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4부 코끼리, 빛고을 광주로 이사 가다


    3장 또 다른 이주자, 코끼리 조련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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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동물원을 찾은 코끼리들이 어린이대공원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코끼리월드의 규모도 급격히 작아졌다. 여성 무용수들을 라오스로 돌아갔고 한국인 운영 인력도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해서 코끼리월드를 떠난 직원이 40명가량 되었다. 이제 김회장 외에 코끼리월드에 남은 인원은 코끼리 판매를 진행할 정이사 그리고 코끼리들을 돌볼 열 명의 조련사들뿐이었다. 정이사와 조련사들도 코끼리들과 함께 광주로 왔다. 정이사는 우치 동물원 근처의 아파트에, 조련사들은 우치 대공원 안에 마련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이 와중에도 조련사 인원은 줄지 않았다. 코끼리월드가 세워진 이후로 조련사는 언제나 열 명 정도를 유지해 왔다. 최소한 코끼리 한 마리당 한 명의 조련사가 따라붙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사이 조련사들의 구성에는 변화가 있었다.



날이 쌀쌀해지자 코끼리에게 부직포를 덮어 주는 조련사. 조련사들은 코끼리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당했다. ⓒ연합뉴스, <코끼리도 추워요> 2009.11.16


처음에 코끼리들과 함께 한국 땅을 밟은 조련사들은 모두 라오스 국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라오스 출신 노동자는 통 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라오스 정부가 우리나라에 노동자를 파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코끼리월드 소속의 조련사들과 무용수들은 우리나라에서 취업 비자를 받고 일하는 거의 유일한 라오스 노동자였다. 이들 외에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라오스 사람으로는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고위층 자녀인 유학생들이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주한 라오스 대사관에서는 코끼리월드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정이사는 라오스 대사가 코끼리월드에 무척 호의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대사가 직원들하고 명절 때 과일 한 박스 들고 우리 회사로 오고 그랬어요. 물론 우리도 갔다 줬지만. 그런 식으로 대사가 몇 번이나 직접 왔어요. 자기 나라 사람들 잘 좀 부탁한다고. 우리 직원들 면담도 하고. 왜 그랬냐면, 그 못사는 나라에서 한국에 거의 최초로 취업을 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잘돼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우리도 계속 라오스 사람을 쓰죠. 우린 딴 나라에서 조련사 데려와서 써도 됐거든요. 꼭 라오스 사람 써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정이사 말대로 코끼리월드는 외교 관계보다 수익 창출이 훨씬 더 중요했다. 시간이 지나 조련사 인원에 결원이 생기자 라오스뿐 아니라 태국에서도 새로운 조련사를 데려왔다.

“아무래도 태국 출신 조련사들이 좀 더 전문적이거든요. 그 나라는 코끼리 공연을 굉장히 많이 해요. 라오스 출신 조련사들은 전문성은 떨어져도 그 코끼리들이랑 어릴 때부터 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러니까 훤히 알아요. 얘는 어떻게 하면 말 잘 듣고 어떻게 하면 말 안 듣고. 그래서 라오스 출신이 반, 태국 출신이 반 이렇게 되게 한 겁니다.”

라오스 조련사들과 태국 조련사들 사이에서 국적으로 인한 반목은 거의 없었다. 라오스와 태국은 둘 다 코끼리의 나라를 자처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닮았다. 라오스 국민의 약 70퍼센트는 태국계로 분류된다. 라오스의 언어인 라오어는 태국어와 상당히 흡사한 데다, 태국 북부 지역에서도 쓰이기 때문에 태국어의 방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라오스 조련사든 태국 조련사든 이곳에서는 똑같이 이주 노동자라는 신분이었다.



2007년 벌어진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의 추모식. 이주 노동자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뉴시스, <여수외국인 보호소 화재참사 추모식 열려> (2007.2.25)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을 열악하기 짝이 없다. 월 평균 급여가 2011년을 기준으로 100만 원에도 채 못 미치는 99만 9000원.1) 이마저도 체불되기 일쑤다. 부당 해고, 산업 재해, 폭력 등 다양한 인권 침해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는 공장 옆에 딸린 컨테이너다. 2009년 국제 엠네스티는 우리나라의 이주 노동자 실태를 조사한 후 발표한 보고서에서 ‘일회용 노동자’라는 표현을 썼다. 이주 노동자들은 일회용 물품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되었다가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코끼리 조련사들이 받은 대우는 일반적인 이주 노동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조련사들은 한 달에 2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았고 1년에 한 달씩 휴가를 받아 고향에 다녀오기도 했다. 휴가 때 왕복 비행기 표는 코끼리월드에서 부담했다.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이 3D 업종에서 단순 업무에 투여되는 데 반해 코끼리 조련사들은 나름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끼리월드의 수익 기반인 코끼리들의 안녕과 코끼리 공연의 진행은 전적으로 조련사들에게 달려 있었다. 소프트웨어 회사의 핵심 인력은 프로그래머이고, 출판사의 핵심 인력은 편집자이며, 디자인 회사의 핵심 인력은 디자이너이듯이 코끼리월드의 핵심 인력은 코끼리 조련사인 셈이었다. 동물원에서 근무하는 수의사라 할지라도 코끼리에 대해서만큼은 이 조련사들의 지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핵심 인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대우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세상 이치다. 코끼리 조련사들 역시 어디까지나 이주 노동자치고는 나은 대우였을 뿐, 핵심 인력으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시각을 달리 해서 보면, 코끼리 조련사들은 회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단지 이주 노동자라는 이유로 그 역할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조련사들이 코끼리월드를 떠나는 경우는 자의로 그만두는 것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회사에 밉보여 해고당하는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김회장은 곧바로 해고 통보를 내렸다.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여서 물어보면 이미 자기 나라로 떠났다고 했다. 매정한 처사로 보이지만 정이사는 이렇게 항변한다.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하고 한 번쯤은 넘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절대 안 빌어요. 사과 한마디를 안 하더라고. 회장님이 나가 이러면 곧바로 짐 챙겨서 지네 나라로 돌아가 버려요. 갈 때 비행기 표도 우리가 대 줬습니다.”

해고 사유는 게으름을 피웠다는 것이 가장 많았다. 정이사는 조련사들의 숙련도나 전문성은 인정하면서도 노동 강도에 대해서는 상당히 박한 평가를 내린다.

“그 조련사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70년대, 80년대에 중동 같은 데로 돈 벌려고 나간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화 벌려고 얼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했다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달라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출세해야지 이런 생각 자체를 안 하더라고요. 내 생각엔, 천성이 그런 것 같아요. 이모작, 삼모작을 해서 먹을 게 널려 있으니까 우리나라처럼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정이사의 말은 인종 차별적인 고정 관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와 비슷한 증언은 동남아 전문가에게서도 나온다. 『동남아문화 산책』의 저자인 서강대학교 신윤환 교수는 동남아 사람들에게 게으름이란 여유의 표출이지 성격의 결함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자연 환경 때문에 예로부터 동남아에서는 부지런함이 곧 수선을 떠는 것과 같았고 부의 축척은 미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2)

그런데 동남아 사람들이 마냥 게으르기만 하다면 동남아 출신의 수많은 노동자가 우리나라에서 야근과 잔업을 감수하면서까지 돈을 벌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는 민족성이나 문화가 경제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100년 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은 게으르다, 독일 사람들은 도둑질을 잘한다는 평을 받았던 것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이 원래부터 근면해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제가 성장하자 일본 사람들이 근면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코끼리 조련사들의 하루 일과는 어땠는지 살펴보자. 아침 일찍 일어나 코끼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먹이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다섯 차례의 공연을 진행했고 공연장 옆에서는 하루 종일 코끼리 타기 체험을 진행했다. 저녁에는 다음 날 관람객들에게 코끼리 먹이로 팔 당근을 자르는 작업을 했다. 밤이면 교대로 한두 명씩 코끼리들 옆에서 불침번을 섰다. 반드시 영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김회장의 방침 때문에 수시로 교외로 나가 직접 생풀을 베어 트럭에 실어 왔다. 혹사는 결코 아니었지만 만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우치 동물원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더 이상 공연을 안 하게 되었으니 일 자체가 조금은 수월해졌을 것이다. 우치 동물원 뒷산에는 대나무의 일종으로 코끼리가 좋아하는 신우대가 널려 있어 먹이를 구하기도 한결 편해졌다. 관람객이 적으니 잘라야 하는 당근의 양도 적어졌다. 해가 지면 근처 저수지로 밤낚시를 나서곤 했다. 물에 직접 들어가 투망질로 블루길이나 베스를 잡았다. 밤낚시에서 잡힌 물고기는 바싹 튀겨져 다음 날 아침 밥상에 올랐다. 물고기뿐 아니라 매미나 잠자리도 곧잘 잡아서 반찬으로 먹었다. 광주가 명색이 광역시이긴 하지만 우치 동물원은 녹지로 둘러싸인 교외에 위치해 있어서 조련사들은 좀 더 고향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 해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본 코끼리 조련사들은 동물원에서 일하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했다. 어쩌면 코끼리월드는 우리나라의 70년대 산업 역군 수준의 노동 강도를 기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수성가한 김회장 본인이 바로 그 산업 역군 중 한 명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조련사들 중 한국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캄텐

전체 조련사들 중 라오스 출신과 태국 출신의 비율이 반반씩 유지되긴 했지만 라오스 출신 중에서도 끝까지 남은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조련사들의 대변인 격이었던 캄텐과 그의 형 캄폰이었다. 정이사도 캄텐, 캄폰 형제에 대해서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캄텐이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말을 가장 잘했기 때문이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열여덟의 나이였던 캄텐은 1년 만에 한국말을 제법 알아듣고 말도 곧잘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조련사들과 코끼리월드 경영진과 동물원 직원들을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캄텐이 다른 조련사들보다 월급을 더 받지는 않았다. 대신 방송사에서 코끼리 출연 섭외가 오면 대부분의 경우 캄텐이 출연했고 그때마다 출연료로 부수입을 챙겼다. 형인 캄폰은 라오스에서 대학까지 나왔지만 그저 말없이 웃는 얼굴로 일에만 몰두하곤 했다. 지금은 조련사로 일하고 있지만 형제는 다른 미래를 꿈꾸었다.

“돈 많이 벌어서 라오스 갈 거예요. 잘 결혼하고 큰 식당 차릴 거예요.”

이들 형제는 라오스에서도 형편이 비교적 나은 가정에서 자랐다. 가정에서 코끼리를 길렀다는 것이 그 증거다. 코끼리는 라오스의 농가에서 사육하는 대표적인 가축 중 하나다. 라오스에서 야생 코끼리는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여러 번의 전쟁을 거치며 거의 씨가 말랐고 지금은 가축화된 코끼리만 남아 있다. 코끼리 한 마리 값이 집 한 채 값과 비슷하기 때문에 코끼리를 기르는 집이면 경제 사정이 여유로운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코끼리는 소처럼 농사에도 쓰였지만 최근에는 수익이 더 높은 벌목에 주로 이용된다. 하지만 캄텐, 캄폰 형제의 집에서 기르던 코끼리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어린 주인을 따라 코끼리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이 코끼리가 우치 동물원에 온 코끼리들 중 한 마리인 ‘짠디’였다. 짠디는 코끼리 학교에서 무엇을 경험했을까? 이것은 코끼리들에게 조련사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과 연결된다.




1) 서울신문 「외국인 노동자 생산 유발 효과 年 10조 원 시대」(2012.4.23)


2) 신윤환 「동남아인들의 가치관과 윤리 의식: “게으름”과 “느슨함”」(서남포럼 뉴스레터 20호/ 2006.5.10)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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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코끼리, 빛고을 광주로 이사 가다


    2장 광주에 등장한 '주요 동물'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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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들을 맞이한, 예상치 못한 환대


우치동물원을 찾은 정이사는 예기치 않은 환대를 받았다. 코끼리라는 말에 우치동물원에서는 최정수 소장이 직접 적극적으로 나섰다. 코끼리가 올 수만 있다면 코끼리월드의 요구 조건을 가능한 한 모두 수용하겠다는 것이 우치동물원의 입장이었다. 정이사가 다녀간 지 얼마 후에는 최정수 소장과 담당 직원들이 직접 어린이대공원으로 찾아와 코끼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라권의 인구가 적은 데다 수도권에서 접근성도 떨어진다는 사실이 여전히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우치동물원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우치동물원이 아무리 적극적으로 나선다 해도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는 그것은 공연장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치동물원이 국내에서는 넓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동물 우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호수와 녹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치동물원에서 아무리 코끼리를 원한다고는 해도 다른 동물 우리를 허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코끼리 우리는 겨우 두세 마리만 들어가면 꽉 찰 크기였다. 코끼리 우리 앞쪽에 작은 공터가 있긴 했는데 코끼리 트래킹 코스라면 아쉬운 대로 마련할 수 있을 듯해도 공연장은 절대 불가능했다.

정이사의 답사 보고와 우치동물원의 구애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던 김회장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다른 데도 공연할 만한 데가 딱히 마땅한 것도 아니고. 우치동물원에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오고 일도 편하게 진행되고. 정이사도 광주로 하자 그랬어요. 우리는 시간도 없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회장이 코끼리월드를 접기로 결심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더 이상 코끼리 공연 사업을 계속해 보았자 수지가 안 맞는다는 판단이었다. 만약 이 무렵 코끼리들을 모두 사겠다는 동물원이 있었다면 김회장은 곧바로 손을 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마리나 되는 코끼리를 한꺼번에 살 수 있는 동물원이 금방 나타날 리 없었다. 그때까지 코끼리들을 머물 거처가 필요했다.


▲ 우치 동물원에서 만든 코끼리 홍보 전단지


양측은 코끼리 임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코끼리월드가 원하면 언제든 코끼리들을 데려갈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이대공원과 계약할 때에 비하면 갑을 관계가 바뀐 계약서였다. 계약이 확정되자마자 우치동물원에서는 보도 자료를 언론사에 뿌리는 것은 물론이고 홍보 전단지까지 만들어 광주 시내에 돌렸다. 우치동물원이 세워진 후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오는 동물은 코끼리가 처음이었다. 코끼리월드는 기존의 코끼리 우리를 보수해 조금이나마 더 넓히고 앞쪽의 공터에 코끼리 트래킹 코스와 먹이 주기 체험장을 만들었다. 어린이대공원 안에 조련사들 숙소도 마련했다.






2008년 8월 18일 선발대 격으로 세 마리의 코끼리가 우치동물원에 도착했다. 코끼리들을 나누어 싣고 화물 트레일러의 모습이 마치 기차 같았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던 동물원 사람들은 그 광경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게차가 트레일러에서 수송용 우리를 내리자 조련사들이 코끼리를 밖으로 꺼내 한 명씩 코끼리의 목에 탔다. 코끼리들은 조련사가 이끄는 대로 새로운 우리 안으로 차례대로 들어갔다.


코끼리 트래킹을 하는 모습. 특히 어린이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적응 기간을 가진 후 그달 말 코끼리 트래킹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5000원의 표 값이 비싸다고 느껴졌는지 관람객들은 흔쾌히 다가오지 않았다. 동물원 직원들이 관람객으로 가장해 코끼리 트래킹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표를 사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한 달 후에는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광주 시민들의 머릿속에서 우치동물원 하면 코끼리 타기 체험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코끼리 우리는 동물원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관람객들은 코끼리부터 먼저 본 다음에 다른 동물들도 구경하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연만큼 수익이 나지는 않았기에 코끼리월드는 계속 적자였다.

그사이 서울에서는 맞소송이 마무리되었다. 코끼리월드도 승소하고 어린이대공원도 승소해 결과는 무승부. 어린이대공원에 남아 공연을 계속하던 나머지 여섯 마리 코끼리도 2008년 11월 우치동물원에 합류해 아홉 마리가 다시 모였다. 하루아침에 우치동물원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코끼리가 사는 동물원으로 탈바꿈했다.

코끼리를 보려면 언제나 전라도 밖의 다른 동물원을 찾아야 했던 광주 시민들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코끼리들은 큰 화제가 되었다. 우치동물원은 이 코끼리들이 동물원 소속이 아니라 임대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도자료 등을 통해 분명히 밝혔지만 시민들이 그런 세세한 사실까지 확인하고 기억할 리 없었다. 우치동물원과 코끼리들의 만남은 그렇게 처음부터 불안정하게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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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코끼리, 빛고을 광주로 이사 가다


    1장 우치동물원 코끼리우리에 코끼리가 없었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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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고을 어린이들의 1순위 놀이터


어린이대공원이 ‘코끼리 방 빼기’ 문제로 법정 소송까지 치르는 사이, 한편에서는 반대로 코끼리를 들이지 못해 수십 년째 애태우던 동물원이 있었으니 바로 빛고을 광주의 우치동물원이었다.

우치동물원은 광주시 북구 생용동에 자리 잡은 우치 공원 안에 위치한 동물원이다. 우치동물원의 시작을 거슬러 오르고 오르다 보면 태종 3년인 1403년 광주에 설치된 사직단까지 닿는다. 광주와 서울을 비롯해 전국 10여 군데에 설치된 사직단에서는 해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사직단의 제사는 폐지되었고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광주 사직단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것이 지금 광주시 남구 사동의 사직 공원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하인 1971년 4월 17일 사직 공원 안에 동물원이 문을 열었다. 올해 여든일곱으로, 세 권짜리『광주 100년』을 지었을 만큼 광주 근대사의 산 증인으로 통하는 박선홍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자 교포들의 내왕이 활발해졌어요. 당시 교포 중에서 고향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다는 뜻을 밝힌 이가 있었고, 광주시는 동물원 조성을 요청한 겁니다.”1)



▲ 70-80년대 사직 동물원은 호남 지역 최고의 위락 시설이었다.(출처:《광주드림》)



사직동물원은 22종 51마리의 동물과 함께 출발했다. 이 중 코끼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기증자는 코끼리도 사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사직동물원 측에서 거절했다. 장소가 협소해 코끼리까지 수용하기는 도저히 무리였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코끼리는 없어도 어쨌든 호남 최초의 동물원이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던 그 시절, 사직동물원은 금세 지역의 명물로 떠올랐다. 광주와 전라도의 집집마다 어린이들이 엄마 아빠를 붙잡고 사직동물원에 놀러 가자며 노래를 불렀다. 어린이날이면 몰려든 인파로 동물원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진 동물원의 동물은 점점 늘었다. 외부에서 새로 들인 동물도 있었고 동물원 안에서 태어난 동물들도 있었다. 특히 호랑이 부부의 다산은 사직동물원의 자랑거리였다. 광주를 연고로 탄생한 해태 야구단(현재 기아)의 마스코트가 호랑이가 된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광주 사직동물원 호랑이 새끼 3마리 순산]

광주 사직동물원 어미 호랑이 호순이가 7일 아침 또 새끼 세 마리를 낳았다.

남편 호남과 작년 11월 열흘간에 걸친 사랑으로 화제가 됐던 호순이는 이날 새벽 두 시간의 진통 끝에 아침 6시 15분부터 45분까지 30분 동안 암컷 한 마리와 수컷 두 마리의 새끼를 순산했다.

이 새끼 중 마지막으로 태어난 수컷 한 마리가 어미젖을 먹지 않아 동물원측은 10여 일 전 새끼 7마리를 낳은 7년생 진돗개와 다리가 세 개 달린 개(삼족구)의 젖을 짜 한 시간 간격으로 끓인 우유와 함께 먹이고 있다. 또 이 호랑이 새끼는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개 젖을 직접 빨아먹기도 했다.

이들 개는 호랑이 새끼가 젖을 물자 처음엔 꼬리를 감추며 몸을 사리다가 사육사들이 강아지와 함께 품에 안겨 주자 자기 새끼인 것처럼 젖을 물려 주었다.

10~11년생인 이 호랑이 부부는 벵골 산으로 71년 4월 17일 사직동물원 개원과 함께 들어와 2년 만인 73년 6월 세 마리의 새끼를 낳은 뒤 지금까지 모두 7회에 걸쳐 24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이로써 이 호랑이 부부는 동물원에서 낳은 것으로는 동양에선 최다산 기록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1980.2.8

 

동물들은 점점 늘어나 80여 종 300여 마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직동물원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우리를 늘릴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코끼리는 고사하고 이제는 코끼리처럼 덩치 큰 동물이 아니라 해도 기증 제안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끼가 태어나 봤자 부담만 더해질 뿐이었다. 새끼를 다른 동물원에 분양 보내야 했고 나중에는 사자 부부를 발정기 동안 강제로 별거시키는 등 ‘동물 가족계획’을 실시했다. 경악스러운 일까지 벌어졌다.


[동물원 우리 좁고 먹이 값 감당 못한다 - 호랑이 새끼 전기 사형]

광주 사직동물원은 지난 15일 생후 8개월 10일 된 호랑이 새끼 2마리를 전기 쇼크로 죽여 충남 예산군 오가면 분천리 김대원 씨(45)에게 박제용으로 1백 54만 원을 받고 팔았음이 26일 뒤늦게 밝혀졌다. [……] 한편 호랑이 새끼를 죽여 팔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남쪽으로 날아가지 못한 제비 새끼를 공수해 보내면서까지 야생 동물을 보호하는 요즘 먹이 값 때문에 호랑이 새끼를 죽인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처사”라며 “어린이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경향신문》 1978.12.27


동물원 건설을 이유로 사직단을 헐어 버렸다는 것도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조상이 신성시했던 장소에 불경스럽게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리다니, 일제가 창경궁 안을 훼손하고 동물원을 설치한 것과 진배없는 일이 아니냐며 사직동물원의 존재를 마뜩찮게 보는 시선이 점점 커졌다.

이래저래 동물원을 둘러싼 여론이 좋지 않자 1980년대 초 정부는 동물원 확대 이전을 결정했다. 광주에 피를 뿌리며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호남 민심을 가라앉히려는 목적도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도 창경원을 대신할 서울 대공원이 한창 건설되고 있었다. 광주시는 동물원이 포함된 종합 놀이 공원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정 자립도가 대구와 함께 전국 대도시 중 꼴찌 수준인 광주로서는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전 논의만 무성했지 실제 진행은 느림보 걸음이었다. 논의가 시작된 지 수년이 지나서야 겨우 부지가 결정되었을 정도였다. 건설 비용은 광주시가 아니라 대표적인 호남 출신 기업인 금호 그룹에서 나왔다. 이 대가로 금호 그룹은 당시 150~200억 원을 호가하던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은 데다 20년 동안 놀이 시설 운영권을 보장받았다. 재벌 특혜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광주시로서는 고육지책인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 사직 공원의 사직단. 지금이 우치 동물원이 생기면서 사직단은 과거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http://korean.visitkorea.or.kr)


1991년 우치 공원이 지금의 장소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5일 4일 사직동물원은 우치 공원에서 우치동물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관람객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사직단은 1993년 복원되었다. 1만 9000제곱미터였던 동물원 면적은 46만 제곱미터로 수십 배가 늘었다. 면적에 맞춰 동물들도 다시 부쩍 늘기 시작했다. 새끼의 탄생을 마음 놓고 축하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없던 종도 외부에서 구해다 새로 들여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소식이 없는 그 이름, 그것은 코끼리였다.



여긴 왜 ‘주요 동물’ 코끼리가 없나요?


과거에는 공간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예산이 문제였다. 코끼리를 구입하려면 수억 원의 돈이 필요한데 광주시에서는 우치동물원에 대한 투자를 부담스러워했다. 금호 그룹은 수익이 나는 놀이 시설만 운영할 뿐 동물원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동물원 예산은 온전히 광주시가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동물원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 위엄 있게 어슬렁거리는 호랑이와 사자, 목을 쭉 뻗어 높다란 나무의 이파리를 먹는 기린 그리고 기다란 코로 물을 뿜는 코끼리. 엄마 아빠도 아이에게 “호랑이랑 코끼리 보러 동물원 가자.”라고 하지, “당나귀랑 황새 보러 동물원 가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껏 맘먹고 찾아간 동물원에 코끼리가 안 보인다면 얼마나 실망이겠는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물원 안에서도 몇몇 ‘주요 동물’과 그 외의 ‘기타 동물’이 은근슬쩍 구분된다. 학벌 사회를 비판하던 언론이 입시철만 되면 ‘주요 대학’ 위주로 보도를 하듯, 동물 사랑을 표방하는 동물원이지만 실제로는 ‘주요 동물’에게 조금은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가급적 다른 동물보다도 호랑이, 사자, 기린, 코끼리 같은 ‘주요 동물’을 우선적으로 들여놓으려 하고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두려 한다. 흔한 표현을 빌자면, ‘주요 동물’ 없는 동물원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고무줄 없는 팬티라고나 할까. 그러니 무려 ‘주요 동물’씩이나 되는 코끼리가 없다는 것은 우치동물원의 큰 흠이었다.

사실 우치동물원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었다. 공공시설로서 예산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우치동물원은 서울 대공원을 제외한 지방의 동물원 중에서는 면적으로나 동물 수로나 최고로 꼽혔다. 해마다 탄생하는 새 생명의 수로 따지면 전국에서 첫 손가락에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자랑거리들로도 코끼리가 없다는 약점을 덮을 수는 없었다. “여긴 코끼리가 없나 보네.” “코끼리 보려면 서울까지 가야 하나?” 우치동물원을 찾은 관람객들의 입에서 단골로 나오는 말들이었다.

코끼리가 생길 뻔한 기회가 몇 번 있긴 했다. 1998년에는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새끼 코끼리를 데려오기로 했다. 안 그래도 아시아코끼리는 아프리카코끼리에 비해 몸집이 작은 편인데 새끼라면 관람객들이 기대하기 마련인 거대한 몸집과는 거리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냥 성인 코끼리만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 새끼 코끼리가 이사를 20여 일 앞두고 갑자기 죽고 말았다. 창경원과 사직동물원을 거쳐 우치동물원까지 동물원에서만 30년을 보낸 이삼수 전 우치 공원 관리소장은 이 일을 재임 기간 중 가장 아쉬웠던 점으로 꼽는다.2)

2005년에는 어느 돈 많고 애향심까지 많은 사업가가 “우리 광주에 코끼리 한 마리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직접 코끼리를 사서 기증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사직동물원 시절과는 달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치동물원은 사업가의 말을 찰떡같이 믿고 10억을 들여 일단 코끼리 우리부터 덥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사업가가 갑자기 말을 바꾸며 연락을 끊어 버렸다. 인심은 조석변이라더니 꼭 그 짝이었다. 코끼리 기증은 물 건너간 일이 되었다. 코끼리 없는 코끼리 우리만 관람객들을 놀리듯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뭐해서 대신 단봉낙타 한 쌍을 넣어 두었다.

자꾸 일이 틀어지자 우치동물원은 직접 나서서 외국으로부터 코끼리를 들여오기로 방침을 세웠다. 마침 인도의 마이소르 동물원에서 세 살이 채 안 된 새끼 인도코끼리 한 마리를 팔려고 한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인도코끼리는 보르네오코끼리, 수마트라코끼리, 스리랑카코끼리와 함께 아시아코끼리에 속하는 종이다. 아직 어린 코끼리라 코끼리 가격으로서는 비교적 저렴한 1억 원이었다.

우치동물원은 광주시로부터 추가 예산 1억 원을 어렵사리 확보한 다음 인도에 연락을 취했다. 코끼리는 멸종 위기 동물로서 국제 거래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데다 인도 역시 CITES에 가입되어 있으니 수입 과정이 까다로울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그래도 구입 비용이 마련되고 우치동물원은 비상업적인 공공시설이니 결국에는 성사되겠지 하고 낙관했다. 그런데 인도 마이소르 주 정부의 깐깐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이소르 주 정부에서 태클을 건 이유는 우리나라의 기후와 우치동물원의 환경이었다. 기후야 불가항력이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동물원 환경을 따지고 들자면 우치동물원이 큰소리 칠 형편이 아니었다.

우치동물원을 비롯해 지방의 동물원들은 대부분 서울 대공원을 본 따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대형 동물원의 시대를 연 것이 서울 대공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 대공원의 구조는 최대한 많은 동물을 전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동물보다도 관람객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각 동물들의 생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칙칙하고 비좁은 콘크리트 우리 안에 동물들을 수용했다. 당연히 동물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에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작별」. 포스터에 등장하는 호랑이 ‘크레인’은 근친교배로 인해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호랑이답지 못하게 목줄에 매인 채 비좁은 상자 안에서 지내는 크레인의 모습은 동물원의 사육 환경에 개선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동물원의 열악한 사육 환경으로 인해 동물들이 고통받는 현실은 2001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작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침묵의 숲」, 「어느 날 그 길에서」로 이어지는 황윤 감독의 ‘야생 동물 3부작’의 시작이 된 작품이다. 황윤 감독은 어느 날 우연히 동물원에 놀러 간 것을 계기로 야생 동물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북극곰 우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봤더니 곰이 머리를 쉬지 않고 아래위로 흔들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곰이 춤춘다며 박수를 치더군요. 알고 보니 그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동물들이 보이는 정형 행동이란 것이었어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북극곰과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관람객들, 평화로운 휴일의 동물원에서 벌어진 한 편의 부조리극이었죠.”3)

황윤 감독이 목격했듯이 동물원에 적응하지 못한 동물들은 먹이를 거부하거나 행동이 둔해지거나 심하면 자해를 하는 등 다양한 이상 행동을 보인다. 황윤 감독은 우리나라 동물원들이 눈요기만을 위한 19세기식 동물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꼭 서울 대공원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서울 대공원이 문을 연 1980년대 초에는 다른 나라 동물원들도 대개 거기서 거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후로 동물 복지와 동물원 환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선진국의 동물원들은 사람보다 동물 친화적인 방향으로 변모해 왔다. 이제 동물원은 단순한 구경거리 위주의 동물 전시장이 아니라, 야생 동물을 보호하고 복원시키는 안식처이자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생태 교육의 장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외국의 유명 동물원에 가 보면 동물들이 자연과 최대한 비슷하게 조성된 시설에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으니 관람객들도 더욱더 즐겁기 마련이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서울 대공원은 우리 안에 콘크리트를 걷어 내고 잔디를 까는 등 새롭게 탈바꿈하는 중이다. 자연 생태 동물원을 목표로 10년 동안 해마다 1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이나마 투자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 대표 동물원이라는 위상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의 동물원들에서 이런 투자는 언감생심이다. 우치동물원 사정도 매한가지. 코끼리 한 마리 살 돈도 겨우 마련한 마당에 동물원 전체를 친환경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따로 세금을 더 들이지 않고도 예산을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입장료를 확 올리는 것. 우치동물원은 “왜 여긴 에버랜드처럼 못 하나요?”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왜 에버랜드처럼 사파리도 만들고 동물 쇼도 하고 환경도 더 아기자기하게 만들지 못하느냐는 불만이다. 하지만 에버랜드는 사설 동물원이라 입장료만 3만 원(놀이공원 포함, 성인 기준)이다. 전문 사육사와 특수 지프를 타고 사파리 내부를 도는 스페셜 투어를 하려면 최대 13만 원(6인 기준)이 추가로 든다. 그에 비해 공공기관 소속인 우치동물원은 고작 1500원이다. 이러니 만년 적자일 수밖에.

아무리 목적이 좋다 해도 공공 동물원이 입장료를 올려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공공 동물원의 존재 이유인 공익성을 저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역 동물원을 제대로 지원하는 지방 자치 단체는 거의 없다. 환경 개선은 고사하고 기존의 시설을 유지하는 것만도 다행인 수준이다.

드디어 인도에서 최종 통지서가 날아왔다. 결과는 한마디로 코끼리 판매 불허. 통지서에 적힌 불허 이유는 구구절절 맞는 말들뿐이었다. 동물원 시설이 낡았다, 코끼리 우리가 시멘트와 철로 되어 있어 위험하다, 동물원 직원 중 코끼리 전문가가 없다……. 알고 보니 마이소르 주정부에서는 몰래 우치동물원으로 사람을 보내 사전 답사까지 마쳤다 했다. 예산부터 확보해 놓고 지레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우치동물원으로서는 실로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1억 원의 예산은 고스란히 광주시에 반납하고 말았다.

이 일을 놓고 광주시의회까지 나섰다. 교육사회위원회 결산 심의에서 의원들의 집중적인 질의가 가해졌다.

“코끼리 없는 동물원은 동물원이라 할 수 없잖아요. 애들이 사진이나 그림책만 보고 ‘코끼리다.’ 하면 안 될 것 아니에요? ‘아, 우치동물원에 가면 코끼리가 있지.’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세요.”

“코끼리가 3년째 광주에 오지 못한 건 동물원 측이 CITES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날의 광경을 보도한 광주매일신문의 김명식 기자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광주에도 코끼리가 있다.’고 할 날은 기약 없어 보인다.”4)

하지만 ‘광주에도 코끼리가 있다.’고 할 날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코끼리월드의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1) 《광주드림》 「연 67만명 관람 ‘동물의 왕국’」(2010.7.27)


2) 광주일보 「동물들과 ''동고동락'' 30년」(2003.2.22)


3) 샘터 「다큐멘터리로 생명의 의미 일깨우는 황윤 감독」(2008년 6월호)


4) 광주매일 「코끼리는 광주에 언제 올까」(2007.7.5)


posted by Editor!
  • 셜록홈즈 2013.07.10 11:37

    읽다가 울화가 치미네요...불쌍한 동물들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지도 못하고 인간의 눈요기로 사는것도 억울한데 시설 좀 크게 잘 좀 해주지....입장료를 올리라구요...그리고 국민들은 비싼 입장료 아닥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