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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친절하지만 기품 있는 철학 교양서를 만들다


아래 글은 65 발행된<기획회의> 297호 출판사 서평’란에 실린 반비 편집자의 글입니다.


친절하지만 기품 있는 철학 교양서를 만들다


철학 연습

  서동욱의 현대철학 에세이

서동욱 교수가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를 한다. 이것만으로도 우선 관심이 갔다. 서동욱 교수는 탄탄하고 꼼꼼한 연구로 정평이 나 있고, 물론 시인이나 평론가로도 알려져 있는 분이긴 하지만,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네이버에 들어가 보니 글 한 편 한 편마다 댓글이 몇백 개씩 달려 있다. 가령 이런 것.


"어렸을 적에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진부하고 어렵고 현실적으로 의미 없는 넋두리쯤 되는 양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지혜, 지식들을 고맙게도 책을 통해 공짜로 얻은 후엔 철학, 사랑, 자유, 지혜, 평등, 존중 등 수많은 언어로 표현된 가치들이 얼마나 인간에게 필요하고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 돌쇠 (myuc****)


인문서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독자들 수준을 너무 낮춰보는 나쁜 버릇이 생긴다. ‘이 책은 어려우니까 안 팔릴 거야, 이 책은 두꺼우니까 사람들이 안 보겠지......’ 하지만 어려워서 외면당한다는 것은 절반만 사실이다. 좋은 책들은 어려워도 잘 읽힌다. 최근 철학 교양서들이 독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말과의 씨름, 생각과의 씨름은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쁨 중 하나인데, 책 만드는 사람들이 친절함과 안이함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쉽게 만들겠다면서 알맹이들을 빠뜨리다 보니 독자들에게서 더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철학 연습>은 이런 고민의 와중에 만들어졌다. 서동욱 교수의 글이 이런 고민을 자극했다. 현대철학의 진지한 고민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면서도, 우리 삶과 밀착시킴으로써 더 흥미롭게 만드는 글쓰기.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철학 개론서가 아니라, 저자의 머리와 마음을 통해 충분히 소화된 이야기만을 전하는 철학 교양서. 앞으로도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마치 이런 고민에 답하듯, 저자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터치스크린, 전자책 돌풍이 책읽기와 글쓰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대목이다.


통계나 호구조사 같은 ‘생각하지 않는 계산’이 아닌 진짜 사유의 내용을 담은 정보는, 동굴 벽화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요술이 아닌 지적 노동의 담당 영역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즉 성찰과 연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기기 또는 새로운 장난감을 구입한 이들은 짧은 설렘 뒤에 곧 허무에 빠지기 일쑤다. 인간의 지적 노동의 진보와 새 상품은 아무 상관이 없기에.(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