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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새벽의 인문학, 겨울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2)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일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말이 여럿 있다. 어떤 사람은 덧없는 것을 찬미하며 아와레(哀)를 느낀다. 썩어가는 나무를 뒤덮은 반짝이는 녹색 이끼에서, 기름진 땅에서 솟는 버섯이나 독버섯에서, 금빛과 붉은빛 이끼 뗏장에서, 부패에서 느끼는 무상한 아름다움이다. 새가 날아간 뒤에는 뒤에 남아 있는 소리 없는 잔향인 요인(余韻)을 느낄 수 있다. 시인 월러스 스티븐스가 「검정지빠귀를 보는 열세 가지 방법」이라는 시에서 "지저귀는 검정지빠귀 / 혹은 바로 그 뒤." 둘 다를 찬미했는데,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혹은 유겐(幽玄)이라고 하는 절절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13세기 작가 가모노 조메이가 「호조키(方丈記: 오두막의 기록)」(1212)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드넓은 무색의 고적한 하늘 아래 가을 저녁 같다. 어째서인지, 무슨 이유라도 있는 듯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혹은, "안개를 통해 가을 산을 바라보면, 흐릿하게 보이는 풍경인데도 엄청난 깊이가 있다. 안개에 덮여 가을 잎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끌려든다. 상상 속에서 펼쳐진 끝없는 풍경은 눈으로 또렷이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 pixabay


  태양 에너지가 우리 낮을 밝히고 초식동물의 연료가 되어주고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된다. 우리는 이런 동식물에 축적된 햇빛을 먹고 태워서 일하고 요리하고 사랑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사냥감을 쫓을 때 에너지로 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엮인 불의 타래를 통해 지구상 다른 생명체들 전부와 연결된 셈이다. 녹도 불 가운데 하나이고. 우주에는 우리 것처럼 녹슨 행성들이 있을 터, 거기에도 생명이 풍성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곳 생명체는 얼마나 잘,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을까?


  이런 질문이라면 충분히 공안(公案)으로 쓰일 법하다. 공안이란 생각을 응축해놓은 것으로 잘 풀리지 않는 정신적 매듭이다. 불교 어떤 종파에서는 수행자들에게 문구와 상황을 주고 명상을 하게 한다.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이성의 덫에서 풀려나게 하는 도구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1. 한 사람이 100자 높이 장대 위에 앉아 있다. 어떻게 내려올까?

2. 바퀴살이 쉰 개 이는 바퀴를 두 개 만든다. 바퀴 중심을 잘라냈다고 해보자. 그래도 그것들이 바퀴일까?

3. 바람 부는 날, 승려 두 사람이 파닥이는 깃발을 보고 말씨름을 한다. 첫 번째 승려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지 바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라고 하고 두 번째 승려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지 깃발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가 옳은가?

4.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한 손의 소리는 무엇인가?

5. 구부러진 것 안에 곧은 것은 무엇인가?

6. 찻주전자에서 5층탑을 꺼내라.



  공안은 무궁무진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살아 있는 수련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해석이 아니라 깨달음이 목표다. 옛말에 따르면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을 혼동하기게 쉽기" 때문이다. 선(禪)을 가르치는 노먼 피셔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수련은 문구를 지니고 살고 명상하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아주 크고 낯설어져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수수께끼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둠 속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면서 공안을 하나 잡고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오늘 아침에는 무(無)에 대해 약간 생각했다. 공안이라는 게 가치 있는 까닭은 잠깐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무는 대략 "없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불교 수행에 종종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런 오래된 공안도 있다. "무는 무엇인가?"



ⓒ pixabay


  별들의 대경기장 아래 앉아 새벽을 기다리고 있자니 무는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이 다른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을 흡수하여 가득 차는 거라는 생각, 하지만 그 입자가 너무 작아 "모든" "것" "그물" 같은 단어의 그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 그것도 다른 생명체나 은하들과 마찬가지로 거슬리도록 비합리적인 '무'의 순간적인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 아주 멀리 있는 별들을 엮듯이 우리 모두를 엮는 가변적이고 궁극적으로 광적이고 말이 없고 아낌없는 힘이라는 것이라는 생각 등이 떠오른다. "힘"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인식하는 우주의 파편을 전달하기 위해 그런 것에 기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은 어떤 힘도, 우리도, 우주도, 심지어 무·중간자도 없고 분자들만 있을 뿐인데, 이 에너지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로 고여 있지만 결코 다시는 이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전에 이런 깨달음을 얻은 선(禪) 스승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절의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종도, 나도 없고, 소리만 있었다." 나 자신과 종, 소리와 우주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때로 나는 수영을 할 때 물살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물의 역사와 내 역사가 한데 녹아들고 내 분자들이 부서져 흩어졌다가 물고기 떼처럼 이따금 되돌아와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형성하지만 사실은 일시적으로 같이 움직이는 세포의 주머니일 뿐이라는 느낌. 햇살이 프리즘 같은 물에 부딪히면 웅덩이의 벽과 바닥이 오직 생각만을 담고 있는 눈부신 '우리'가 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원자의 수준에서 우주와 교감하는 희열에 떨며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부글부글 끓어 나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아직도 일상의 나날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상태로 보낸다. 덩치 큰 '나'가 지저분하고 이기적인 손님처럼 머릿속에 대자로 뻗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깨달음이라는 게 계속 유지될 수가 있을까? 캘리포니아 우드에이커에 있는 스피릿 록 센터 설립자이자 지도자인 잭 콘필드는 깨달음은 지속되지 않으니 계속 숙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숙제를 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은 일도 해야 하고, 늘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수도원에서 살지 않는 한 고요하고 평화롭고 기분 좋은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신경을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불안감이 밀려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들썩이는 세상에서 동이 트는 짧은 시간, 존재의 덧없는 외투가 그저 몸에 꼭 맞는 순간이 있어 기쁘다.



ⓒ pixabay


  결국 삶이 최고의 공안인 셈이다. 그 단어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말이다. 물, 무기물, 열이 분자의 차가운 용광로 안에서 마늘어낸 끝없이 변화하는 공안,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 이로부터 의미에 물들고 목적에 좌우되는 생명이 자라났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언제나 녹, 오래되고 알 수 없고 상상도 하기 어려우나 모든 생명을 창조한 녹, 우리를 하씬 하나씩 세세히 지워나가는 녹이었다.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