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4부 코끼리, 빛고을 광주로 이사 가다


    3장 또 다른 이주자, 코끼리 조련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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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동물원을 찾은 코끼리들이 어린이대공원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코끼리월드의 규모도 급격히 작아졌다. 여성 무용수들을 라오스로 돌아갔고 한국인 운영 인력도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해서 코끼리월드를 떠난 직원이 40명가량 되었다. 이제 김회장 외에 코끼리월드에 남은 인원은 코끼리 판매를 진행할 정이사 그리고 코끼리들을 돌볼 열 명의 조련사들뿐이었다. 정이사와 조련사들도 코끼리들과 함께 광주로 왔다. 정이사는 우치 동물원 근처의 아파트에, 조련사들은 우치 대공원 안에 마련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이 와중에도 조련사 인원은 줄지 않았다. 코끼리월드가 세워진 이후로 조련사는 언제나 열 명 정도를 유지해 왔다. 최소한 코끼리 한 마리당 한 명의 조련사가 따라붙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사이 조련사들의 구성에는 변화가 있었다.



날이 쌀쌀해지자 코끼리에게 부직포를 덮어 주는 조련사. 조련사들은 코끼리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당했다. ⓒ연합뉴스, <코끼리도 추워요> 2009.11.16


처음에 코끼리들과 함께 한국 땅을 밟은 조련사들은 모두 라오스 국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라오스 출신 노동자는 통 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라오스 정부가 우리나라에 노동자를 파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코끼리월드 소속의 조련사들과 무용수들은 우리나라에서 취업 비자를 받고 일하는 거의 유일한 라오스 노동자였다. 이들 외에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라오스 사람으로는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고위층 자녀인 유학생들이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주한 라오스 대사관에서는 코끼리월드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정이사는 라오스 대사가 코끼리월드에 무척 호의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대사가 직원들하고 명절 때 과일 한 박스 들고 우리 회사로 오고 그랬어요. 물론 우리도 갔다 줬지만. 그런 식으로 대사가 몇 번이나 직접 왔어요. 자기 나라 사람들 잘 좀 부탁한다고. 우리 직원들 면담도 하고. 왜 그랬냐면, 그 못사는 나라에서 한국에 거의 최초로 취업을 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잘돼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우리도 계속 라오스 사람을 쓰죠. 우린 딴 나라에서 조련사 데려와서 써도 됐거든요. 꼭 라오스 사람 써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정이사 말대로 코끼리월드는 외교 관계보다 수익 창출이 훨씬 더 중요했다. 시간이 지나 조련사 인원에 결원이 생기자 라오스뿐 아니라 태국에서도 새로운 조련사를 데려왔다.

“아무래도 태국 출신 조련사들이 좀 더 전문적이거든요. 그 나라는 코끼리 공연을 굉장히 많이 해요. 라오스 출신 조련사들은 전문성은 떨어져도 그 코끼리들이랑 어릴 때부터 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러니까 훤히 알아요. 얘는 어떻게 하면 말 잘 듣고 어떻게 하면 말 안 듣고. 그래서 라오스 출신이 반, 태국 출신이 반 이렇게 되게 한 겁니다.”

라오스 조련사들과 태국 조련사들 사이에서 국적으로 인한 반목은 거의 없었다. 라오스와 태국은 둘 다 코끼리의 나라를 자처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닮았다. 라오스 국민의 약 70퍼센트는 태국계로 분류된다. 라오스의 언어인 라오어는 태국어와 상당히 흡사한 데다, 태국 북부 지역에서도 쓰이기 때문에 태국어의 방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라오스 조련사든 태국 조련사든 이곳에서는 똑같이 이주 노동자라는 신분이었다.



2007년 벌어진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의 추모식. 이주 노동자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뉴시스, <여수외국인 보호소 화재참사 추모식 열려> (2007.2.25)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을 열악하기 짝이 없다. 월 평균 급여가 2011년을 기준으로 100만 원에도 채 못 미치는 99만 9000원.1) 이마저도 체불되기 일쑤다. 부당 해고, 산업 재해, 폭력 등 다양한 인권 침해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는 공장 옆에 딸린 컨테이너다. 2009년 국제 엠네스티는 우리나라의 이주 노동자 실태를 조사한 후 발표한 보고서에서 ‘일회용 노동자’라는 표현을 썼다. 이주 노동자들은 일회용 물품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되었다가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코끼리 조련사들이 받은 대우는 일반적인 이주 노동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조련사들은 한 달에 2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았고 1년에 한 달씩 휴가를 받아 고향에 다녀오기도 했다. 휴가 때 왕복 비행기 표는 코끼리월드에서 부담했다.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이 3D 업종에서 단순 업무에 투여되는 데 반해 코끼리 조련사들은 나름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끼리월드의 수익 기반인 코끼리들의 안녕과 코끼리 공연의 진행은 전적으로 조련사들에게 달려 있었다. 소프트웨어 회사의 핵심 인력은 프로그래머이고, 출판사의 핵심 인력은 편집자이며, 디자인 회사의 핵심 인력은 디자이너이듯이 코끼리월드의 핵심 인력은 코끼리 조련사인 셈이었다. 동물원에서 근무하는 수의사라 할지라도 코끼리에 대해서만큼은 이 조련사들의 지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핵심 인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대우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세상 이치다. 코끼리 조련사들 역시 어디까지나 이주 노동자치고는 나은 대우였을 뿐, 핵심 인력으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시각을 달리 해서 보면, 코끼리 조련사들은 회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단지 이주 노동자라는 이유로 그 역할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조련사들이 코끼리월드를 떠나는 경우는 자의로 그만두는 것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회사에 밉보여 해고당하는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김회장은 곧바로 해고 통보를 내렸다.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여서 물어보면 이미 자기 나라로 떠났다고 했다. 매정한 처사로 보이지만 정이사는 이렇게 항변한다.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하고 한 번쯤은 넘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절대 안 빌어요. 사과 한마디를 안 하더라고. 회장님이 나가 이러면 곧바로 짐 챙겨서 지네 나라로 돌아가 버려요. 갈 때 비행기 표도 우리가 대 줬습니다.”

해고 사유는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이 가장 많았다. 정이사는 조련사들의 숙련도나 전문성은 인정하면서도 노동 강도에 대해서는 상당히 박한 평가를 내린다.

“그 조련사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70년대, 80년대에 중동 같은 데로 돈 벌려고 나간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화 벌려고 얼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했다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달라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출세해야지 이런 생각 자체를 안 하더라고요. 내 생각엔, 천성이 그런 것 같아요. 이모작, 삼모작을 해서 먹을 게 널려 있으니까 우리나라처럼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정이사의 말은 인종 차별적인 고정 관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와 비슷한 증언은 동남아 전문가에게서도 나온다. 『동남아문화 산책』의 저자인 서강대학교 신윤환 교수는 동남아 사람들에게 게으름이란 여유의 표출이지 성격의 결함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자연 환경 때문에 예로부터 동남아에서는 부지런함이 곧 수선을 떠는 것과 같았고 부의 축척은 미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2)

그런데 동남아 사람들이 마냥 게으르기만 하다면 동남아 출신의 수많은 노동자가 우리나라에서 야근과 잔업을 감수하면서까지 돈을 벌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는 민족성이나 문화가 경제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100년 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은 게으르다, 독일 사람들은 도둑질을 잘한다는 평을 받았던 것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이 원래부터 근면해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제가 성장하자 일본 사람들이 근면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코끼리 조련사들의 하루 일과는 어땠는지 살펴보자. 아침 일찍 일어나 코끼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먹이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다섯 차례의 공연을 진행했고 공연장 옆에서는 하루 종일 코끼리 타기 체험을 진행했다. 저녁에는 다음 날 관람객들에게 코끼리 먹이로 팔 당근을 자르는 작업을 했다. 밤이면 교대로 한두 명씩 코끼리들 옆에서 불침번을 섰다. 반드시 영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김회장의 방침 때문에 수시로 교외로 나가 직접 생풀을 베어 트럭에 실어 왔다. 혹사는 결코 아니었지만 만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치 동물원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더 이상 공연을 안 하게 되었으니 일 자체가 조금은 수월해졌을 것이다. 우치 동물원 뒷산에는 대나무의 일종으로 코끼리가 좋아하는 신우대가 널려 있어 먹이를 구하기도 한결 편해졌다. 관람객이 적으니 잘라야 하는 당근의 양도 적어졌다. 해가 지면 근처 저수지로 밤낚시를 나서곤 했다. 물에 직접 들어가 투망질로 블루길이나 베스를 잡았다. 밤낚시에서 잡힌 물고기는 바싹 튀겨져 다음 날 아침 밥상에 올랐다. 물고기뿐 아니라 매미나 잠자리도 곧잘 잡아서 반찬으로 먹었다. 광주가 명색이 광역시이긴 하지만 우치 동물원은 녹지로 둘러싸인 교외에 위치해 있어서 조련사들은 좀 더 고향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 해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본 코끼리 조련사들은 동물원에서 일하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했다. 어쩌면 코끼리월드는 우리나라의 70년대 산업 역군 수준의 노동 강도를 기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수성가한 김회장 본인이 바로 그 산업 역군 중 한 명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조련사들 중 한국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캄텐

전체 조련사들 중 라오스 출신과 태국 출신의 비율이 반반씩 유지되긴 했지만 라오스 출신 중에서도 끝까지 남은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조련사들의 대변인 격이었던 캄텐과 그의 형 캄폰이었다. 정이사도 캄텐, 캄폰 형제에 대해서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캄텐이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말을 가장 잘했기 때문이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열여덟의 나이였던 캄텐은 1년 만에 한국말을 제법 알아듣고 말도 곧잘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조련사들과 코끼리월드 경영진과 동물원 직원들을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캄텐이 다른 조련사들보다 월급을 더 받지는 않았다. 대신 방송사에서 코끼리 출연 섭외가 오면 대부분의 경우 캄텐이 출연했고 그때마다 출연료로 부수입을 챙겼다. 형인 캄폰은 라오스에서 대학까지 나왔지만 그저 말없이 웃는 얼굴로 일에만 몰두하곤 했다. 지금은 조련사로 일하고 있지만 형제는 다른 미래를 꿈꾸었다.

“돈 많이 벌어서 라오스 갈 거예요. 잘 결혼하고 큰 식당 차릴 거예요.”

이들 형제는 라오스에서도 형편이 비교적 나은 가정에서 자랐다. 가정에서 코끼리를 길렀다는 것이 그 증거다. 코끼리는 라오스의 농가에서 사육하는 대표적인 가축 중 하나다. 라오스에서 야생 코끼리는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여러 번의 전쟁을 거치며 거의 씨가 말랐고 지금은 가축화된 코끼리만 남아 있다. 코끼리 한 마리 값이 집 한 채 값과 비슷하기 때문에 코끼리를 기르는 집이면 경제 사정이 여유로운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코끼리는 소처럼 농사에도 쓰였지만 최근에는 수익이 더 높은 벌목에 주로 이용된다. 하지만 캄텐, 캄폰 형제의 집에서 기르던 코끼리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어린 주인을 따라 코끼리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이 코끼리가 우치 동물원에 온 코끼리들 중 한 마리인 ‘짠디’였다. 짠디는 코끼리 학교에서 무엇을 경험했을까? 이것은 코끼리들에게 조련사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과 연결된다.




1) 서울신문 「외국인 노동자 생산 유발 효과 年 10조 원 시대」(2012.4.23)


2) 신윤환 「동남아인들의 가치관과 윤리 의식: “게으름”과 “느슨함”」(서남포럼 뉴스레터 20호/ 2006.5.10)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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