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잘 보낸 시간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 pixabay


  80세가 넘어 시력이 약해졌을 때 모네는 자기 정원에 있는 가파른 아치 모양의 일본식 인도교를 한 차례 더 그렸다. 이번에는 짙은 가을 색으로 그렸다. 밤색, 붉은색, 금색, 주황색, 녹색 등으로 칠했고 파란 난간의 다리는 희미한 형체만 있을 뿐이다. 황토색과 흰색의 수직 방향 붓질이 화폭에서 반짝인다. 전에 그리던 안개가 형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둥글리고 여름날 강렬한 녹색과 화려한 꽃 색깔을 뒤덮는 아침의 인상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점점 탁해져가는 눈으로 바라본 추상이다.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하고 물감의 각과 묵직한 붓질이 서로의 관계, 세상과 이어진 끈, 떠오른 해의 반향, 순간적인 것에 매달려온 모네의 늙어가는 감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마치 모네가 무대 옆에서 다시 무대 쪽으로 붓을 쥔 손을 뻗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억에만 남아 있는 청중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여전히 활동적이고 창의적이고 살아 있으나, 쇠락해가는,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묵직하고 추상적이 되어가는 모네. 세부는 사라졌으나 모네의 세계는 여전히 빛의 변화하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파란색만 보여." 1924년 6월 지베르니에서 모네는 의사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은 안 보여. 그런 색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 내 팔레트에 빨간색, 노란색, 특별한 녹색, 어떤 보라색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지금은 전에 보던 것처럼 볼 수가 없어. 하지만 그 물감들이 어떤 색을 내는지 잘 기억하고 있어." 이 시기에 모네가 그린 해돋이는 어두워 보인다. 모네도 그렇다고 느꼈다. 몇 차례 수술을 받고 백내장을 제거한 뒤의 일이다. 수술 뒤 최근에 자기가 그린 그림이 온통 갈색인 것을 보고 낙담하여 몇 점은 파기했다. 눈에서 백내장을 벗겨내고 세상이 원래대로 보이자 모네는 수련을 좀 더 그렸고 전보다 더 밝게 칠했다. 친구이자 미술 거래상인 폴 뒤랑루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온통 비둘기 목 색깔 아니면 펀치 색깔로 타올라. 정말 놀라워."



Claude Monet, Water Lilies, 1906 ⓒ wikipedia


  모네가 기록한 것처럼 바로 지금만큼 생생한 시간은 없다. 지금 현재의 진실만은 영원하다. 우리의 시간 감각은 자라면서 변한다. 어릴 때는 하루가 긴 것 같더니 늙으면 한 해 한 해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리는 다른 시간대를 지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받아들인다. 모든 게 새로운 데다 대부분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양이 많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느린 신진대사를 통해 세상을 감각하고 놀랄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삶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충격 등을 주어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와 비상 상태에 대처한다. 그러면 뇌가 정보를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간이 느려진다. 이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나는 아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바로 이것이 우리를 정의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이 질문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뒤늦게 찾아오는 일이 많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에야 떠오르는 사람도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동안은 꾸준히 찾아오더라도 물리칠 수 있다가(특히 한창 자녀를 키우고 있을 때는) 나중에는 도저히 미루기 힘들게 닥치기도 한다.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 그럴 때는 달라진다. 나는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꿈속에서 자주 깼다가 다시 죽음을 부인하는 잠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배우자가 죽음에 다가가고 있고, 나보다 젊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도 깊은 잠을 자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 그럴 때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순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 혈관 깊숙이 흘러 들어 가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나를 가득 채운다. 그냥 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도니다. 빛의 세상에 태어났으니 내 감각은 성숙하고 또 쇠락하리라. 그러나 쇠락하는 날까지는 감각들이 내가 사는 신비한 왕국, 차마 상상해보지 못한 곳, 희망과 영광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으로 가는 관문이 되어줄 것이다.



ⓒ pixabay


  우리는 허깨비, 괴물, 기적, 혹은 하나의 온전한 테마파크로 존재하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대체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가끔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 포착해보려 하면서 벌이는 숨바꼭질을 생각한다. 어느 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존재인 것 같다가, 다른 날에는 죄다 사기인 듯하고, 한순간은 스치듯 지나가고, 다른 순간은 절절하게 삶의 대위법 푸가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어는 손안에 놓인 조약돌 같아서, 성가시면서도 마음을 달래주는 염주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이 순간만의 바로 그러함을 대신할 것은 없다. 존재는 늘 선물, 저절로 주어졌고 포장을 뜯는 도중이고 탐구되기를 기다리는 선물이다.


  그저 살아 나타라라. 그러기만 하면 된다.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완전히 존재할 때, 그래서 좋건 나쁘건, 일이건 휴식이건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동이 터올 때 잠자던 사람은 깨어나서 하늘의 마법에 의해 침대 밖으로 끌려 나온다. 잘 보낸 시간. 어쨌거나, 언제나, 내가 이 문장을 마칠 때까지, 펜을 들고 종이 위에 조그만 검은 점을 찍을 때까지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였고 지금은 지금이다. 존재의 지금, 무르익는 새벽.




<새벽의 인문학> 겨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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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잘 보낸 시간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이 짧은 새벽 동안에 정말 많은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렌즈 모양 구름이 떠서 높은 곳에 빠른 바람이 분다는 걸 알려준다. 지붕널은 비둘기 깃털처럼 차곡차곡 겹쳤다. 개가 부지런히 냄새를 맡으며 아침 신문 읽듯 냄새로 세상사를 파악한다. 나뭇가지와 창문턱에 앉은 새들은 바람을 마주 보고 있다. 그래야 깃털이 몸에 딱 달라붙어 바람에 날개가 들썩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장류 몇이 출근하러 길을 따라 걸어가며 사교성에서 우러나오는 몸짓을 하다. 이런 게 삶의 질감, 이 행성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 pixabay


  저녁때면 나는 주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특히 두드러지는 경험을 고른다. 맛난 레몬 셔벗처럼 상큼한 것일 수도 있고, 책에서 읽은 눈에 번쩍 뜨이는 구절일 수도 있고, 점심 무렵 토막잠처럼 평화로운 것일 수도 있고, 공기 중 먼지에 머문 비스듬한 햇살처럼 뜻밖의 것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편지처럼 가슴 뛰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멸종 위기에 처한 카카오 70퍼센트 다크초콜릿처럼 검고 매끈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초콜릿 포장지에 그려진 파란 나비가 카너블루임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카너블루는 나처럼 이서커에 살았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붙인 이름이다. 마지막 남은 카너블루가 지금 네세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미국흰두루미들과 같이 살고 있기도 하다. 이상한 우연의 일치다. 이런 깨달음들을 말로 꾸며놓으면 기억 속에 저장하기 쉬워진다. 오늘 있었던 가장 좋은 일은 뭘까? 그날의 즐거움을 되새기다 보면 종종 놀랄 일이 생기기도 하고, 삶이 얼마나 충만하고 나날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힘든 날에도 평화, 즐거움, 기쁨의 덩어리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을 흘릴 수는 없다. 세상은 나름의 마법을 부린다. 대신 주의를 깊게 기울이며 우리 자신을 흘릴 수 있다. 내 삶은 늘 변화하며, 나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고, 사랑하는 사람의 병과 죽음을 경험했고, 존재의 소소한 부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삶의 감각적 축제와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장도 무척 즐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오늘 전장에 신고 나갈 신발을 고르는 것부터 모든 일이 그 갈림길에서 빛난다.



Claude Monet, Water Lilies, 1906 ⓒ wikipedia


  순간적인 것을 숙고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모네는 뒤집힌 풍화작용 같은 것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결정이 자라나는 과정이랄까. 모네는 맨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붓질로 계속 덧칠 했고 마른 붓으로 표면을 훑어 표면이 흔들리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떨 때에는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섞어 안료가 만나 섞이는 게 그림에서 보인다. 때로는 묵직한 붓질을 수직 방향으로 하여 얇게 칠한 층의 가장자리만을 건드리며 물결 모양으로 칠하기도 했다.


  "얇은 층 위에 두꺼운 층"이 유화의 기본이다. 작품이 완전히 마르려면 각 층이 아래층보다 두꺼워야 하고 기름기는 더 많아야 한다. 아니면 그림이 갈라진다. 묽은 액과 달리 유화물감은 증발하면서 마르는 게 아니라 산화하고(녹이 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몇 달,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미술품 관리자들은 80년이 지난 유화작품만 완전히 말랐다고 본다. 모네는 순간을 그렸지만 그림이 안정되기까지는 거의 한 세기가 걸린 셈이다. 모네가 작품을 완성한 뒤에도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에도 안료는 계속 움직였고 사람들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변하고 있었다.




잘 보낸 시간 (2)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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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인문학> 겨울

: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 pixabay


  우아하게 구부러진 팔 여러 개를 들고 사방으로 우주에 닿은 겨울나무가 동양의 신을 떠올리게 한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면 지지않고 시든 마지막 잎 몇 장이 음산하게 속삭인다. 세상은 우리가 하는 말만큼 수다스러운 외국어로 가득하다. 단단히 굳은 형체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숱한 구멍과 굴곡에서 조율된 소리를 낸다. 누구의, 무엇의 숨을 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액체라도 상관없다. 소리는 물을 통해서도 잘 전해지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침식과 침전을 통해 만들어진 카유가 호수는 늦여름에는 깊고 생명체로 가득하고 나름의 음조를 가지고 있어 물새와 개구리들이 물 위로 울음소리를 흘려보낸다. 소리는 얼어붙은 물 위로도 전달된다. 극지에서는 단단하고 평평한 눈밭 위로 목소리가 1킬로미터도 넘게 뻗어간다.


  친구가 나를 고요한 휴식처로 초대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고요한 곳이다. 새들은 노래하고 울부짖을 테고 나뭇잎은 바스락거리고 매미는 맴맴거리고 바람은 솨아 불 테니 말이다. 이런 소리들을 빼더라도, 아니 아예 은하계를 더난다고 하더라도 빅뱅에서 비롯된 배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전파망원경에는 이 소리가 걸걸하게 계속되는 한숨처럼 기록된다. 내가 고요하다고 한 것은 사람 소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소리 없는 의사소통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하라게이(腹芸: 배우가 대사나 동작을 하지 않고 표정 등으로 심리를 표현하는 일 ─옮긴이)라고 하는 것, 보디 랭귀지, 몸짓, 얼굴 표정, 뜻이 있는 눈빛도 멈춘다.


  "곧 적막이 전설이 되어버릴 것이다." 조각가 장 아르프가 「신성한 적막」에서 경고했다. "사람은 적막에서 등을 돌렸다. 날마다 소음을 증가시키고 삶의 정수, 사색, 명상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기계와 장치들을 만들어낸다. 빵빵거리고 악을 쓰고 빽빽거리고 쾅쾅거리고 삑삑거리고 짹짹거리며 자부심을 북돋고들 있다."



ⓒ pixabay


  1년에 한 번, 4월 어느 날에 발리 섬 사람들은 느예피 축일을 보낸다. 춘분에서 가까운 합삭 때이자 발리의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전국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날이다. 이날은 힌두교 명절로 자동차를 이용하건 제발로 걷건 돌아다녀선 안 되고(구급차량만 제외하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더라도 아주 작은 소리로 틀어야 한다. 동네 관리들은 사람들이 물가에 가지 못하게 한다. 일, 사교 활동, 성행위도 중단되고 섬 전체가 함께 침묵에 들어간다. 분주한 한 해 가운데 하루 동안만은 성찰하며 보내는 것이다. 이날은 새벽에 들려오는 소리도 다르고 냄새조차 다르다. 더 미묘한 냄새들을 덮어버리는 자동차와 트럭 배기가스가 사라지면 공기가 자연스레 향긋해지고 덩굴을 덮어쓴 숲의 푸른 냄새가 달콤하게 풍긴다.


  느예피 동안에는 야생화 냄새에 둘러싸인 채로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자연의 균형을 바라보고 사랑, 공감, 다정, 인내에 대해 생각한다. 개들은 짖고 매미는 요란하게 울어대지만 거리는 이 소란한 섬에서 보기 드문 적막을 숨 쉰다. 그림처럼 액자에 든 침묵이다. 먼 우주의 정적도 어두운 방 안의 적막도 아니라 이루어내고 찾아낸 것이기 때문에 더 값지고 풍요한 고요함이다. 덧없음을 느낄 때, 모든 것이 순간순간 나타나고 사라지고 변화한다는 충격을 받을 때는 침묵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침묵을 겪고, 침묵을 만들어내고, 침묵이 된다.



ⓒ pixabay


  고요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낡은 픽업트럭 철 지붕에 빗방울이 떨어진 뒤의 잠잠함. 고요라는 말 바로 앞에 오는 고요. 바로 그 뒤에 오는 고요. 풀장 물을 가르고 들어와 바닥에 기린 얼룩무늬를 만드는 빛의 고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을 부리지 않을 때 존재하는 적막. 자던 사람이 떠났을 때 침낭이라는 고치 안의 정적. 먼지로 흩어진 사람의 DNA의 침묵. 전자현미경 렌즈로 들여다 본 뉴런의 고요. 전화통화가 끝났을 때 귀 안의 고적. 사랑하는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한 적요. 가지 않은 길의 말없음. 망원경으로 얼픽 본 은둔하는 하늘의 적막. 기도를 드릴 때 모아 주니 두 손 사이의 고요. 소금쟁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조용함. 노른자처럼 노란 해가 새벽에 지평선 위로 떠오를 때의 정적. 가지지 못했던 아기 울음소리의 적막. 깊고 무거운 바다에서 수영할 때의 고요. 감은 눈꺼풀 위에 얹히는 눈송이의 고요. "그 생각을 적어줄래?"라고 말한 뒤에 허공에 감도는 적막.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날 위해서 적어줄래?"였을 때. 추운 아침 입김에 서리는 정적. 태어나기 전 당신 이름의 침묵. 거울의 고요. 의심(doubt)이라는 단어에서 b라는 글자가 지닌 침묵. 휴화산의 침잠. 멈춰버린 심장의 적막.


  죽음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가방을 넣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침묵이다. 걸을 때 팔꿈치 아래가 그 공간이다. 창문을 통해, 조용히 움찔거리고 잎사귀를 떨며 무언극을 펼치는 사시나무가 보인다.(유리가 소리를 막는다.) 내 죽음도 이렇게 동이 틀 것이다. 먼저 사시나무가 가물거리고, 다음에 시야가 흑백으로 퇴색하고, 바람 속에서 잎들이 점점 빨리, 하지만 고요하게 소용돌이치고, 나는 과거가 될 것이다.




잘 보낸 시간 (1)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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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일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말이 여럿 있다. 어떤 사람은 덧없는 것을 찬미하며 아와레(哀)를 느낀다. 썩어가는 나무를 뒤덮은 반짝이는 녹색 이끼에서, 기름진 땅에서 솟는 버섯이나 독버섯에서, 금빛과 붉은빛 이끼 뗏장에서, 부패에서 느끼는 무상한 아름다움이다. 새가 날아간 뒤에는 뒤에 남아 있는 소리 없는 잔향인 요인(余韻)을 느낄 수 있다. 시인 월러스 스티븐스가 「검정지빠귀를 보는 열세 가지 방법」이라는 시에서 "지저귀는 검정지빠귀 / 혹은 바로 그 뒤." 둘 다를 찬미했는데,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혹은 유겐(幽玄)이라고 하는 절절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13세기 작가 가모노 조메이가 「호조키(方丈記: 오두막의 기록)」(1212)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드넓은 무색의 고적한 하늘 아래 가을 저녁 같다. 어째서인지, 무슨 이유라도 있는 듯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혹은, "안개를 통해 가을 산을 바라보면, 흐릿하게 보이는 풍경인데도 엄청난 깊이가 있다. 안개에 덮여 가을 잎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끌려든다. 상상 속에서 펼쳐진 끝없는 풍경은 눈으로 또렷이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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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 에너지가 우리 낮을 밝히고 초식동물의 연료가 되어주고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된다. 우리는 이런 동식물에 축적된 햇빛을 먹고 태워서 일하고 요리하고 사랑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사냥감을 쫓을 때 에너지로 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엮인 불의 타래를 통해 지구상 다른 생명체들 전부와 연결된 셈이다. 녹도 불 가운데 하나이고. 우주에는 우리 것처럼 녹슨 행성들이 있을 터, 거기에도 생명이 풍성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곳 생명체는 얼마나 잘,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을까?


  이런 질문이라면 충분히 공안(公案)으로 쓰일 법하다. 공안이란 생각을 응축해놓은 것으로 잘 풀리지 않는 정신적 매듭이다. 불교 어떤 종파에서는 수행자들에게 문구와 상황을 주고 명상을 하게 한다.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이성의 덫에서 풀려나게 하는 도구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1. 한 사람이 100자 높이 장대 위에 앉아 있다. 어떻게 내려올까?

2. 바퀴살이 쉰 개 이는 바퀴를 두 개 만든다. 바퀴 중심을 잘라냈다고 해보자. 그래도 그것들이 바퀴일까?

3. 바람 부는 날, 승려 두 사람이 파닥이는 깃발을 보고 말씨름을 한다. 첫 번째 승려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지 바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라고 하고 두 번째 승려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지 깃발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가 옳은가?

4.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한 손의 소리는 무엇인가?

5. 구부러진 것 안에 곧은 것은 무엇인가?

6. 찻주전자에서 5층탑을 꺼내라.



  공안은 무궁무진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살아 있는 수련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해석이 아니라 깨달음이 목표다. 옛말에 따르면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을 혼동하기게 쉽기" 때문이다. 선(禪)을 가르치는 노먼 피셔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수련은 문구를 지니고 살고 명상하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아주 크고 낯설어져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수수께끼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둠 속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면서 공안을 하나 잡고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오늘 아침에는 무(無)에 대해 약간 생각했다. 공안이라는 게 가치 있는 까닭은 잠깐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무는 대략 "없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불교 수행에 종종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런 오래된 공안도 있다. "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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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대경기장 아래 앉아 새벽을 기다리고 있자니 무는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이 다른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을 흡수하여 가득 차는 거라는 생각, 하지만 그 입자가 너무 작아 "모든" "것" "그물" 같은 단어의 그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 그것도 다른 생명체나 은하들과 마찬가지로 거슬리도록 비합리적인 '무'의 순간적인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 아주 멀리 있는 별들을 엮듯이 우리 모두를 엮는 가변적이고 궁극적으로 광적이고 말이 없고 아낌없는 힘이라는 것이라는 생각 등이 떠오른다. "힘"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인식하는 우주의 파편을 전달하기 위해 그런 것에 기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은 어떤 힘도, 우리도, 우주도, 심지어 무·중간자도 없고 분자들만 있을 뿐인데, 이 에너지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로 고여 있지만 결코 다시는 이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전에 이런 깨달음을 얻은 선(禪) 스승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절의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종도, 나도 없고, 소리만 있었다." 나 자신과 종, 소리와 우주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때로 나는 수영을 할 때 물살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물의 역사와 내 역사가 한데 녹아들고 내 분자들이 부서져 흩어졌다가 물고기 떼처럼 이따금 되돌아와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형성하지만 사실은 일시적으로 같이 움직이는 세포의 주머니일 뿐이라는 느낌. 햇살이 프리즘 같은 물에 부딪히면 웅덩이의 벽과 바닥이 오직 생각만을 담고 있는 눈부신 '우리'가 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원자의 수준에서 우주와 교감하는 희열에 떨며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부글부글 끓어 나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아직도 일상의 나날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상태로 보낸다. 덩치 큰 '나'가 지저분하고 이기적인 손님처럼 머릿속에 대자로 뻗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깨달음이라는 게 계속 유지될 수가 있을까? 캘리포니아 우드에이커에 있는 스피릿 록 센터 설립자이자 지도자인 잭 콘필드는 깨달음은 지속되지 않으니 계속 숙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숙제를 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은 일도 해야 하고, 늘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수도원에서 살지 않는 한 고요하고 평화롭고 기분 좋은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신경을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불안감이 밀려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들썩이는 세상에서 동이 트는 짧은 시간, 존재의 덧없는 외투가 그저 몸에 꼭 맞는 순간이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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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삶이 최고의 공안인 셈이다. 그 단어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말이다. 물, 무기물, 열이 분자의 차가운 용광로 안에서 마늘어낸 끝없이 변화하는 공안,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 이로부터 의미에 물들고 목적에 좌우되는 생명이 자라났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언제나 녹, 오래되고 알 수 없고 상상도 하기 어려우나 모든 생명을 창조한 녹, 우리를 하씬 하나씩 세세히 지워나가는 녹이었다.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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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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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은 동이 트기 전에 이미 시작해 하늘을 통해 뻗어가 별들의 천장까지 미치는 것 같다. 물론 눈에 보이는 별들 말이다. 우주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무수히 많다. 다른 행성의 생명체도 그렇고, 우주에서 사라진 물질들도. 계산에 따르면 별, 행성, 은하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은 실제 존재하는 물질의 4퍼센트밖에 안된다. 나머지, '암흑물질' 혹은 더 이상하게는 '암흑 에너지'라 불리는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마당이나 길 위도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게로 가득 차 있다.


  감각의 문턱에서 자아가 세계를 맞닥뜨린다. 그렇지만 대체로 우리는 수박 겉핥기의 삶을 산다. 그러지 않으면 감각의 산사태에 짓눌리고 말 것이다. 아침에 라디오를 켜서 채널을 맞추다 보면 '잡음' 혹은 '혼선'에 의한 소리를 듣게 되는데, 거기에 끼어 다른 대륙에 떨어지는 뇌성벽력이나 사라져가는 은하의 최후의 몸부림이 들려온다는 것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면 마음이 잠시 멀리 떨어진 대륙이나 은하에 다녀오면서 마음의 틈이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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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새벽 뒤에 분홍색 가장자리를 두른 새벽이 온다. 새벽빛은 정오의 작열하는 빛이나 해질녘 어스름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명징함을 준다. 녹슨 철제 의자에 앉아 나는 녹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녹음 금속을 꼼꼼하게 분해해서 모양 없는 동 조각, 갈색 구멍 송송 샌드위치, 붉은 알갱이로 된 성상, 드러누운 조상, 너덜너덜한 구멍, 시간에 바치는 부슬부슬한 주황색과 검은색 기념비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녹을 하찮게 여기지만 실상 녹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후원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선명한 빛 속에서 녹이 자기 과거를 이야기한다.


  생명체의 발원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박테리아 같은 원시세포는 우주 어디에나 생길 수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해를 받는 파도에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바다 밑바닥 해구(海溝)에서도 초고온성 생물이 번성한다. 수술 도구를 소독할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물에서도 잘 사는 단단한 박테리아도 철을 먹는다. 바다 밑 깊은 도랑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기운을 받으며 펄펄 끓는 물에서 재생산을 하고 광물질이 많은 섭씨 130도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심해에 나타나는 이런 열을 좋아하는 미생물 가운데 하나인 지오박터 메탈리리듀슨스는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단지 바위와 물만 있으면 되고, 나머지는 저절로 일어난다. 지구의 뜨거운 핵에서 나온 황화철(녹)이 차가운 물을 만날 때 그 충격으로 벌집무늬의 기둥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데 거기에서 최초의 사랑 있는 세포가 자라났을 것이다. 젊은 지구에 풍부했던 산소와 이산화탄소에 열과 고압을 가하고 녹을 촉매로 투입하면 자연스럽게 신진대사가 일어난다. 최초의 미생물들이 이 요람을 떠나 육지를 정복하러 갔을 것이다. 이런 원시적 철이 오늘날 우리 세포 안에도 일부 있다. 녹은 사실 아주 느리게 타는 불이다. 불처럼 녹도 에너지를 먹으며 에너지를 내놓는다. 강철을 쪼개놓으면서 크기도 자라난다. 철은 물 같은 천해액에 노출되었을 때 특히 빨리 부식하는데, 인간은 전해질로 가득 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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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이여, 너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조용히 말한다. 재잘대고 지저귀고 깍깍대며 하늘에서 숨바꼭질을 시작한 새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소리를 낮춘다. 내 녹슬고 낡은 의자에는 일본 사람들이 와비사비(侘寂)라고 부르는 자발적 가난이 서려 있다.


  와비란 원래 자연에서 홀로 인간 세상을 등지고 비참하게 살면서 우울하고 황량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비는 '쓸쓸함', '메마름', '시듦'을 뜻하는, 세월의 녹청(綠靑)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담은 말이다. 그런데 와비사비라는 문구가 16세기에 다른 뜻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를 유폐하고 숲에서 은둔하는 은자의 삶이 번잡한 사회에서 얻을 수 없는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처럼 느껴지자 이 단어가 자연과의 친밀함, 일상의 소박함에서 느끼는 기쁨을 가리키게 되었다. 은자의 눈은 아주 조그마하고, 거칠고, 갈라지고, 불완전한 것, 흥미로운 흠이 있는 사물들을 향했다. 특히 녹슬고, 낡고, 닳고, 세월의 흐름을 드러내는 것들을. 절묘하게도 일본어에서 녹을 뜻하는 錆이라는 글자도 발음은 '사비'이다. 그래서 다시 녹에서 비롯한 생명의 기원과 'rustic(시골스러운)'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녹(rust)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와비사비는 장식적 예술에 반기를 들며 소박한 형태의 순수성을 높이 쳤지만, 유럽 모더니즘의 이상인 매끈한 유선형 미래주의적 작품들과는 다르게 유기적이고 불완전하고 소박한 물건이 퇴색한 것, 대량생산된 상품이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손으로 만든 물건을 아끼며 사용해서 닳은 상태를 더욱 가치 있게 여겼다. 와비사비는 직관적인 현재 이곳의 관찰에 기댔고 앞날을 내다보거나 진보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와비는 목가적 미학에 따라, 자연은 다루기 힘들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기꺼이 자연에 지배당하고자 했다. 인간이 창안해낸 기술이 아무리 미끈하고 편리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자연에 복종했다. 따라서 와비사비는 부식, 완전히 분해 될 때까지 계속되는 부패, 미지근한 액체 형태로 조용히 지구의 울림을 전달하는 불분명성이라는 개념을 끌어안는다. 시도 고즈넉한 우울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소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와비사비가 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는 사람도 사물도 무너져 내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일과를 마치고 (2)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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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은 자연에서 놀았다. 들에는 실내가 없고, 실내(움막, 동굴)는 비좁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까닭은 자연과 자기 자신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 다른 사람인 첫하면서 놀았다. 양 가죽 옷을 입고, 절반은 양, 아니 매 하는 울음 소리로 가득한 네발짐승 자체가 되었다. 무생물인 척하는 놀이도 했을 것이다. 산이나 물, 달이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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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기억의 뒷방에는 여전히 나무 썰매가 미끄러지며 돌아다닌다. 봉제 코끼리, 혀끝에서 녹는 고드름의 맛, 자갈 위에서 텀벙거리는 물소리. 나는 여전히 자연에서, 우리의 유일한 궁극적 어머니이자 스승인 자연에서 논다. 예를 들어 큰눈이 내리고 나면 나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눈이 쌓인 상록수와 하나씩 차례로 악수를 나누길 좋아한다. 길게 늘어서서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의 행렬인 양. 나뭇가지를 쥐고 흔들면 높은 가지에 얹힌 눈들이 쏟아져 갑자기 부드러운 눈사태가 내 몸 위로 흘러내린다.


  1950년대, 급속도로 변화하던 미래주의 시대에 나는 어린이였고 새로 등장한 흑백 텔레비전, 다이얼식 전화기, 인스턴트 케이크 믹스 등의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컴퓨터나 아이팟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는 집안에서 놀았지만 늘 졸라대고 징징거렸다. 밖에 나가 놀아도 돼요?라고.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안전과 마케팅 따위의 이유로 요즘 아이들은 집 안에서 혼자 전자체품을 가지고 노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조그만 ATM 기계 장난감까지 판다. 오즈의 나라 어린 시절을 그냥 건너뛰어 썩지도 않고 무릎이 까질 일도 없는 놀잇감들의 경주 속에 휘말린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장난감들이 손·눈 협응력을 기른다고들 하지만, 순간적으로 집중하게 할지는 몰라도 중요한 순간에 차분하고 끈기 있게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중한 능력을 기르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결핍장애"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Last Child in the Woods』의 저자 리처드 루브(Richard Lonv)에게 샌디에이고에 사는 4학년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내에서 노는 게 더 좋아요. 전기코드 꽂는 데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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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밖에서 놀지 않으면,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해를 보지 못하고 나무 주위에서 다람쥐처럼 놀지 못하고 장님거미를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개구리알을 손가락으로 찔러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연은 늘 사방에서 우리에게 닥친다. 일단 우리 발아래에서, 니켈을 안에 품은 지구가 에너지를 밀어낸다. 자연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진정시키고, 우리를 가꾸고, 살 곳을 준다. 우리가 의식하든 않든. 아이들이 자연에서 너무 오래 분리되어 있으면 나침반이 방향을 잃고 아이들은 야성을 잃는다. 움직임으로 가득하고 단 하나의 교훈은 '변화'인 녹색 세상에서 여러 신비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한 동물이라는 자각을.


  바야는 힌두고 바람의 신이다. 변화의 치유하는 숨결을 상징한다. 새크라멘토에 사는 정신의학자 클로드 아넷(Claude Arnett) 박사는 바야 정신건강 병원을 운영하며 심각한 정신적 문제나 중독에 시달리는 어린이, 청소년을 전문으로 다룬다. 이곳에서는 자연이 치료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넷 박사는 자연결핍장애가 오늘날 아이들의 신경계와 스트레스 처리 능력에 커다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교감신경계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 반응과 연관 있는 신경계)는 세부 사항에 주목해 위험 요소를 분석하고 빠른 속도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과제를 수행한다. 반면 부교감신경계는 더 넓은 시각을 갖고, 감각이 열려 있고, 전체 세계를 느긋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먼저 풍경을 살피고, 이어 무언가 특정한 것에 주목한다. 움직이는 딱정벌레 따위에. 자연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두 가지 기술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번갈아가며 전체를 보았다가 목표물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 그리고 여럿, 비둘기와 선회하는 비둘기떼. 텔레비전과 비디오게임은 목표물에 주의 집중하는 것만 가르친다. 아넷은 문제를 겪는 아이들이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신세계가 밝아지고 유연성이 발달해서 더 융통성 있고 포용력 있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도, 여러 가지 이미지를 주고 순위를 매기라고 하면 자연 사진을 가장 앞에 놓는다. 으뜸은 아프리카 초원 풍경이다. 당연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진화했으니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골 안에는 햇살 가득한 세상의 기억이 있는지 모른다. 수술 환자를 10년 동안 연구한 자료가 있는데, 숲이 보이는 방에서 회복한 환자가 빌딩숲만 본 환자에 비해 스트레스 수치가 더 낮았고 퇴원도 빨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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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잠깐 왔다 사그라지는 늙은 손님을 우리는 별똥별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별똥별에 대고 오늘처럼 눈부시고 행성들로 가득찬 새벽이 많이 찾아오기를 빈다. 켈트족 축복 전통을 따라 또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도시에 더 많은 나무와 창문이 생겨서 여명과 황혼, 계절을 더 잘 느낄 수 있기를. 자연에서 노는 것이 시간낭비라 생각되지 않기를. 일부 스칸디나비아 국가처럼 우리 의료보험에서 공원이나 자연으로 놀러 가는 비용도 감당해주기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우주의 아주 작은 물질로부터 비롯된 보잘것없는 기원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생명체로 진화했는지에 대해 감탄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를. 많은 사람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품고 돌아올 기회를 누릴 수 있기를. 그리고 한번이라도 얼빠진 수탉들이 새벽 제 시간에 노래하기를.




일과를 마치고 (1)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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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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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새벽에 수탉들의 세레나데를 듣기도 한다. 다만 오늘은 너무 일찍, 갱도처럼 깜깜할 때 홰를 치기 시작했다. 몸 안의 시계가 고장 난 수탉이 한 마리 있다 하더라도 다른 수탉들과의 합의 체계에 밀려 무딜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농부들 말로는 반대란다. 수탉 한 마리가 농장 마당 전부를 망쳐놓을 수 있다. 다른 배심원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말발 서는 배심원처럼, 인공조명이 있는 농장에서 살아 하루의 리듬이 흐트러져 박자를 놓친 수탉 한 마리 때문에 농장에 있는 수탉 전부가 새로운 스케줄에 따라 첫울음을 울게 될 수 잇다. 그러니 한밤중에 요란한 소동을 일으키기는 아주 쉽다. 호수 상류 쪽, 요트 클럽과 자연보존센터, 보이스카웃 여름 캠프장 너머에서 농부 한 사람이 빨간 볏 때문에 수탉을 사육한다. 무릎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주사를 만드는 데 핵심 원료이기 때문이다. 수탉의 볏에는 히알루로난이라는 당분자가 풍부한데 이 성분으로 관절염에 걸린 사람의 관절에 놓는 신비스크나 하이알간 등의 윤활 주사제를 만든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골짜기가 일곱 개, 대학이 두 개, 작은 읍내가 있다. 이것도 좋지만 농부들이 많아서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열렬한 유기농들도 있다. 스틱 앤드 스톤 농장을 운영하는 내 친구 루시, 초, 그리고 한 살짜리 딸 그레타도 그렇다. 그레타의 가운데 이름은 중국어로 "달 둘레의 무지갯빛 광휘"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늘 토요일 아침 아직 어둑한 때에 농장 옆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벽이 푸성귀 사이로 스며드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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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호박, 단호박, 뿌리채소의 계절인데 이것들이 스틱 앤드 스톤의 이름난 생산물이다. 또 여러 종류의 비트도 기른다. 내가 어릴 적에는 비트 수프인 보르시치(우크라이나에서 먹는, 비트 뿌리로 만든 수프 ─옮긴이)를 자주 먹었다. 슬라브 지방 요리에는 비트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고 비트가 목감기나 감기 등에 약으로도 쓰였다. 비트 국물, 식초, 꿀을 섞어 입 안을 가시고 세이지와 비트 주스로 인후염을 가라앉히고 따뜻한 비트 즙을 귀 안에 한 방울 떨어뜨려 귀울음을 치료했고 머리가 아프면 비트 잎으로 이마에 찜질을 했다. 나의 증조부모님들도 폴란드 남부에 있는 작은 농장에서 비트를 재배하고 약으로 썼으리라. 그레타 나이 때에는 어떠셨을까? 증조부모님도 틀림없이 이 이상하게 생긴 채소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자갈길 위에 뽑아놓은 유기농 비트들이 배가 동그란 인형 같다. 스쿼시호박은 꼭지가 희한하게 구부러진 모습이 꼭 짐승 모양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치켜 뜬 눈 같기도 하고 곤혹스러워 고개를 외로 꼰 듯도 하다. 또 빨간 무가 고양이 같은 갈망을 담고 사람들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자연은, 적어도 이런 때에는 행복해 보인다. 사람들의 착각이지만, 돌고래 입매가 웃는 것처럼 보이듯이. 어릴 때는 얼굴 표정에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식물한테도 성격이 있구나 싶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기는 아까워도 어쨌든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라고 자각은 한다. 마음에도 지하가 있어서, 거기에 가둬놓은 비밀이 있다. 그게 밖으로 드러나면 비웃음을 당하거나 더한 경우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울타리에 기대놓은 삽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른 아침 햇빛이 삽날 등골을 하얗게 비추어 두드러지게 메시지를 보낸다. 누군가 여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고. 여기에서 동작을 멈추고 삽을 세워놓고 다른 일을 하러 갔거나 아니면 삽을 어디에 두었는지 깜박 잊어버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니면 여기에 표시 삼아 세워놓았을까? 땅 한 뙈기의 절반만 갈았다거나 하는 뜻으로? 삽은 일의 상징이다. 아름답게 균형이 잡힌 날과 손에 딱 맞는 기다란 나무 손잡이. 새벽에 해야 할 잡일로는 방사 닭들을 풀어주고 새로 낳은 알을 모으고 배수로를 뚫고 케일, 옥수수, 뿌리채소를 수확해 씻어서 식당, 식료품 가게, 시장 등에 내다 팔 준비를 하는 것 등이 있다. 무수히 많은 아침마다 초는 아기 그레타를 품에 안고 낡은 트랙터로 경작지를 간다. 달은 무지갯빛 광휘를 두르고 떠 잇다. 그레타가 자라면 아빠와 같이 덜컹거리는 트랙터를 타고 다닌 것을 농장일로 기억할까 아니면 놀이로 기억할까? 그레타의 놀이방은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뻗어 있고 그레타는 털북숭이 친구들과 같이 네 발로 사방을 기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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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이웃에 사는 조지와 루시아는 아이들이 밖에서 놀도록 내보낸다. 온 가족이 나와 앞마당에 있는 오래된 붉은단풍나무 가지에 매달려서 파랑새 집을 여남은 개씩이나 달거나 눈밭에서 신나게 미끄럼을 타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아이들이 플레이스테이션, 마이스페이스, 문자메시지의 세계 속에 사는 요즘 시대에 드문 일일 것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실내와 실외로 이루어진 마음의 풍경 안에서 논다. 그래서 때로 실내에서 놀면서 집밖을 상상하기도 한다. 우리는 타고나는 꿈꾸는 성향 때문에, 어쩌면 삶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놀면서 우리를 가다듬는 덕에 또 다른 괴물, 또 다른 고초를 이겨나갈 수 잇다. 우리는 배우고, 사랑하고, 자라고, 살아남기 위해, 재미있거나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놀아야 한다. 이는 다행히도 가장 엄밀하고 세세하게 따져보아도 재미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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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인문학> 겨울

: 결정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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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과 함께 꾸덕꾸덕한 추위가 찾아온다. 금속은 차마 만질 수가 없고, 숨이 기관지 깊숙한 곳을 할퀴고, 폐에 성에가 생기지 않게 공기를 데우려고 목둘레에 목도리를 두른다. 사람은 날씨에 따라 옷을 입고 필요하면 날씨를 피할 수 있으니 운이 좋다. 지평선 위 낮게 뜬 겨울 해가 장려한 얼음 무리(대기 중에 떠 있는 얼음 입자들이 빛을 반사 또는 굴절하여 생기는 빛의 고리. 이때 해 양쪽에 빛의 덩어리가 생겨 무지개처럼 보이는 것을 해가 여러 개로 보인다는 뜻에서 무리해라고 하고 둥근 모양이기 때문에 환일(幻日)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sun dog이라고 한다.─옮긴이)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동공처럼 박혔다. 양옆은 무리해가 충실하게 받치고 있다. 이런 무지개 웅덩이를 왜 "해의 개(sun dog)"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를 따라다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700년대에 누군가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진다. 대기권 위쪽에서 조그만 결정들이 얇은 육각형판이나 육면체를 만드는데 그게 지구로 떨어지면서 얼음 프리즘처럼 빛을 굴절하고 반사시켜 해 옆 구름 사이에 무지갯빛 덩어리가 생긴다. 오늘 아침에는 해무리 위쪽에 멋진 호가 빛나고 아래쪽에 눈부신 해기둥까지 있다. 하늘에서 어딘지 모를 곳에서 떨어진 조그만 얼음 결정들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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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나갔다가 낙엽 모둠 위에 놓인 작은 가지 위에 병 닦는 솔 모양의 얼음 결정을 보았다. 하지만 땅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았고 몇몇 나뭇가지들만 이런 고운 프릴 같은 얼음 장식을 달고 있다. 너무나 작고 섬세해 머릿속에서 정반대의 것이 떠오른다. 지구에서 발견된 가장 큰 수정, 멕시코의 은과 납 광산에 묻혀 있는 수정이 생각난다. 땅 및 수백 미터 깊이에서 광부들이 거대하고 완벽한 셀레나이트 수정으로 가득한 굴 두 개를 발견했다. 대부분은 폭 90센티미터 길이 15미터 정도였다. 셀레나이트라는 이름은 달의 여신 셀레네에게서 따왔다. 거대한 수정들은 깨진 거울에 반사되는 빛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누가 훔쳐가거나 파괴할까 봐 광산회사에서는 수정굴의 위치를 비밀로 하고 있다. 사실 이 굴 안의 기온은 섭씨 65도에 습도 100퍼센트로 치명적이라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다. 감춰진 달 여신의 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우리 발아래 또 어떤 신비가 잠자고 있을까?


  눈이든 셀레나이트든 결정체들은 세포처럼 자라난다. 작은 덩어리로 시작해서 한 층 한 층 더하고 복제되고 모여든다. 떨어진 열매 주위에 새들이 모여들듯이,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다가 점점 촘촘해져서 큰 떼거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조그맣고 연약한 눈 결정이 공기 중에서 물 분자를 끌어들여 결정을 더 만들어낸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자라나는 결정이 텐트들이나 산맥처럼 보인다. 결정은 여러 가지 모습일 수 있다. 얼음, 석영, 인슐린, 수선화 수액(독한 결정이 들어 있어 먹으면 안 된다.), 운석, 다이아몬드, 석고, 형석, 가넷(기록상 가장 큰 것이 1200킬로그램이나 되었다고 한다.), 녹인 쇠(식으면서 결정을 이룬다.) 등. 물루아이트라는 광물은 1986년 서오스트레일리아 물루다운스에서 발견된 희귀한 청록색 결정인데 박쥐 배설물이 오래된 황화구리와 반응을 일으켜 형성된다! 전자공학은 반도체 재료인 단결정실리콘과 갈륨비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시간은 수정 진동자로 측정하고, 음식은 소금과 설탕 결정으로 맛을 낸다. 일본 정원 연못에서 키우는 금빛 잉어는 물 표면 근처에서 먹이를 먹을 때는 거울 같은 결정을 반짝여 위장한다. 아이섀도나 샴푸에 들어 있는 윤이 나는 물질은 결정화되면 진줏빛으로 반짝이는, 아미노산의 일종인 구아닌으로 만든다.


  생존 기간이 짧은 어떤 박테리아는 몸에 진북과 진남을 가리키는 자성을 띤 철 결정을 지니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자성에 이끌려 땅속 깊이 들어가게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명체라고 하는 바이러스도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특히 눈 오는 계절, 결정들의 환상곡이 울려 퍼질 때 사람 몸 안에서 번성한다. 전에는 겨울에 독감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까닭이 사람들이 실내에 있으면서 같은 공기로 숨을 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울이 독감 천국인 까닭은 바이러스가 차갑고 건조한 공기 중에서는 열기구처럼 작은 물방울에 안정적으로 매달려 멀리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공기가 독감 바이러스를 태우고 우리 폐 속으로 들어오면 바이러스가 얼른 착륙한다. 여름에는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축 처져서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겨울에 따뜻한 방안에서보다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된다. 게다가 비행기 덕분에 사람이 부화장 역할을 하며 비수기에도 독감을 기후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 꿀벌도 몸속에 자성이 있는 결정이 있어 그걸로 길을 찾는다. 젖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들판에서 풀을 뜯을 때 자북을 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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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처럼 바이킹도 결정을 이용해 길을 찾았다. 하지만 좀 다른 성질을 이용했다. 바이킹 전설에 따르면 구름 낀 날이나 겨울 어스름 때에 항해사가 '태양석'을 높이 들어 돌려가며 해의 위치를 찾았다. 이 신비로운 물건이 전해지지 않아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몇몇 후보군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해안에 흔한 결정인 근청석이나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빙주석(무색 투명한 방해석)이 유력하다. 바이킹들은 해 쪽을 향하면 파란색에서 밝은 노란색으로 변하는 결정을 해 나침반으로 사용하며 하늘의 패턴을 해석하는 법을 익혀 안개나 구름 속에서도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아이슬란드의 영웅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날씨가 탁하고 비바람이 불었다. (…) 왕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 그러자 왕이 태양석을 들어 올렸고 돌을 통해 해가 빛나는 곳이 어딘지 볼 수 있었다." 태양석을 현대화한 도구가 군대에서 쓰는 스카이 컴퍼스다. 인공적으로 만든 편광 필터를 통해 방위를 찾는 장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정 가루를 약으로 썼고, 수정 그릇에서 나는 소리로 육체와 정신 세계의 조화를 북돋으려 했다. 몇 년 전에 갔던 온천에서 젖빛의 불투명한 수정 그릇을 글라스 하모니카(크고 작은 순서로 늘어놓은 유리 사발을 묶어 만든 악기로 벤저민 프랭클린이 고안했다.─옮긴이)처럼 연주하는 치유사를 만났다. 치유가사 고무망치로 그릇을 치자 멀리에 있는 시계탑 소리처럼 공명하는 울음소리가 났다. 고무망치로 그릇 가장자리를 훑을 때 다른 쪽 손을 올려놓는 위치에 따라 그릇에서 나는 소리도 달라졌다. 소리의 공명과 음조가 점점 커지면서 그 진동이 내 몸 안을 씻어 내렸다. 몇 분 뒤에는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예 내 몸 안에서 떨리면서 음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육체도 거의 다 물이라, 소리가 몸 안에서 잔물결을 일으키며 뼈와 연골을 두드렸고, 그것이 공명하면서 소리로 마사지를 했다.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1)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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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사방에 물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 pixabay


  우리 몸이 거의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논점에 물 타기를 하고, 물 쓰듯 돈을 쓰고,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고, 물 만난 고기가 되고, 얕은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나간 일은 물 건너 갔다고 한다. 열 달 동안 물속에 떠 있다가 산 채로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물에 빠져 죽을까 겁을 낸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거나, 감정에 휩쓸리거나, 슬픔에 잠기거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흘러가는 강물에 걱정거리를 흘러보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웃음이 잔물결처럼 퍼져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즐거움이 흘러넘친다고도 한다.


  우리 지구에서는 살아 있는 동식물이 제 몸 안에서 양분과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물이 필요하다. 물은 아주 탁월한 매개체다. 침전물, 정보, 배를 나르기에 적당한 매체로 신체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동맥이 되어준다. 새로운 모습이 되고 재정비하고 전환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하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는 항구에 여럿 있는 조그만 석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 우리 몸 안의 조그만 바다를 거기에 넣으면 온몸이 감싸이는 안온한 느낌을 받는다. 잉태된 상태였을 때처럼 다시 둥실 뜬 느낌이다. 내내 물 밖에서 살아왔지만 몸은 자궁 안에서 떠 있던 느낌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래서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리라.


  삶은 낙관적이고 적응력 있고, 손에 닿는 것을 활용한다. 그래서 아침에 얼굴에 뿌리는 물에서부터 양분을 공급하는 알곡 세포 안에 있는 물까지 여러 형태로 우리는 날마다 물을 맞는다. 식물에 물을 주고, 집과 몸에도 물을 공급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대부분은 물이다. 그러니 물은 우리를 지구에서 펼쳐지는 삶의 모든 면과 연결 짓는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같은 수원을 나누고, 적과 동지도 오아시를 함께 이용한다. 물이 없으면 문화가 사그라지고 문명이 멸망한다. 우주 다른 곳에도 생명이 있을까? 물을 찾아보라. 물은 상관없는 물질도 섞이고 얽히게 하고 전기를 띠게 한다. 물은 다른 것을 녹이기 때문에 오염되기도 쉽다. 물은 쉽게 넘어오고 쉽게 지배당한다. 그래서 지구의 물을 보호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모한 행동이 하류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아 늘 근시안적인 행동에 비싼 값을 치러야한다. 분명 그럴 때가 오는데, 다만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삶의 거미줄은 이런 연약한 실에 얹혀 떨린다. 귀를 기울여보라. 먼 곳에서 재앙이, 여름철 폭우를 예고하는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지?



ⓒ pixabay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인 여자는 순수한 물 30킬로그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내가 온통 물이라면? 물이라면 나는 쏟아지고 스며들고 어루만지고 갉아먹고 거울이나 렌즈 노릇도 할 것이다. 길이 될 수 있고 장애물도 될 수 있고 세례에도 쓰인다.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도 없다. 그렇지만 흙을 두들기고, 굵은 빗방울이 되어 장작받침쇠처럼 묵직하게 떨어지고, 미세한 흙과 바위 조각을 날려버리고, 산을 깎고, 빙하 골짜기를 새기고 협곡에 줄무늬를 낼 것이다. 빛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이따금 너무 추워 눈이 되지 못하고 빙정(氷晶)이 되어 빙빙 돌며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구름 속에서 떨어지며 결정으로 변할 것이다. 나는 호수나 바다에 있을 때는 결정을 이루면 물 위로 떠오른다. 물의 본질은 변화이기 때문에 땅과 몸 안에서 여행하면서 뭐든 녹여 체액과 혈청, 광물, 피, 생각을, 때로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조그만 화학물질들을 실어 나를 것이다. 나는 주위 세계를 쏙쏙 빨아들이고 새로운 정체성을 흡수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적어도 한동안은 거들먹거리며 그늘에서 나와 무대를 차지하고, 눈에 보이고 원숙하고 진짜 개성을 지닌 존재가 되리라.


  내 초상화를 보면 동물처럼 보인다. 수소 원자 두 개가 내 귀, 통통한 산소가 내 얼굴이다. 나는 조그맣고 비쩍 마르고 흔하디 흔한 수소 원자와 통통하고 불이 잘 붙는 산소에 묶여 산다. 수소가 산소에게 다다갈 때 자기적 이끌림이 너무 강해 서로 떼어내기가 힘들다. 덕분에 나는 다재다능하고 유연하고 역동적이고 결속이 계속 깨지고 다시 만들어져 웅덩이였다가 대양으로 이어진다. 얇은 막처럼 표면에 떠오르는 대신 달라붙고 이어지고 뭉치고 모여서, 붙잡아 나르는 저인망 쓰레그물을 만들 것이다.



ⓒ pixabay


  물, 사방에 물. 나는 고집스럽게 쉴 새 없이, 물살 속에 흐르고, 찻잔 속에 고이고, 차가운 바위에 달라붙고, 이슬 프리즘을 흔들고, 여름철 벌집을 식힐 냉각수를 벌들에게 제공하고, 아기의 통통한 손가락 안을 채울 것이다. 도시의 외곽선을 그리고 제국 간의 운송을 책임지고 국경 분쟁을 일으킬 것이다. 또렷하게 반사해서 사람들이 그 이미지로 자기들 정신세계를 묘사하게 할 것이다. 비를 들이켜는 미루나무와 버드나무를 축이고, 풀 줄기를 단단하게 하고, 땅 아래 지하수로 고여 생명을 먹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누빌 것이다. 잘 익은 살구를 보면 침이 되어 솟고 용선(龍船) 경주가 펼쳐질 때는 땀으로 흐르고 자궁 안에서는 생명을 품을 것이다. 자갈 위로 흐를 때는 시구를 중얼거릴 것이다. 고래의 노랫소리를 반향하고 물고기 소리에 떨리고 어디에서든 생명의 원천으로 솟구쳐 오르고 모든 목마름의 시작과 끝을 예고하리라.



결정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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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사방에 물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날이 새기 전 사파이어빛 시간, 호수 위의 유빙이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쪼개놓는다. 다른 곳에서는 폭포수가 쏟아지며 고고한 물의 언어로 거품을 일으킨다. 얼음 목도리가 빙하가 깎아 만든 협곡을 친친 감는다. 겨울이면 공기처럼 가벼운 물방울이 장벽을 넘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웅장한 도시를 발아래 무릎 꿇린다. 이 파란 겨울 아침, 얼음이 카유가 호수 어귀에 폭포 모양을 이루고 흘러드는 물줄기에는 하얀 상아 장식이 생기지만 호수 전체는 절대 얼어붙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 pixabay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의 독특한 성질이 아니라면 우리는 존재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을 운운하는 여러 주장 가운데서도 가장 앞세울 것은 바로 이 말이다. 우리는 얼음이 물에 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 다른 액체는 얼면 수축해서 가라앉지만 오직 물만은 팽창한다. 이 과정에서 아주 작은 삼각형 피라미드 같은 것이 생겨나 연결되면서 구멍 많고 넉넉한 구조를 만든다. 얼음이 물에 뜨지 않으면 아주 오래 전에 바다가 얼어붙었을 것이고 우물, 샘, 강도 마찬가지다. 물이 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한순간에는 손에서 비단처럼 미끄러져 흐르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지붕을 무너뜨리고 골짜기를 깎지 않는다면, 지구에는 아무 생명도 살 수 없을 것이다.



ⓒ pixabay


  생명이 바다에서 발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번성하기 위해 계속 물을 마셔야 한다. 탈수가 되면, 나도 전에 플로리다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뇌 안의 소금밭이 말라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빨리 혈관에 전해액을 투입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물통이다. 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물로 목욕을 하고 밭에 물을 대고 물 속을 헤쳐 나가고 부글부글 끓고 비를 맞곤 해서 물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미처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물은 액체일 수도, 기체일 수도, 결정일 수도 있다. 물이 유리처럼 보일 때가 많고 얇은 얼음은 유리처럼 깨지고 유리처럼 천천히 걸쭉하게 흐르기도 하지만, 유리처럼 규소로 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물이 유리를 만들어내긴 한다. 바닷가에 생긴 모래밭은 물이 만들어낸 일종의 유리다.


  어떤 물도 새것이라고 할 수 없다.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고 떨어지고 응축되며 한 방울 한 방울 모두 언제 어딘가에 쓰였다가 재활용된다. 오늘 먹은 샐러리 줄기 안에 들어 있는 물이 작년에 아마존에 비로 내렸을 수도 있고 3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인이 마셨던 물일 수도 있다. 우리는 물을 모으고 나르는 법을 알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어디에서나 그럴 수는 없다. 아마존에서 언젠가 나는 습도 100퍼센트의 축축한 장막으로 뒤덮였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 곳을 걸은 적이 있다.



ⓒ pixabay


  지구 절반을 덮은 구름 때문에 하늘이 콜라주처럼 보인다. 로르샤흐 검사에 쓰는 얼룩 같은 덩어리들이 무너져 비로 내린다. 그렇지만 비가 공기를 통과해 내리는 게 아니라 공기를 이룬다. 너무나 가벼워서 바람에 날리는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다. 수천 톤의 물, 수백만 개의 물방울들, 고요해 보이지만 불안정하게 밀고 밀리는 무리들이다. 이 구름들을 어떻게 분류할 수가 있을까? 1802년에야 처음으로 이를 시도했다. 프랑스 자연과학자 장바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가 구름을 흐릿한, 덩어리진, 얼룩, 빗자루 모양, 밀집한 구름 등으로 분류했다. 곧 영국 약학자 루크 하워드(Luke Howard)는 적운, 층운, 난운, 권운의 네 가지 무리를 제안했다. 여기에 고도만 더해서 지금도 이 분류를 쓴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하얗고 분홍색으로 물결치는 구름 떼를 고적운이라 부르는 식으로.


  부피로는 물론 공기 중의 물이 바다와 비교도 되지 않게 많지만 호수와 강, 샘, 우물, 60억 인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생명체에는 녹는 눈과 비가 물을 채운다. '사람이 걷는다.'고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사람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수준기(水準器)처럼 우리가 누우면 우리의 물도 평평해지겠지만 그래도 물은 계속 움직이고 미끄러지고 흐르고 새로워진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몸 안의 수로와 배편들 덕에 여행을 한다. 물을 마시고 먹고 배출하고 생각하는 몸의 조직은 습지이자 강어귀이고, 기관들은 섬이고, 혈류는 실개천과 여러 수원이 있는 긴 강이다. 움직이며 화학물질을 튀기고 여러 구멍을 통해 물을 배출하지만 우리 피, 피부, 땀, 눈물 안에는 늘 짠 바다가 있다. 생리주기는 조수를 닮았다. 관절에 기름칠을 하고 음식을 소화하고 우리 치아에 반짝이는 법랑질을 덮는 데도 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물이 이루어내는 생명을 반영해 보여준다.



사방에 물 (2)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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