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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 책꾸러미/첫 번째 책꾸러미

비하인드 스토리 : 편집자가 들려주는 꾸러미 뒷이야기

비하인드 스토리 :


편집자가 들려주는 꾸러미 뒷이야기




즐거웠습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어떤 이벤트도 이만큼 즐겁게 준비한 적이 없었습니다. 꾸러미를 받아볼 독자분들에게 드리는 편지를 쓰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준비하는 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첫 번째 책 꾸러미의 메이킹 필름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기에 그 못 다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아쉽게 내려놓은 책들, 여기서 소개합니다


꾸러미 준비 과정의 모토는 ‘재밌게!’였습니다.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는 방법도 있다는 걸, 생각지 못한 독서의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독자 여러분과 나누는 일이 책 꾸러미의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래서 참고문헌 페이지에 등장할 것 같은 책만 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던, 상관없어 보이던 책들과도 손을 잡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같은 분야의 책뿐 아니라 소설, 시, 어린이책, 그래픽 노블, 에세이까지 모든 분야의 책을 후보로 삼았습니다.


서점과 도서관의 서가를 뒤지고, 여러 분야의 필자와 전문가들,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뽑은 목록이 줄잡아 스무 권이 넘었습니다. 맘 같아서는 열 권, 스무 권을 보내드리고 싶었으나, 꾸러미 주제와 가장 연관이 깊은 책을 고르되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느라 아쉽게 내려놓아야 했던 책이 그만큼 많습니다. 책의 바다가 넓다고들 하지만, 새삼 얼마나 많은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그중 몇 권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이제는 반정부 시위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 가면으로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브이 포 벤데타』는 전체주의 체제에 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래픽 노블입니다. 내용상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정부와 정치를 다루는 『왜 우리는 정부에게 배신당할까?』와 조금 거리가 있어 꾸러미에 담지는 못했습니다만, 사회 체제에 관해 좀 더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할 작품일 겁니다.




브이 포 벤데타 (2006)

V for Vendetta 
9.2
감독
제임스 맥테이그
출연
나탈리 포트만, 휴고 위빙, 스티븐 레아, 스티븐 프라이, 존 허트
정보
액션, SF | 미국, 영국, 독일 | 132 분 | 2006-03-16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는 미국의 대표 지식인 하워드 진이 작고한 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써온 글을 엮은 책입니다. 『왜 우리는 정부에게 배신당할까?』와 딱 들어맞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제의 연관성이 크지 않아 꾸러미에서는 빠졌습니다. 하워드 진의 전 생애에 걸친 첨예한 문제의식과 통찰력이 빛나는 책이니 일독을 권합니다.



『대통령은 돈을 마구 찍을 수 있다고?』는 청소년을 위한 경제학 교과서입니다. 제목도 그렇지만 목차도 무척 매력적인 책이었습니다. ‘한국은행 직원들에게는 돈을 찍어서 월급으로 주면 되나요?’, ‘경제학을 공부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나요?’ 같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주로 다루고 있어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나?’라는 꾸러미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주변에 중학생 정도 나이의 친구가 있다면 추천해주기 좋은 책입니다.




편집부의 SOS, 함께 읽으면 좋을 소설을 추천 받습니다


문학 작품이 꼭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사회 도서의 문제의식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도와주는 통로가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편을 꼽아보았지만 ‘이거다!’ 싶은, 꼭 들어맞는 작품이 없어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반비와 이웃해 있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에 추천을 부탁했습니다. 『왜 우리는 정부에게 배신당할까?』보다 일주일 앞서 출간 예정이던 『이웃집 슈퍼히어로』에 세월호 참사에서 출발한 작품이 담겨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였습니다. “혹시 책 전체적으로도 연관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럼요, 슈퍼히어로가 왜 있겠어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슈퍼히어로는 무너진 사회, 부패한 정부에 시달리며 고달픈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소망이 만들어낸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렇다는 설명이었죠.


그 외에도 다큐 형식을 취해 좀비 아포칼립스가 닥쳐온 미래를 그려내 국가 권력자와 군부를 풍자하는 『세계대전 Z』, 사회 체제와 페미니즘을 다루는 유토피아 소설 『빼앗긴 자들』 등의 여러 작품을 긴 시간에 걸쳐 친절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여기 한국 사회’의 이야기를 하는 책이 가장 걸맞다 생각되어 『이웃집 슈퍼히어로』를 최종 선정했지만, 말씀드린 다른 작품들도 굉장히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영화 전문지와 장르문학 전문지에서 일해온 김용언 기자,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선생님도 편집부에서 보낸 SOS에 흔쾌히 답신을 보내주셨습니다. 김용언 기자의 추천작 『펠리컨 브리프』는 듣자마자 편집자들 모두 “왜 그 책을 생각 못했지?”라고 탄식할 만큼 이 주제에 딱 맞는 책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영화화한 『고스트 라이터』, 일본 미스터리의 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 등의 여러 흥미진진한 작품을 소개해주셨습니다.


문강형준 선생님은 문학뿐 아니라 「왝 더 독」, 「프라이머리 컬러스」 같은, 미국 정치의 어두운 면을 그려낸 영화도 추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 미국처럼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를 하기보다 전체주의 체제 자체를 그리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더 많은 듯하다는 짤막한 경향 스케치와 함께 『브이 포 벤데타』, 『1984』 등의 작품을 말씀해주셨어요. 그러고 보니 『브이 포 벤데타』는 김용언, 문강형준 두 분의 추천 리스트와 편집부에서 꼽은 리스트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네요.




단지 덜 괴로운 것에 머물지 않도록


끝으로 여러분과 꼭 한 번 함께 읽고 싶었던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3월 말 한창 책 꾸러미 회의를 하던 도중 머릿속에 떠오른 글입니다. 학생들과 나눈 대화, 여러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꾸준히 한국 사회에 관한 성찰을 나눠주는 저자 엄기호 선생님의 칼럼이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소망하고 소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던 학생이 박민규의 소설을 읽고 ‘위로’를 느낀 이야기를 통해 ‘쓰고 읽는 기쁨’을 역설하는 글이었습니다. 한 단락을 여기에 인용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위로가 나타났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글의 무가치함에 대해 허무해하던 내가 위로를 느꼈다. 그의 이야기는 말과 글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고 이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또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이 이야기를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공부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가능성의 발견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월호의 고통 한가운데에서 저 학생이 한 질문, 즉 고통이 끝나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그것은 일본의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가 말한 것처럼 여전히 읽고 말하고 침묵하고 쓰면서 세계를 대면하는 일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를 대면하는 글을 읽고 쓰고 침묵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불가능한 것을 대면함으로써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쁨이 단지 덜 괴로운 것에 머무는 데서 우리 삶을 구원할 것이다.

 엄기호, 「쓰고 읽는 기쁨」(『경향신문』 2015년 3월 17일)


우리 역시 너무 괴로워서 고통을 외면하는 것, 단지 덜 괴로운 것에 머물지 않을 수 있기를, 읽고 쓰고 말하고 침묵하고, 그리고 세계를 대면하며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번 꾸러미를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