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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完)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3-1) 두 번째 보금자리, 서울어린이대공원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3부 서울 도심을 질주한 코끼리


    1장 두 번째 보금자리, 서울어린이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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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후의 왕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한일합방조약을 앞두고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순종에게는 순정효황후보다 앞서 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도 전인 1904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의 능은 능동에 마련되었다. 지금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자리다.


◀ 경성 골프 구락부에서 포즈를 취한 영친왕. 영친왕은 골프를 무척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해 경기도에 안장되자 순명효황후의 묘도 옮겨져 합장되었다. 빈 자리에는 경성 골프 구락부가 만들어졌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도 골프를 쳤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우리나라에 골프가 전래된 것은 1800년대 말이었다. 경성 골프 구락부는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을 거치며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54년 서울 컨트리클럽으로 다시 개장했다. 이곳은 정관계 거물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다. 그런 장소가 놀이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 데는 웬만한 정관계 거물들보다 더 급이 높은 최고 거물의 힘이 작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70124일 서울시청에 들른 박정희 대통령은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서울컨트리클럽 부지를 매입해 어린이들을 위한 맘모스 놀이터[각주:1]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요즘같이 간담회나 설명회 같은 여론 수렴 과정 없이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신문을 통해서야 이 소식을 접한 서울 컨트리클럽 회원들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지만 감히 항의할 수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이런 결심을 내린 것일까.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능동 서울컨트리클럽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 것은 워커힐 오가는 길에 한가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을 보고 못마땅해한 박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각주:2]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가롭게 골프 치는 모습이 그리도 못마땅했다면 그 자리에 산업 단지나 직업학교를 짓는 것이 더욱 상징적인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이대공원을 지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한가롭게놀도록 하는 쪽을 택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이것이 어린이까지 이용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다고 분석한다.

어린이는 천진무구한 존재이며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은 천진난만합니다. 따라서 독재자는 어린이의 이미지를 조작하면서 좋은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박정희는 어린이대공원과 육영재단을 통해 미래의 지지자인 어린이들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세뇌시키는 치밀한 계산을 한 것입니다.”[각주:3]

굳이 어린이라는 단어를 넣어 어린이대공원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을 보아도 이러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그렇게 어린이대공원 건립 계획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서울시의 예산은 빠듯했다.

양택식 서울시장은 대기업들을 찾아다니며 각종 시설물 기부를 부탁했다아예 서울시와 경향신문이 공동으로 시민 헌수(獻樹및 어린이 공원 시설물 보내기’ 운동까지 벌였다정주영 씨현대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어린이 헌장비 1, 400만 원 상당김상홍 씨주식회사 삼양사 사장미끄럼틀 1, 250만 원 상당김수근 씨대성산업주식회사벤치 100, 150만 원 상당…… 이런 식의 명단이 신문에 실렸다.[각주:4]


  


▲ 어린이대공원 개원을 축하하는 기업들의 신문 광고. 분수, 미끄럼틀, 벤치 등 시설물 사진 아래에는 기증한 해당 기업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어린이대공원은 197355일 어린이날에 맞추어 개원했다.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정문 현판과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진 커다란 돌이 사람들을 맞이했다. 개원 첫날부터 인파가 밀려들었다. 첫날에만 40, 다음 날엔 30만 명의 입장객을 기록했다. 그 이틀 동안 미아보호소 신세를 진 어린이는 400명이었다. 매표소 주변에는 암표상이 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이대공원이 성공적으로 개원한 것을 치하하는 의미로 건설 담당자들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어린이대공원이 큰 인기를 모은 것은 그 자체가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전국에 놀이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린이대공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성인끼리도 데이트, 야유회 등의 목적으로 몰려왔다. 정작 이곳의 주인공이어야 할 어린이 관람객은 어른들에 치여 제대로 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어린이대공원이 어른을 위한 공원으로 변해 가고 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어린이들을 위한 휴식처놀이터 또는 자연 교육장으로 만들어진 어린이대공원은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의 오락장 내지는 유기장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원, 식물원, 어린이 놀이동산은 물론, 20여 만 평의 공원 내부 어디를 가나 20대 아베크족이거나 셋 또는 다섯 명씩 떼를 지어 몰려온 젊은이들,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을 데리고 온 사람 등 모두가 성인들이다.

이 중에 간간이 눈에 띄는 어린이들은 부모들 손에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 피곤한 모습.

[……]

대구에서 노부모를 모시고 올라온 김모 씨(28)어린이를 위한 시설물을 어른들이 몽땅 차지해 어린이들에게 미안하지만 노인들을 모실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하기도.

경향신문 1976.3.22

 


▲ 어린이 대공원이 맞은 첫 일요일을 보도한 신문기사. 많은 관람객이 몰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송도 유원지는 서울대공원, 롯데월드 등 대형 놀이 공원이 등장하면서 경쟁력을 잃고 쇠락해 갔다. 어린이대공원도 시설물로 비교하자면 송도 유원지보다 조금 낫긴 하나 대형 놀이 공원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어린이대공원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몰려들던 관람객이 분산되면서 어린이대공원 내부는 적당한 여유를 갖게 되었다. 88열차, 바이킹 등 놀이 기구들도 자연스럽게 아이들 차지가 되었다. 서울 안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관람객 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자 한때 민영화를 통한 활성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1996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개통 덕분에 관람객은 다시 증가했다. 코끼리월드가 한창 서울행에 재도전하고 있던 2004년에는 어린이대공원 불황은 없다라는 헤드카피를 단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각주:5]

 

한마디로 어린이대공원은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굳이 코끼리 공연까지 유치할 이유가 없었다.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입장이었기에 계약은 어린이대공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애초에 코끼리월드가 바란 공연장 부지는 어린이대공원 안쪽에 위치한 바다동물관 옆이었다. 하지만 어린이대공원 측은 정문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구석진 자리를 배정했다. 2수영장이 있던 이 자리는 관람객들이 주로 다니는 중심 길에서 떨어져 있었다.

계약 조건도 코끼리월드에 불리했다.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대공원 측이 원하면 언제든 계약이 해지된다는 것, 이 두 가지 독소 조항이 있었다. 협상을 맡고 있던 정이사가 계약서 문구를 고치자고 요구해 보았지만 어린이 대공원의 대답은 내부 규정이라는 것이었다. ‘내부 규정이라는 말은 마치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약속처럼 들렸다. 서울행이 급했던 김회장은 더 따지지 않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중력의 법칙에 버금가는 갑을 관계의 법칙이었다.

그래도 수도권 입성을 위해서는 감수를 하자 했어요. 설마 별일 있겠나 해서. 최소 10년 이상은 있을 거 생각하고 들어간 거지.”

이 독소 조항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2005416일부터 어린이대공원에서 코끼리 공연이 시작되었다. 관람객 수가 김회장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은 아니었지만 송도 유원지에서보다는 확실히 늘었다. 이 정도면 순조로운 재출발이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날벼락이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 연재의 맨 앞을 장식했던 바로 그 코끼리 탈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미 서술했으니 이 의문을 파헤쳐 보자. 코끼리는 왜 탈출했던 것일까?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1. 동아일보 「박대통령 지시 “서울컨트리클럽 골프장 어린이 놀이터로”」(1970.12.4) [본문으로]
  2. 주간한국 「[한국초대석]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2005.9.26) [본문으로]
  3. 오마이뉴스 「친일·독재잔재 드리운 어린이대공원」(2004.5.4) [본문으로]
  4. 경향신문 「시민헌수 어린이 공원 시설물 보내기」(1973.3.10) [본문으로]
  5. 서울신문 「어린이대공원 “불황은 없다”」(2004.11.1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