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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새벽의 인문학, 겨울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잘 보낸 시간 (2)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잘 보낸 시간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 pixabay 80세가 넘어 시력이 약해졌을 때 모네는 자기 정원에 있는 가파른 아치 모양의 일본식 인도교를 한 차례 더 그렸다. 이번에는 짙은 가을 색으로 그렸다. 밤색, 붉은색, 금색, 주황색, 녹색 등으로 칠했고 파란 난간의 다리는 희미한 형체만 있을 뿐이다. 황토색과 흰색의 수직 방향 붓질이 화폭에서 반짝인다. 전에 그리던 안개가 형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둥글리고 여름날 강렬한 녹색과 화려한 꽃 색깔을 뒤덮는 아침의 인상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점점 탁해져가는 눈으로 바라본 추상이다.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하고 물감의 ..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잘 보낸 시간 (1)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잘 보낸 시간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이 짧은 새벽 동안에 정말 많은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렌즈 모양 구름이 떠서 높은 곳에 빠른 바람이 분다는 걸 알려준다. 지붕널은 비둘기 깃털처럼 차곡차곡 겹쳤다. 개가 부지런히 냄새를 맡으며 아침 신문 읽듯 냄새로 세상사를 파악한다. 나뭇가지와 창문턱에 앉은 새들은 바람을 마주 보고 있다. 그래야 깃털이 몸에 딱 달라붙어 바람에 날개가 들썩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장류 몇이 출근하러 길을 따라 걸어가며 사교성에서 우러나오는 몸짓을 하다. 이런 게 삶의 질감, 이 행성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 pixabay 저녁때면 나는 주로 그날 있었..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그곳에 없으며 그곳에 있는 침묵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 pixabay 우아하게 구부러진 팔 여러 개를 들고 사방으로 우주에 닿은 겨울나무가 동양의 신을 떠올리게 한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면 지지않고 시든 마지막 잎 몇 장이 음산하게 속삭인다. 세상은 우리가 하는 말만큼 수다스러운 외국어로 가득하다. 단단히 굳은 형체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숱한 구멍과 굴곡에서 조율된 소리를 낸다. 누구의, 무엇의 숨을 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액체라도 상관없다. 소리는 물을 통해서도 잘 전해지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침식과 침전을 통해 만들어진 카유가 호수는 늦여름에는 깊고 생명체로 가득하고 나름의 음..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2)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일과를 마치고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일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말이 여럿 있다. 어떤 사람은 덧없는 것을 찬미하며 아와레(哀)를 느낀다. 썩어가는 나무를 뒤덮은 반짝이는 녹색 이끼에서, 기름진 땅에서 솟는 버섯이나 독버섯에서, 금빛과 붉은빛 이끼 뗏장에서, 부패에서 느끼는 무상한 아름다움이다. 새가 날아간 뒤에는 뒤에 남아 있는 소리 없는 잔향인 요인(余韻)을 느낄 수 있다. 시인 월러스 스티븐스가 「검정지빠귀를 보는 열세 가지 방법」이라는 시에서 "지저귀는 검정지빠귀 / 혹은 바로 그 뒤." 둘 다를 찬미했는데,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혹은 유..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일과를 마치고 (1)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일과를 마치고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 pixabay 새벽은 동이 트기 전에 이미 시작해 하늘을 통해 뻗어가 별들의 천장까지 미치는 것 같다. 물론 눈에 보이는 별들 말이다. 우주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무수히 많다. 다른 행성의 생명체도 그렇고, 우주에서 사라진 물질들도. 계산에 따르면 별, 행성, 은하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은 실제 존재하는 물질의 4퍼센트밖에 안된다. 나머지, '암흑물질' 혹은 더 이상하게는 '암흑 에너지'라 불리는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마당이나 길 위도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게로 가득 차 있다. 감각의 문턱에서 자아가 세계를 맞닥뜨린다. 그렇지만 대체..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2)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은 자연에서 놀았다. 들에는 실내가 없고, 실내(움막, 동굴)는 비좁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까닭은 자연과 자기 자신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 다른 사람인 첫하면서 놀았다. 양 가죽 옷을 입고, 절반은 양, 아니 매 하는 울음 소리로 가득한 네발짐승 자체가 되었다. 무생물인 척하는 놀이도 했을 것이다. 산이나 물, 달이나 나무. ⓒ pixabay 내 기억의 뒷방에는 여전히 나무 썰매가 미끄러지며 돌아다닌다. 봉제 코끼리, 혀끝에서 녹는 고드름의 맛, ..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1)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못된 수탉 한 마리가 농장을 망친다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 pixabay 이따금 새벽에 수탉들의 세레나데를 듣기도 한다. 다만 오늘은 너무 일찍, 갱도처럼 깜깜할 때 홰를 치기 시작했다. 몸 안의 시계가 고장 난 수탉이 한 마리 있다 하더라도 다른 수탉들과의 합의 체계에 밀려 무딜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농부들 말로는 반대란다. 수탉 한 마리가 농장 마당 전부를 망쳐놓을 수 있다. 다른 배심원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말발 서는 배심원처럼, 인공조명이 있는 농장에서 살아 하루의 리듬이 흐트러져 박자를 놓친 수탉 한 마리 때문에 농장에 있는 수탉 전부가 새로운 스케줄에 따라 첫울음을 울..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결정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결정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 pixabay 새벽과 함께 꾸덕꾸덕한 추위가 찾아온다. 금속은 차마 만질 수가 없고, 숨이 기관지 깊숙한 곳을 할퀴고, 폐에 성에가 생기지 않게 공기를 데우려고 목둘레에 목도리를 두른다. 사람은 날씨에 따라 옷을 입고 필요하면 날씨를 피할 수 있으니 운이 좋다. 지평선 위 낮게 뜬 겨울 해가 장려한 얼음 무리(대기 중에 떠 있는 얼음 입자들이 빛을 반사 또는 굴절하여 생기는 빛의 고리. 이때 해 양쪽에 빛의 덩어리가 생겨 무지개처럼 보이는 것을 해가 여러 개로 보인다는 뜻에서 무리해라고 하고 둥근 모양이기 때문에 환일(幻日)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sun ..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사방에 물 (2)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사방에 물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 pixabay 우리 몸이 거의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논점에 물 타기를 하고, 물 쓰듯 돈을 쓰고,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고, 물 만난 고기가 되고, 얕은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나간 일은 물 건너 갔다고 한다. 열 달 동안 물속에 떠 있다가 산 채로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물에 빠져 죽을까 겁을 낸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거나, 감정에 휩쓸리거나, 슬픔에 잠기거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흘러가는 강물에 걱정거리를 흘러보내지 않는다.. 더보기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사방에 물 (1) ※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겨울: 사방에 물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옮긴이│홍한별 날이 새기 전 사파이어빛 시간, 호수 위의 유빙이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쪼개놓는다. 다른 곳에서는 폭포수가 쏟아지며 고고한 물의 언어로 거품을 일으킨다. 얼음 목도리가 빙하가 깎아 만든 협곡을 친친 감는다. 겨울이면 공기처럼 가벼운 물방울이 장벽을 넘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웅장한 도시를 발아래 무릎 꿇린다. 이 파란 겨울 아침, 얼음이 카유가 호수 어귀에 폭포 모양을 이루고 흘러드는 물줄기에는 하얀 상아 장식이 생기지만 호수 전체는 절대 얼어붙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 pixabay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의 독특한 성질이 아니라면 우리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