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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서경식, 왜 '한국미술' 이 아닌 '조선미술'인가?



서경식, 왜 '한국미술' 이 아닌 '조선미술'인가?







서경식 선생님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가 출간된 이후 많은 독자 분들이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제목에 관한 궁금증인데요. 왜 '나의 한국미술 순례'가 아니라 『나의 조선미술 순례』라는 것입니다. 특히 『나의 조선미술 순례』의 목차를 보신 분들은 조선시대 미술가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대 한국미술가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담겨 있는데 왜 조선미술이라고 제목을 정했는지에 대한 궁금해하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 책을 펴내며, 중에 '제목에 관하여' 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는 그 제목이 정해지기까지의 고찰과 속뜻만이 아니라 서경식 선생님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고민과 깊이 있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 전문을 올려드리니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







제목에 관하여



 이 책의 제목에서 나는 '조선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이 용어에서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 혹은 '북조선(북한)의 미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법도 하다. 그러나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 '조선미술'의 함의는 그런 닫힌 뜻이 아니다. 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본 총칭으로 사용했다.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라는 용어가 제시하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는 협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과 관련해서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꾼데 대해 반론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국'이라는 호칭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재일과 재중 동포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모든 조선 민족에 의한 미술 행위를 '한국미술'로 한데 묶어 부르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요컨대 우리가 경험한 식민지 지배, 남북 분단,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근현대사의 과정이 민족의 호칭 자체에도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호칭의 혼란은 곧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반영한다. 호칭의 통일은 현실 자체의 분열과 혼란을 극복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에 드러난 분열과 혼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여 '우리에게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시금 마주해야만 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되묻는 일이다.


 민족의 총칭을 '한韓'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은 먼저 나의 생각을 이해해준신 후, 따뜻하게 위와 같은 지적을 하신 적도 있다. 물론 이 문제를 두고 내 의견만을 고집하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언젠가 다가올 어느 날, 남북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평등한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민족공동체가 평화 속에서 실현된다면, 나는 그 새로운 공동체의 호칭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기쁜 마음으로 논의하고 싶다. 아니, 이미 그때는 논의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름은 공동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구성원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저절로 정해지리라. 다만 그날까지, 그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분열은 분열로서 이산은 이산으로서 그 상처나 아픔까지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할 호칭으로 '조선'을 선택했다.


 '조선'이라는 용어를 고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말이 '학대'를 받아온 호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민족의 호칭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는 차별의 멍에를 지게 되었고, 민족의 분단 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떠안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로는 공포마저 느껴왔는데,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다. 나는 억울함을 당한 이 호칭을,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학대'에서 더욱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대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 서경식, 『나의 조선미술 순례』, 제목에 관하여







『나의 조선미술 순례』 도서정보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