 정독도서관에서 더 이상 분단위로 쪼개진 시간과 방의 체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서관의 시간은 학교의 시간처럼 분화되어 있지 않고 길다란 건물도 더 이상 학교의 방처럼 잘게 쪼개져있지 않다. 학교의 잘게 쪼개어진 공간과 시간 사이사이를 이어 붙인 정독도서관은 길다. 100m에 가까운 길이로 학교 건물의 동서 방향 전체를 하나의 열람실로 사용한다. 한쪽 끝 서고의 좁은 틈 사이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소실점이 만들어질 정도이다.


그림 4. 끝이 보이지 않는 소실점. 정독도서관의 서고는 길다.



수업 사이 사이 유난히 짧았던 쉬는 시간도 정독도서관에는 더 이상 없다. 꽉 짜여진 시간표 속에서 혼란과 질서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던 학교의 일상은 도서관에서 길게 이어 붙여진 자율적인 독서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동시에 유년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라는 공간형식 안에서 보냈던 우리의 기억은 다시금 그 공간에 반응하는 몸의 습속을 불러들이면서 책 읽기를 위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다소 엄격한 공간의 형식이 오히려 책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서 절에도 들어가곤 하지 않았는가. 독서도 마찬가지, 고시만큼 거창한 공부는 아닐지라도 책을 읽는 한순간정신노동을 위해 공간의 형식과 분위기는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학교와 같은 공공시설의 건축공간들이 발달하면서 예절로서의 묵독이 발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만큼 공간의 형식과 조건은 독서하는 우리의 몸과 밀접한 영향관계에 있다.


그림 5. 눈이 쉽게 피로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을까. 채도 높은 녹색 책상이 이채롭다.



그런 면에서 훈육의 장으로서 학교의 엄격한 공간질서는 집중해서 묵독하는 개인적인 독서형식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매체의 발전이 만들어내는 독서형식의 변화로 글을 읽는 것이 더 이상 책 한 권에 집중된 독서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분산된 지각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조용하게 집중해서 글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은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언젠가 “필사(筆寫)는정독(精讀) 중의 정독”이라고 하였다. 이름도 그러하지만 정독(正讀)도서관은 무언가 필사의 독서와 어울리는 장소이다. 서울 한 복판에 섬처럼 놓여있는 정숙한 공간에 힘있게 자리잡은 오래된 건축물. 북촌의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지나 정독도서관의 언덕진 입구를 오르면 장소는 더 이상 대도시 서울이 아니다. 경기고 당시 운동장은 도서관의 정원이 되어 도시의 소음을 흡수하고 혼란스러움을 걸러주는 필터가 되었다. 무성한 수초 사이를 흐르는 물이 자연스레 정화되는 것처럼 도심 한복판의 너른 정원은 대도시의 소란스러움을 잊게 해준다. 한여름 우거진 녹음을 지나 도서관에 들어서면 오래된 건물의 두꺼운 벽체가 품은 냉기를 느끼며 마음은 한결 더 차분해진다.




운동장에서도서관의 앞뜰로


정독도서관 도서관보 제 1호에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정독도서관 개관 당시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도서관 앞의 정원이 지금처럼 울창하지 않다. 정원이 풍성해지기까지시간이 걸리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개관 당시에는 지금처럼 울창한 정원으로 계획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정원의 어디를 걸어도 나무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교실이 열람실이 된 것과 같이 운동장은 정원이 되었다.




그림 6. 개관 당시의 도서관보에는 지금처럼 울창한 정원도, 종친부 건물도 없다.


누런 마사토가 깔린 그림자 뼘 없는 운동장 땡볕아래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조회를 서며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교장선생님에 대한 거수경례를 올리던, 조회가 끝날 무렵에는 교가나 애국가를 불렀던 장소인 학교 운동장에 대한 기억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학교 운동장은 군사 훈련을 닮은 학교 교육을 위한 사열대였다. 그래서그곳은 나무 몇 그루 없는 텅빈 공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림 7. 정독도서관의 앞뜰에는 어딜가나 그늘이 따라다닌다.


텅 빈 운동장이 녹음으로 채워지고 분수대와 작은 연못, 그 주변에 작은 오두막 정자를 갖게 되었다. 곳곳에 비도 새지 않을 것 같이 빽빽한 등나무 지붕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나무는 여의도의 윤중로가 부럽지 않고 겨울이면 잔디 위에 하얀 눈밭이 만들어진다. 정원 덕분에 정독도서관에서 독서는 닫힌 서고 열람실을 벗어났다.


산으로 둘러싸인 보기 드문 도시 서울이지만 도심 속에 녹음 짙은 공원 하나 찾기 힘든 살풍경 속에 정독도서관은 최고의 휴식공간이다. 앞으로 공원에 가고 싶다면 정독도서관에 갈 일이다. 온 김에 책도 한 권 읽고 가면 좋겠다.



 


그림 8. 첫번째 건물과 두번째 건물 사이의 휴식공간은 도서관의 외부 공간 중 가장 조용한 독서장소이다.



서양식 건물의 강조된 포치(입구)를 지나 세 채의 건물을 가로지르는 통로를 지날 때마다 양쪽으로 건물 사이사이의 외부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벤치와 나무 그늘이 있다. 건물보다 건물의 외부가 더 자유로운 독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독도서관의 여유 있는 정원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곳이다. 서울의 복잡한 땅 한가운데 비워진 정원과 도서관 건물 사이의 비워진 공간은 모두가 비워져 있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된다. 이곳에서는 책을 읽으며 도시락을 까먹을 수도, 잠깐 낮잠을 즐길 수도 있다




그림 9. 사람들은 오두막 위에서 토론하기도 하고 도시락도 먹는다.



[1]현재 정독도서관으로 쓰이는 건물은1938년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어진 교사동 세 채이다. 38년 이전에 경기고등학교 최초의 전신은 1900년 설립된 관립한성중학교이다. 이후 1911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일본인과 차별교육), 1921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수업5년으로 연장), 1922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경기도로 이관), 1938년 경기공립중학교, 1946 경기중학교 (6년제, 서울 특별시로 이관)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기고등학교가 된 것은 1951년 이었다. 지금 정독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는 38년도에 신축된 건물은 2002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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