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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새벽의 인문학, 겨울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1)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 pixabay


 새벽은 동이 트기 전에 이미 시작해 하늘을 통해 뻗어가 별들의 천장까지 미치는 것 같다. 물론 눈에 보이는 별들 말이다. 우주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무수히 많다. 다른 행성의 생명체도 그렇고, 우주에서 사라진 물질들도. 계산에 따르면 별, 행성, 은하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은 실제 존재하는 물질의 4퍼센트밖에 안된다. 나머지, '암흑물질' 혹은 더 이상하게는 '암흑 에너지'라 불리는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마당이나 길 위도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게로 가득 차 있다.


  감각의 문턱에서 자아가 세계를 맞닥뜨린다. 그렇지만 대체로 우리는 수박 겉핥기의 삶을 산다. 그러지 않으면 감각의 산사태에 짓눌리고 말 것이다. 아침에 라디오를 켜서 채널을 맞추다 보면 '잡음' 혹은 '혼선'에 의한 소리를 듣게 되는데, 거기에 끼어 다른 대륙에 떨어지는 뇌성벽력이나 사라져가는 은하의 최후의 몸부림이 들려온다는 것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면 마음이 잠시 멀리 떨어진 대륙이나 은하에 다녀오면서 마음의 틈이 넓어진다.



ⓒ pixabay


  검은 새벽 뒤에 분홍색 가장자리를 두른 새벽이 온다. 새벽빛은 정오의 작열하는 빛이나 해질녘 어스름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명징함을 준다. 녹슨 철제 의자에 앉아 나는 녹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녹음 금속을 꼼꼼하게 분해해서 모양 없는 동 조각, 갈색 구멍 송송 샌드위치, 붉은 알갱이로 된 성상, 드러누운 조상, 너덜너덜한 구멍, 시간에 바치는 부슬부슬한 주황색과 검은색 기념비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녹을 하찮게 여기지만 실상 녹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후원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선명한 빛 속에서 녹이 자기 과거를 이야기한다.


  생명체의 발원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박테리아 같은 원시세포는 우주 어디에나 생길 수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해를 받는 파도에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바다 밑바닥 해구(海溝)에서도 초고온성 생물이 번성한다. 수술 도구를 소독할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물에서도 잘 사는 단단한 박테리아도 철을 먹는다. 바다 밑 깊은 도랑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기운을 받으며 펄펄 끓는 물에서 재생산을 하고 광물질이 많은 섭씨 130도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심해에 나타나는 이런 열을 좋아하는 미생물 가운데 하나인 지오박터 메탈리리듀슨스는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단지 바위와 물만 있으면 되고, 나머지는 저절로 일어난다. 지구의 뜨거운 핵에서 나온 황화철(녹)이 차가운 물을 만날 때 그 충격으로 벌집무늬의 기둥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데 거기에서 최초의 사랑 있는 세포가 자라났을 것이다. 젊은 지구에 풍부했던 산소와 이산화탄소에 열과 고압을 가하고 녹을 촉매로 투입하면 자연스럽게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최초의 미생물들이 이 요람을 떠나 육지를 정복하러 갔을 것이다. 이런 원시적 철이 오늘날 우리 세포 안에도 일부 있다. 녹은 사실 아주 느리게 타는 불이다. 불처럼 녹도 에너지를 먹으며 에너지를 내놓는다. 강철을 쪼개놓으면서 크기도 자라난다. 철은 물 같은 천해액에 노출되었을 때 특히 빨리 부식하는데, 인간은 전해질로 가득 찬 존재다.



ⓒ pixabay


  녹이여, 너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조용히 말한다. 재잘대고 지저귀고 깍깍대며 하늘에서 숨바꼭질을 시작한 새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소리를 낮춘다. 내 녹슬고 낡은 의자에는 일본 사람들이 와비사비(侘寂)라고 부르는 자발적 가난이 서려 있다.


  와비란 원래 자연에서 홀로 인간 세상을 등지고 비참하게 살면서 우울하고 황량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비는 '쓸쓸함', '메마름', '시듦'을 뜻하는, 세월의 녹청(綠靑)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담은 말이다. 그런데 와비사비라는 문구가 16세기에 다른 뜻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를 유폐하고 숲에서 은둔하는 은자의 삶이 번잡한 사회에서 얻을 수 없는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처럼 느껴지자 이 단어가 자연과의 친밀함, 일상의 소박함에서 느끼는 기쁨을 가리키게 되었다. 은자의 눈은 아주 조그마하고, 거칠고, 갈라지고, 불완전한 것, 흥미로운 흠이 있는 사물들을 향했다. 특히 녹슬고, 낡고, 닳고, 세월의 흐름을 드러내는 것들을. 절묘하게도 일본어에서 녹을 뜻하는 錆이라는 글자도 발음은 '사비'이다. 그래서 다시 녹에서 비롯한 생명의 기원과 'rustic(시골스러운)'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녹(rust)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와비사비는 장식적 예술에 반기를 들며 소박한 형태의 순수성을 높이 쳤지만, 유럽 모더니즘의 이상인 매끈한 유선형 미래주의적 작품들과는 다르게 유기적이고 불완전하고 소박한 물건이 퇴색한 것, 대량생산된 상품이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손으로 만든 물건을 아끼며 사용해서 닳은 상태를 더욱 가치 있게 여겼다. 와비사비는 직관적인 현재 이곳의 관찰에 기댔고 앞날을 내다보거나 진보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와비는 목가적 미학에 따라, 자연은 다루기 힘들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기꺼이 자연에 지배당하고자 했다. 인간이 창안해낸 기술이 아무리 미끈하고 편리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자연에 복종했다. 따라서 와비사비는 부식, 완전히 분해 될 때까지 계속되는 부패, 미지근한 액체 형태로 조용히 지구의 울림을 전달하는 불분명성이라는 개념을 끌어안는다. 시도 고즈넉한 우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소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와비사비가 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는 사람도 사물도 무너져 내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일과를 마치고 (2)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