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인문학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



인문학조차 자기계발의 도구가 된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은 어떤 것일까?

“아이패드라는 값비싼 장난감을 자랑하기 위해 잡스가 꺼낸 인문학 타령은 가뜩이나 인문학으로 밥 벌어먹기가 어려워진 이들에게는 호재처럼 보였던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의 학문 시장에서 인문학이 고사될까 걱정하는 이들은 이때다 싶어 잡스의 발언을 두둔하고 선전하고 나섰다. 물론 상당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잡스가 인문학에 빚졌다고 말할 때 이는 이를테면 문사철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란 이미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 변신한 경영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들로, 굳이 철학과 문학 따위에 신세를 질 이유가 없다. 그 자체가 이미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서동진) 중에서



CEO와 노동자의 인문학부터 SNS 시대의 인문학까지……

팔리고, 잊혀지고, 싸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으로 꽉 찬,

지금 한국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다 모았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해온 지 오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들린 적도 없다. 노숙인 인문학에서 CEO 인문학, 나아가 어린이 인문학, 엄마 인문학까지. 계급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전 국민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인문학은 어떤 것인가? 나아가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은 무엇인가? 이 책은 지금 여기의 인문학을 총점검하기 위한 25가지 질문에 답하는 22인의 인문학자들이 치열한 고민을 담은 책이다.

  이 25가지 질문과 답을 분류해보면 인문학의 네 가지 얼굴을 만나게 된다. 우선 팔리는 인문학, 인문학이 장사나 화제가 되는 경우다. 가령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애플이 있다.”고 공언했다. “제가 인문학은 좀 아는데, 정치는 모릅니다.”라고 말한 안철수 후보에게 지난 대선에서 시민들이 보인 반응은 뜨거웠다. 또 동양고전이 직장인의 처세술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1부에서는 이런 현상들을 파고들어 지금 한국의 인문학의 한 단면을 성찰해본다.

  2부는 잊혀진 인문학, 잃어버린 인문학에 관한 기억들이다. 한때 사회를 바꾸기 위해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1980년대 한국 대학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사회과학 열풍은 잊혀졌지만 한번쯤 복기해볼 만한 기억이다. 140자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익숙해진 SNS 시대에 대하역사소설의 설 자리가 어디인지 짚어보기도 한다. 또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과학주의가 어떻게 인문학의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3부에서는 인문학의 가장 씩씩한(혹은 가장 험상궂은) 얼굴을 만나볼 수 있다. 인문학은 때로 칼보다 날카롭고 폭탄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전복하는 무기로서 인문학이 활용될 때가 그런 때이다. 3부는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하는 저항의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글로 시작해 CEO에게 인문학이 유용하다면 노동자들에게 인문학은 또 어떤 모습일지 고민해보는 글로 마무리된다. 한때 소설에 밀려 구시대의 장르로 전락했던 시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현실에 가장 빠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장르로 변신한 것에 대한 고민도 흥미롭다.

  4부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문학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본다. 가령 민족주의적 역사기술과 포스트모던, 트랜스내셔널 역사관을 모두 뛰어넘는 새로운 한국사는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 고전 주석을 넘어서 살아있는 현대철학으로서의 동양철학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영화나 문학 작품을 비평하는 데 더 많이 활용되어온 정신분석학이 한국에서 치료로서 자리잡을 수 을 지에 대한 고민도 흥미롭다. 새로운 관계맺음의 방식과,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서비스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이룬다.


각 장의 내용

  스티브 잡스는 우리 CEO들의 마음속에 혹시 잡스가 나만 모르는, 상품 개발과 이윤 창출에 이바지하는 인문학이라 불리는 마술 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탐심을 심어주었고, 이 탐심이 하나의 동력이 되어 CEO들 사이에 인문학 열풍이 몰아쳤다. 1장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는 잡스로부터 비롯한 ‘인문학이라는 이 새로운 물신’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2장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는 언젠가 ‘제가 인문학은 아는데 정치는 잘 모른다.’고 말했던 안철수 현상의 신선함을 그의 인문 성향에서 발견하고 실체를 분석한다.

  3장 「프랑스 철학은 왜 포퓰리즘이라는 의심을 받는가」는 20년 이상 우리 지성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온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우리 시대의 구체적 문제들 한복판에서 프랑스 철학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4장 「동양 고전은 왜 처세서로 읽히는가」는 동양 고전 열풍이 자칫 편향되고 얄팍한 처세론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동양 고전이 본래 처한 자리를 알려준다.

  5장 「인문학에 관한 책들은 인문적인가」6장 「인문학 교실 붐, 어떤 성과를 냈나」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인문학 현장인 도서와 인문 교육 영역을 비판적으로 진단한다. 전자는 인문학의 이름을 내건 비인문적 도서의 정체를 폭로하며 인문학 서적의 긍정적 본질을 그리려 노력하고, 후자는 최근의 인문학 붐과 그로 인한 각종 인문 교양 교육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살핀다.

  1980년대 사회과학은 한때 한국 사회 변혁의 실천적 요구에 대한 지성의 응답으로서, 학문 세계에 뛰어드는많은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다. 현실의 폭력 앞에서 인문학이 젊은이들 손에 무기를 들려주지 못할 때 사회과학은 그 위대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실천적 힘을 기대하며 사회과학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7장「운동으로서 사회과학은 어떻게 되었나」는 바로 사회과학의 이러한 현재의 위상을 과거에 비추어 점검해본다. 

  근대 학문과 교육 제도가 창설될 때 한국에서 가장 각광받은 외국 학문 영역을 꼽자면 단연 ‘독문학’이었다. 독문학은 단지 하나의 외국 문학에 국한되지 않고 서양 문화 자체를 체험하는 장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급속도로 강화된 영어의 전 세계적 위상이 던지는 그림자 아래 독문학의 지위는 처참할 만큼 실추되었다. 8장 「학문 언어로서 독일어는 사라졌는가」는 독일어의 이러한 위상 변화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오늘날 자칫 간과되기 쉬운, 영어 이외의 외국어와 문화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대하 역사소설은 한때 문단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가장 사랑받는 문학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이 영역에서 『토지』, 『장길산』, 『객주』 등의 중요한 작품을 내놓았다. 오늘날 이러한 대하 역사소설의 생산과 폭넓은 향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소설의 쇠퇴는 역사의 발전 자체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인가? 역사소설의 몰락은 역사 발전이라는 거대 담론의 몰락을 보여주는 현상인가? 9장 「대하 역사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는 이러한 문제를 고민한다.

  한국 인문학의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성과를 가늠할 수 있었던 영역으로 문학비평을 빼놓을 수 없다. 10장 「비평은 어떻게 전체에 대한 통찰을 회복할 것인가」는, 현재의 한국 문학비평이 상업주의, 저널리즘, 소아적 분파주의에 휘말려 비평가가 소속된 출판사의 출판물에 관한 리뷰어로 전락한 문제 상황을 드러낸다. 그리고 문단 자체, 세계문학, 문학 교육 등 비평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그것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11장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12장 「심리학은 뇌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 이 두 편의 글은 과학주의의 허를 밝힘으로써 과학으로 흡수될 수 없는 인문학 고유의 과제를 분명히 한다. 전자는 사회생물학적 연구와 최근의 진화심리학 등을 비판하며, 인문학 주제들이 과학에 흡수되는 사태는 낡아빠진 환원적 학문 통일 이념의 재탕임을 드러낸다. 후자는 뇌 과학에 대항하여, 심리 활동의 비밀은 실험실의 뇌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노출되어 있는 다양한 사회 환경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인간 마음의 비밀은 이런 사회 환경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무시하고서는 해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3장 「사회과학은 사회공학으로 남을 것인가」는 오랜 경쟁자이자 협력자였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태어난 사회과학은 인문적 성격, 즉 우리 사회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일(정향적 지식의 제시)에 매진하면서 영광을 얻었지만, 1990년대부터 공학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쇠락하게 되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사회과학의 활로는 상실한 인문학 측면, 그러니까 삶의 방향성을 열어주는 일을 되살리는 것이다.

  14장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계승할) 저항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는 오늘날 좌파 정치철학의 지

형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정치철학의 장에서 마르크스와 푸코의 유산을 상속받은 철학자들이 제

도적인 정치 ‘바깥에서’ 어떻게 해방을 모색하는지 보여준 후 그 한계 역시 지적한다. 15장 「여성학은 성폭력 담론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는 성폭력에 깃든 여성주의의 문제의식은 기존의 성범죄를 더 무겁게 처벌하고 엄단해달라는 요구라기보다, 시민적 권리의 주체로서 여성이 누려야 할 성적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인정의 요청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16장 「한국 현대 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나」는 최근 몇 년 사이 정치의 급격한 보수화와 더불어 시가 보여준 ‘현실 참여적’ 성격에 관한 글이다. 한국 현대 시가 어떻게 현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지 살펴본다. 1990년대 이후 한동안 인문학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인문학적 소양과 학문적 배경을 갖춘 많은 인재들이 영화계에 유입되었다. 이런 현상이 영화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있는지 17장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는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18장 「사도 바울은 왜 급진 정치철학자로 각광받는가」는 오늘날 정치철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을 들여다본다. 기독교의 보수적 교리의 지층을 다진 인물이라는 겉모습과 달리 바울은 니체와 같은 종족으로서, 현행 가치들을 파괴하는 자, 율법을 비롯한 당대의 질서와 싸워나가는 자였다. 19장 「인문학이 노동자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는 현실의 다양한 조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인문학이 진짜 노동자가 손에 들 수 있는 무기인가를 고민한다. 지금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고, 노동자를 포함한 주체를 고민한다면, 그 시작은 그런 주체의 현실적 삶과 밀착된 ‘대안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 글은 강조한다.

  20장 「새로운 민중사학은 가능한가」는 보수화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척지에 강력하게 자리 잡은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의 성과를 평가하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과제를 설정하려 한다. 바로 민중사학이다.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이 내재적 발전론의 보수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얻은 성과가 자칫 민중의 주체적 역량마저 폄하하는 방향으로 확대되는 사태를 우려하면서, 역사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려 한다. 21장 「동양 현대 철학은 가능한가」는 동양철학이 고전 주석을 넘어서 현대 철학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보는 글이다. 고전에 대한 과잉 기대로부터 고전에 대한 종속이 생기며 학문이 죽는다. 고전 주석만 있고 현대 철학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변신을 할 수 없는 죽은 학문이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런 죽음을 넘어 동양 현대 철학의 길을 제시한다.

  22장 「한국에서 정신분석은 환자를 치료하는가」는 한국에 전무하다시피 한 ‘치료로서의 정신분석학’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한국에서 정신분석 연구는 외국 문학 이론의 수용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데 책상 앞에 앉아 철학 책과 문학 서적을 끼고 하는 인문학 연구로서의 정신분석이 풍부하게 펼쳐진 반면, 치료 행위로서의 정신분석은 지금껏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늘 지옥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살아간다. 모든 윤리적 행동, 도덕적 비판의 바닥에 지옥에 대한 무의식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지옥 관념은 유아적 상상력(시각 차원에서 혐오스러운 것, 신체적인 극심한 괴로움 등)을 크게 뛰어넘지 못한다. 인문학자라면 이 지옥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오늘날과 같은 합리적이고 세속화된 사회에서 여전히 지옥은 의미가 있는가? 23장 「인문학자에게 지옥이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문제들에 답하려 한다.

지금은 새로운 연구자들이 인문학 분야의 정전들을 다시 번역 및 교체하는 시기다. 아울러 외국 학문의 개념을 우리말로 잘 번역.소화해 우리 학계에 안착시키려는 시도 역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4장 「번역의 정치학은 왜 필요한가」 는 번역의 위상, 번역자의 자기의식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SNS 시대에 우리는 기술을 통해 소통의 조건을 최적화하는 이상에 접근하고 있다고들 믿는다. 그리고 이런 소통을 통해 보편적 합의로 수렴해가는 집단지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등장한다. 25장 「SNS 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인가」는 이 소통과 집단지성이 ‘지독한 환상’은 아닌지 의심한다.



차례와 지은이


 1부 팔리는 인문학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  서동진 계원예술대 디지털콘텐츠 교수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한보희 평론가
 프랑스 철학은 왜 포퓰리즘이라는 의심을 받는가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동양 고전은 왜 처세서로 읽히는가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인문학에 관한 책들은 인문적인가   표정훈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
 인문학 교실 붐, 어떤 성과를 냈나   노정태 서평가
 2부 잃어버린 인문학  
 운동으로서 사회과학은 어떻게 되었나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학문 언어로서 독일어는 사라졌는가   김태환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심리학은 뇌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   이남석 심리변화행동연구소 소장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   이상헌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대하 역사 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정영훈 경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비평은 어떻게 전체에 대한 통찰을 회복할 것인가   우찬제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사회과학은 사회공학으로 남을 것인가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3부 싸우는 인문학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계승할) 저항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여성학은 성폭력 담론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  신상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교수
 한국 현대 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나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강유정 평론가
 사도 바울은 왜 급진 정치 철학자로 각광받는가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인문학이 노동자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

 4부 가능성의 인문학  
 새로운 민중 사학은 가능한가

 강응천 출판 기획자

 동양 현대 철학은 가능한가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한국에서 정신분석은 환자를 치료하는가 맹정현 정신분석클리닉 혜윰 원장
 인문학자에게 지옥은 무엇인가 장석만 종교학자
 번역의 정치학이 왜 필요한가  윤성우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SNS 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최정우 평론가



기획 서동욱

벨기에 루뱅 대학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 철학과 교수이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계간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이다.

쓴 책으로 『철학 연습』,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 『일상의 모험』, 『익명의 밤』 등이 있고, 시집으로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등이 있으며 종합공연 「신체연구」, 「허파주체」 등을 기획하기도 했다.


인터넷 서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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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반비의 첫 출간작 - 1월 중 출간 - 이 될 「싸우는 인문학」의 표지 시안 4종 세트입니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지형을 점검하면서 흥미로운 인문학적 통찰을 담은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책 내용 소개 전에 먼저 표지만 보고 흥미가 동하시는지요? :-)



'망치'가 들어간 표지



펜을 잡은 손이 들어간 표지




자, 그럼 과연 어떤 표지가 최종 후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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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연습」이 전자책(eBook)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반비 첫 전자책 타이틀은 서동욱 교수님의 「철학 연습」입니다.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여기에 ☞ 보기


철학 연습 전자책 판매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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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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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진행했던 <회색 쇼크> 깜짝 퀴즈 - EU 국가 중 평균 수명이 가장 긴 나라는?에 이어서 이번엔 <철학 연습>에서 퀴즈를 내봤습니다. 블로그 글 쓰기로 했던 분들이 안 주셔서 계속 이런 퀴즈 내는 건 아닙니다. :D


"네가 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내가 무수히 계속 그것을 하길 원하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시작한다면, 이는 네게 가장 굳건한 무게중심이 될 것이다."

<철학 연습> 중 



<철학 연습>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 말은 누가 한 말일까요? 1부 '오늘의 철학 이론' 1장 '현대적 사유를 위한 준비'에서 다루고 있는 네 명을 보기로 들었는데요, 이번엔 지난 번 퀴즈에 비해서 난이도가 조금 있어서인지 참가자수도 적었군요. ^^ 대신 4분 모두 정답을 맞춰 주셨습니다. 

예, 정답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철학 연습>에서는 니체를 현대철학자들의 인터넷과도 같다고 비유하죠. 니체라는 웹사이트를 보며 영감을 얻고, 제각각 댓글을 남긴다는 점에서 말이죠. 어떻습니까? "***님이 좋아합니다. 퍼가요♡"라든지, 쓰기 곤란한 악플이라든지 이런 모습을 상상하면 니체 이후의 철학자들이 더 궁금해지지 않나요? ^^ 

니체의 철학은 존재자의 자연적 힘을 긍정하고 피안의 초월적 원리에 의해 현세적 삶이 폄하되는 길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뒤를 잇고 있으며, 들뢰즈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다. 

서동욱, <철학 연습> 



서동욱 선생님의 사인본을 받아보실 분에게는 개별 연락 드렸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참가하기 쉬운 이벤트를 진행해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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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65 발행된<기획회의> 297호 출판사 서평’란에 실린 반비 편집자의 글입니다.


친절하지만 기품 있는 철학 교양서를 만들다


철학 연습

  서동욱의 현대철학 에세이

서동욱 교수가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를 한다. 이것만으로도 우선 관심이 갔다. 서동욱 교수는 탄탄하고 꼼꼼한 연구로 정평이 나 있고, 물론 시인이나 평론가로도 알려져 있는 분이긴 하지만,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네이버에 들어가 보니 글 한 편 한 편마다 댓글이 몇백 개씩 달려 있다. 가령 이런 것.


"어렸을 적에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진부하고 어렵고 현실적으로 의미 없는 넋두리쯤 되는 양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지혜, 지식들을 고맙게도 책을 통해 공짜로 얻은 후엔 철학, 사랑, 자유, 지혜, 평등, 존중 등 수많은 언어로 표현된 가치들이 얼마나 인간에게 필요하고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 돌쇠 (myuc****)


인문서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독자들 수준을 너무 낮춰보는 나쁜 버릇이 생긴다. ‘이 책은 어려우니까 안 팔릴 거야, 이 책은 두꺼우니까 사람들이 안 보겠지......’ 하지만 어려워서 외면당한다는 것은 절반만 사실이다. 좋은 책들은 어려워도 잘 읽힌다. 최근 철학 교양서들이 독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말과의 씨름, 생각과의 씨름은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쁨 중 하나인데, 책 만드는 사람들이 친절함과 안이함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쉽게 만들겠다면서 알맹이들을 빠뜨리다 보니 독자들에게서 더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철학 연습>은 이런 고민의 와중에 만들어졌다. 서동욱 교수의 글이 이런 고민을 자극했다. 현대철학의 진지한 고민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면서도, 우리 삶과 밀착시킴으로써 더 흥미롭게 만드는 글쓰기.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철학 개론서가 아니라, 저자의 머리와 마음을 통해 충분히 소화된 이야기만을 전하는 철학 교양서. 앞으로도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마치 이런 고민에 답하듯, 저자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터치스크린, 전자책 돌풍이 책읽기와 글쓰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대목이다.


통계나 호구조사 같은 ‘생각하지 않는 계산’이 아닌 진짜 사유의 내용을 담은 정보는, 동굴 벽화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요술이 아닌 지적 노동의 담당 영역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즉 성찰과 연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기기 또는 새로운 장난감을 구입한 이들은 짧은 설렘 뒤에 곧 허무에 빠지기 일쑤다. 인간의 지적 노동의 진보와 새 상품은 아무 상관이 없기에.(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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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기념 강연회 첫 번째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 정독도서관)
출간 기념 강연회 두 번째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 숨도 카페)
얼굴이란 무엇인가?  (5/30, 대치도서관)  

드디어 <철학 연습> 출간 기념 강연회의 마지막 시간,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강연이 6/2(목),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있었습니다.
 



오늘 <철학 연습> 강연의 주제는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입니다. 이 자리를 위해 안무가 이나현 선생님이 자리를 함께 해 주시고, 멋진 즉흥춤을 보여주셨습니다.

음악이 없이 춤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음악이 나오는가 싶더니 다시 고요한 가운데 춤이 이어졌습니다. 모두 숨죽이고 지켜봤던 공연이었습니다. 강연 마치고 질답 시간에, 공연 중 음악이 없는 상태가 있었는데 왜인지라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서 이나현 선생님은 "조용한 상태를 사람이 오래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공연 중 '무음' 상태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음악'이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답니다.



이나현 선생님의 즉흥춤 공연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강연의 시작입니다. 사회는 1회 강연 때처럼 김지녀 시인이 맡아주셨습니다.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무용수의 눈과 몸의 문제들


『철학연습』(반비, 2011)이 다루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신체의 문제입니다. 현대철학이 그 중요성을 발견하고 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신체이지요. 『철학연습』에 나오는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들뢰즈 등의 사상의 주요 부분에 몸에 대한 명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독창적으로 신체에 대한 사유를 전개해 왔습니다. 주관과 객관 이전적인 원초적 ‘살’로서의 존재(메를로-퐁티), 리듬의 자동성(레비나스),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알(들뢰즈) 등등이 신체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개념들이지요.


오늘 저녁엔 안무가 이나현과 함께 신체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몸은 늘 미리 정해진 생활 방식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기능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날의 피상적인 용도성 속에서 신체의 원초적인 모습이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모든 용도성으로부터 떠나 있는 신체 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요? 신체를 쟁기나 다른 연장, 또는 인사하거나 악수하는 기계처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신체 자체인 한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신체 자체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이 바로 무용가라고 생각합니다. 신체를 신체 자체로서 사용하는 사람.


먼저 우리는 오늘 저녁 이나현의 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나현과 저는 종종 춤과 철학을 한 무대에서 사유해 보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나현은 제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의 춤의 생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철학은 춤의 대본이 아니며, 무용수는 철학적 개념의 개입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침해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춤은 이미 존재하는 이론을 청사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저녁 우리는 춤을 보면서 비로소 신체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춤이 신체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래 우리가 춤과 더불어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몇 가지 구절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사유는 앞에 펼쳐진 물살이 거세서, 징검다리가 되어줄 디딤돌 몇 개를 늘 가지고 싶어 하니까요.


메를로퐁티: “지금껏 철학은 고작해야 몸을 인식 주관이 대면하는 여타의 다른 대상과 다를 것이 없이 시공을 채우고 있는 연장(延長)으로 보았다. 즉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을 발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의식이 지각하는 대상이기 이전에, 몸 때문에 바로 외부 대상들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 바깥에 있는 비신체적인, “고공비행을 하며 내려다보는 주체(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주관)”는 없으며, 세계 안의 몸과 뒤섞여 있는 의식이 주체가 된다. 피부의 조직끼리 갈라낼 수 없이 얽혀 있듯 의식은 “세계의 조직(tissu du monde)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철학연습』, 112쪽)


레비나스: “리듬은 시적 질서의 어떤 내적 법칙 보다는 시적 질서가 우리에게 작용하는(affecter) 방식을 가리킨다.……주체는 그 리듬 속에 사로잡히고 또 휩쓸려 버린다. 주체는 리듬의 고유한 표상의 일부가 된다. 그 자신에 거스르면서조차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리듬 안에는 더 이상 ‘자아’가 없고, 자아로부터 익명으로의 이행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와 음악의 매혹 혹은 주술이다. 이런 존재의 양태에는 의식의 형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아는 그런 존재 양태를 소유하는 특권, 그리고 그의 힘의 특권을 버리기 때문이다. 또 이런 존재의 양태에는 무의식의 형식도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경우 전체 상황과 그 상황의 개개 정황들은 분명치 않은 어두운 빛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음악 소리에 맞춘 걸음 걸이 혹은 춤의 특별한 자동성(L'automatisme)은 무의식적 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의 양태이다. 오히려 이 존재 양태에 있어선 자신의 자유 속에서 마비된 의식이 놀이하며, 완전히 이 놀이 속에 흡수되 버린다.”(레비나스, 「실재와 그 그림자」에서)


들뢰즈: “들뢰즈는 특권화된 기관으로서의 눈보다는, 어떤 기관도 특권을 행사하도록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 즉 ‘기관 없는 신체’를 내세운다. 아무런 기관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이런 신체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메타포로서 그는 알(卵)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기관들이 기관화〔유기체화〕되기 이전의, 그리고 층들(strates)이 형성되기 이전의 알로 다룬다…….” “우리는 알이 유기적으로 되기 ‘이전의’ 신체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안다.……알은 ‘입도, 혀도, 이도, 후두도, 식도도, 위도, 배도, 항문도 없다.’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일 뿐이다.”……“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된다기보다는, 우리가 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체화(organisation)에 더 반대된다.……유기체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서동욱, 『차이와 타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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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내용은 간략하게 이 정도로 마치고,  질답 시간. 

<철학 연습> 출간 기념 강연회를 위해 벨기에에서 한국까지 오신, 짧은 기간 동안 시차 적응 기간도 없이 4개의 주제로 4번의 강연을 해 주신 서동욱 선생님과, 같이 해 주셨던 모든 게스트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늦은 시간에 강연회에 참석하셔서 '철학'이라는 것을 실생활과 유리된 것이 아닌 실제 삶에 부딪치는 주제로 소화하신 모든 참석자분들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

참, 혹시 강연회 세 번 모두 참석하신 분 계신가요? 두 번 참석하신 분들은 제가 몇 분 뵌 것 같습니다만. ^^ 강연회 참석하셨던 분들, 후기를 인터넷 서점이나 반비 블로그에 트랙백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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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기념 강연회 첫 번째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 정독도서관)
얼굴이란 무엇인가?  (5/30, 대치도서관)  

2011년 5월 31일(화), 서강대 앞 카페 숨도에서 <철학 연습> 강연회,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날의 강연은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란 주제로, 김경주 시인이 게스트로 나와 주셨습니다. <철학 연습> 독자라면 <철학 연습>에 김경주 시인의 글이 인용된 걸 기억하시겠지요? ^^ 그리고 사회는 허윤진 평론가가 맡아주셨습니다. (공지에는 없던 깜짝 사회랄까요? ^^)




그럼 강연장에 오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강연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공유해 봅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분들이 강연장을 찾아주셨습니다.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또는 삶의 반복



1. 잃어버린 시절을 찾는 자전거


『철학연습』의 표지에는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온갖 실험을 가시화하고 싶어 하는 듯 소년의 자전거는 위태로운 외발자전거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철학의 시선처럼 자전거는 높기도 하군요. 양 팔은 막 이륙하기 직전의 날개이고요. 어디 하나 위험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철학은 늘 그렇게 우리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위험 속에서 우리는 잠을 깨고 우리가 돌아 나올 수 없는 세계의 심연을 드디어 드려다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소년의 자전거가 향하고 있는 하늘은 부드럽습니다. 밀밭을 부드럽게 떠밀며 바람이라도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부드러운 하늘의 색깔은, 세계가 한잔의 밀크커피 속에 들어있다는 독특한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마치 ‘추억의 시간’을 보여주는 풍경 같습니다. 추억 속에 종종 등장하는 시간, 저 잃어버린 시절을 찾는 일. 그것이 오늘 저녁 우리가 할 이야기입니다.



2. 잃어버린 시절은 반복을 통해 찾아온다


『철학연습』이 중요하게 다루는 현대 철학의 개념이 바로 ‘반복’입니다. ‘반복’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바로 우리는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문제는 곧 ‘반복’의 문제와 같습니다.

『철학연습』은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들뢰즈 세 사람의 철학자와 더불어 반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각각 42-43쪽, 65-69쪽, 186-188쪽)

키르케고르는 성서의 인물 욥의 반복에 대해 말합니다. “욥은 축복을 받았고 모든 것을 ‘갑절’로 되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이라고 부릅니다.”(『철학연습』, 43쪽) 그는 반복을 통해 가장 본래적인 실존에 도달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프로이트에서 반복은 일종의 질병을, ‘트라우마’를 성립시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단지 마음의 병을 해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류의 정신의 근본 국면을 반복에서 찾았습니다. 모세 살해에서 예수 살해로 이어지는 유대 역사의 반복, 죽은 아버지 숭배를 동물숭배 속에서 반복하는 토테미즘 등등. 이것은 모두 과거의 추억이 무의식 속에 보존되는 방식으로서 반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들뢰즈 역시 반복을 통한 우리 경험의 성립을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사의 모든 반복이 들뢰즈의 반복 개념 안에서 종합되고 있지요.

단지 철학자들만 반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복을 이야기하는 매우 풍부한 문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초대 손님 김경주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복의 문제가 그의 시의 중심에 있는데, 김경주 시에 관한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연습』의 한 구절을 읽어보지요.

반복을 통한 기쁨과 성숙의 문제를 우리 문학에서 찾자면,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반복에 관한 이런 구절을 시집에서 읽는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다시’ 보는 일, 곧 반복이 여기서 핵심을 이룬다. 이 반복의 경험과 관련해 시인 김경주는 이렇게 말한다. “제 시의 중요한 코드 중에 휘파람이 있는데요. 어린 시절 대중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신기했어요.……언젠가 타이의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취해 휘파람을 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오열할 것 같았어요.” 과거의 휘파람은 현재의 휘파람이나 바람 속에서 반복된다. 여기서 과거 시간에 뒤늦게(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것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반복인 것이다.(『철학연습』, 187-188쪽)

이런 반복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 경험을 성립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인지 오늘 저녁 우리는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생각입니다.


3. 반복의 다양한 경험들


반복에 대한 몇 가지 인용들과 함께 생각을 전개시켜 볼까 합니다. 문학작품들에서 반복을 다루는 제 글 「이미지와 시간」(『익명의 밤』, 민음사, 2010)에서 주로 발췌한 글들입니다. 문학 작품들이야 말로 사유가 공허한 허공을 디디고 내려앉지 않도록 단단히 한 걸음 한 걸음을 바닥에서부터 떠받쳐주는 사유의 디딤돌이지요.


1) 반복(또는 시간을 되찾기)에 대한 일반적 경험


반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경험을 들자면, 무엇보다도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놀이처럼, 물을 담은 도자기 찻잔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되지 않던 그 종이가, 물에 약간 닿는 것만으로도 곧 펴지고, 꼬부라지고, 물이 들고, 각기 형태가 달라져서, 꽃이나 집이나 사람 등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집 뜰에 있는 모든 꽃들, 스완씨의 집 뜰에 있는 꽃…… 성당과 콩브레 전체와 그 근교…… 이 모든 것들이 형태를 이루면서 나의 한 잔의 홍차 속에서 나왔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재미있게도 프루스트와 가장 거리가 멀게 보이는 작가인 사르트르에게서도 위와 같은 프루스트적 시간 찾기가 발견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봉봉 과자를 줄 때, 어떤 여인이 내 곁에서 매니큐어를 칠 할 때, 시골 호텔의 화장실에서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 야간열차의 천장에 매달린 보랏빛 전등을 볼 때, 나는 내 눈과 코와 혀에 이제는 사라진 당시 영화관의 불빛과 냄새를 되찾는 것이다.(사르트르, 『말』에서).


매우 지적인 독일 작가 제발트 역시 잃어버린 시절을 되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프루스트와 유사한 보도석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두 작가를 비교한 글인데, 제 책 『익명의 밤』에서의 인용입니다.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며 서로 중첩되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현재와 과거를 제발트는 노골적으로 프루스트적 코드를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포석 체험을 떠올리며 이 구절을 읽어보라. “블라슈스카와 네루도바 사이의 집들과 마당 사이로 난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한 걸음, 한 걸음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발밑에서 고르지 않은 보도석(步道石)을 느끼는 동안 언젠가 내 발 밑에서 이 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마비되었다가 이제야 다시 깨어나는 감각들을 통해 내게 기억이 열리는 것 같았어요.”(『아우스터리츠』에서) 제발트의 주인공은 프루스트의 화자와 똑같이 발에 부딪치는 포석의 감각 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중첩내지 종합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프루스트의 유명한 다음 구절을 위한 오마주라 할만하다. “몸의 균형을 다시 찾으려고, 먼저 번 것보다 좀 낮게 깔린 다른 포석에 한쪽 발을 딛는 순간, 지금까지의 실망은 나의 인생의 각 시기의 것과 똑같은 행복감 앞에서, 그러니까 발베크 부근을 마차로 산책했을 적에 내가 인식할 줄로 믿은 나무들의 전경이나, 마르탱빌르 종탑의 전경이나, 달인 물에 담근 마들렌 한 조각의 맛이나, 그 밖에 내가 얘기했던, 뱅퇴이유의 최후 작품에 종합되고 있는 것 같이 보인 다른 여러 감각들이 나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행복감 앞에서 사라졌다.”(『익명의 밤』, 136쪽)


2) 영화에서 반복과 지각


장-루이 세페르(Jean-Louis Schefer)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는 시간이 내게 하나의 지각으로서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 시간 자체가 어떻게 지각된다는 것일까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은 현재, 이전의 현재에 환원되지 않는 과거, 이제 오게 될 현재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란 없다.”(들뢰즈, 『이미지-시간』에서) 즉 과거의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현재적 지각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3) 사랑에서의 반복과 기원의 부재


여기 사랑에 대한 두 개의 놀라운 텍스트가 있습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입니다. 혹시 옛 사랑을 새로운 사람의 얼굴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이 두 텍스트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랑은 현재 속에서 과거의 인물의 반복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반복만이 있을 뿐 기원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역시 『익명의 밤』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에코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공명내지 종합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국면을 엿볼 수 있다. 에코의 소설은 모든 연애의 기원에 있는 사랑을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사랑했던 파올라나 시빌라 같은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사랑, 또는 그가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능케 했던, 현재와 공명하는 과거 자체를 그는 찾고자 한다. ‘과거 자체는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에코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파올라에서 시빌라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찾아 헤맸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로아나』에서) 여기서 화자는 ‘기원적 과거’의 비밀 바로 앞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 배후에서 그 이미지를 가능케 한 과거의 한 순간을 식별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자는 끝내 뭐라 말하는가? “나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로아나』에서) 현재 뒤에 숨겨진 과거를 그 자체로 정시할 수 있을까? 마치 현상의 배후에서 순수 과거로서의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의 바램처럼?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 그 자체로 직관 가능한 이데아와와 같은 진리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과거는 현재와의 공명 속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며 그 자체로의 과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서 회상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검게 변한 태양,’ 텅 빈 암흑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오랜 성찰 끝에 최종적으로 결론내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 자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발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자체가 있어야할 자리엔  검은 태양처럼 아무것도 없으며, 텅 빈 무가 있다. 이것이 알려주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는 두 항의 공명내지 종합을 통해 성취된다고 여러 번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과거의 항은 그 자체로 기원으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에코의 화자는 자신의 모든 사랑의 기원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거기엔 ‘무(無)’가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텍스트는 현재와 과거의 공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지, 기원적인 과거 자체의 사랑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미 토마스 만이 잘 보여준 바였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쇼사 부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유는 이 사랑의 배후에 과거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 회페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비난하고 싶은 기분으로 이 행실이 나쁜 부인을 보면서, 그녀를 보면 무언가가 연상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마의 산』에서) 그런데 한스 카스트로프는 쇼사의 배후에 있는―또는 배후에서 연상되는―회페를 사랑하였는가? 천만에! 그는 회페를 사랑하고 쇼샤 부인을 통해 이 사랑을 또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이란 한번이며, 현재와 과거가 종합되면서 그것은 가능해진다. 별개로서 현재와 과거 각각은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무일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로아나』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기원적인 사랑이란 없다는 것이다. 과거는 사후적으로 현재와의 공명 속에서만 사랑의 텍스트로 완성될 뿐이며, 결국 시간적 차원에서 이미지의 형성은 ‘기원의 부재’를 전제한다고 말해야 한다.(『익명의 밤』, 138-139쪽)


4) 반복과 무의식


마지막으로 반복은 무의식을 경유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늘 새로운 경험을 하는 듯이 여기는 것은 반복이 의식되지 않는 층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최동훈 감독의 영화 「전우치」(2009)가 이 점을 잘 알려줍니다.


삶이 반복되긴 하는데, 자리를 바꾸고 위장된 채로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는 예술 작품이 최동훈의 영화 「전우치」(2009)이다. 영화 전체가 위장된 반복의 문제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는데, 내레이션을 통해 위장된 반복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마성에 빠진 표운 대덕과 요괴들은 지상으로 쫓겨 와 인간의 몸속으로 숨어들었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 마지막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는 구절만큼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코기토에 대한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도 없으리라. 윤회 속에서 모든 것은 위장된 가면의 반복이며, 그 자체로 정체성이 확정된 주체란 없다.(『익명의 밤』, 143쪽)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기 의식’입니다. 자기에 대한 앎에서 성립하는 것이 이 의식이고 이것이 근대적 주체의 근본이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분열이 현대적 주체를 특징짓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반복’은 주체의 이 국면과 관계하고 있지요. 앞서 보았듯 반복은 무의식을 경유해 작동합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작동하는 반복이 주체의 새로운 자리를 가리켜 보이고 있군요……. 만일 ‘윤회’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반복의 개념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철학연습』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철학자 들뢰즈는 ‘윤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동일한 과거를 연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métempsychose)라 불리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은 자신이 연기할 소리의 높이와 톤, 그리고 아마도 가사까지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가사를 말하든 곡조(air)는 늘 같다.”(『차이와 반복』에서) 돼지가 철학자 속에, 범죄자가 성인 속에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일까요? 마치 윤회하듯? 김경주 시인의 시를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그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존재다. 전생에 음악이었지만 현세에 사람으로 다시 환생한다.”

늘 우리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만 우리의 현재를 지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는 완벽하게 새로운 이미지의 범람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잃겠지요. 이 말은 우리는 현재의 삶 안에서 늘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삶은 이런 반복 속에 표류합니다.



그리고 이날 강연 역시 음악이 함께 했습니다. 이아름님이 시작과 마무리를 맡아주셨습니다.

posted by Banbi Editor!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했던대로 5월 30일(월), 대치도서관에서 "얼굴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철학 연습> 강연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이라는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강의장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아쉽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강연회의 요약 원고를 소개해니다. 아이폰으로 동영상도 찍었는데요, 이것도 곧 공개하겠습니다. ^^

 


얼굴이란 무엇인가?

—『철학연습』의 한 가지 주제



『철학연습』(반비, 2011)은 현대 철학 이론들을 명료하게 보여주려하기도 하지만, 우리 일상적 삶의 평범한 요소들이 숨기고 있는 의미들을 찾아나서는 작업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책입니다. 우리 일상을 이루는 것들, 가령 돈이나 터치스크린이나 사랑 같은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철학연습』이 골똘히 생각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얼굴에 몰두하고 있습니까? 발전일로의 화장품 산업과 성형 열풍이 잘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얼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이런 몰두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가장 일상적인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 얼굴 안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까요?


1. 잉여적인 것?

피부가 벽을 씌우고 있습니다. 거기 기관들이, 그러니까 눈, 코, 입이 걸려있군요. 이 이상한 칠판을 얼굴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얼굴은 그저 피부와 보는 기관(눈), 말하는 기관(입), 냄새 맡는 기관(코)의 조합이 아닙니다. 얼굴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그 초과적인 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낱말을 골라 ‘영혼’이라고 불러 볼까요? 오늘 이야기는 결국 이 초과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2. 시선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만들다.

이 얼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신의 어렸을 때 체험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철학연습』에 쓰인 글을 읽어보죠.

어린 사르트르는 실수 때문에 동네 부인들에게 핀잔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 거울 앞으로 가서 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 찌푸린 얼굴을 회상해보건대 그것은 자기 방위의 구실을 했다. 벼락같은 수치심이 공격해오자 나는 근육을 방패삼아 자신을 지킨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찌푸린 얼굴은 내 불운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감으로써 도리어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이것이 거울을 통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타인이 부과한 의미대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만들며, 이런 의미에서 타인의 시선 앞에 사로잡히는 것은 제한받음이고 구속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의 진실, 나의 성격 그리고 나의 이름도 어른들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야말로 타인의 시선 앞에 나는 먹잇감처럼 주어져 있다. 이와 달리 거울에 몰두하는 행위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내가 규정되는 것을 피해 자신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규정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울놀이는 나를 마음대로 규정하려 드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철학연습』, 94-95쪽)


시선은 그것이 타인의 것이든 나 자신의 것이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여합니다. 시선은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규정하기 때문이지요. 위 글에서 어린 시절의 사르트르는 거울을 바라봅니다. 바로 타인의 시선이 나 나 자신을 규정하는 일을 피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규정하기 위해서지요. 바로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직시함으로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거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는 일, 자신의 얼굴을 반성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하는 일, 가령 ‘화장’ 같은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 자신의 참다운 얼굴을 찾는 일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자기기만’일까요? 이런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얼굴은 얼마나 독창적인 원본인가 하는 것 말이지요.


우리의 헤어스타일, 화장하는 방식, 기분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정 등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다른 얼굴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다른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듯 우리는 남의 표정과 스타일을 복사한다. 이렇게 다른 것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얼굴을 꾸미고 살아가는 형태는 오늘날 성형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생기를 얻고 있다. 성형을 하는 이는 아바타를 구매하듯 상점에 놓인 얼굴을 구매한다. 또는 멋진 그림 하나를 자기 얼굴 위에 베껴 그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인생이라 해야 하는가?(『철학연습』, 251쪽)


어쩌면 원본 없는 인용의 시작도 끝도 없는 나열이 우리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의 인용에서 다른 인용으로, 하나의 표정에서 다른 표정으로 끝없이 이동하는 방랑의 결과일 테고요…….


3. 관상술

얼굴은 또한 미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얼굴이 마치 숨겨진 지도나 되는 듯 사람들은 얼굴 속에서 운명의 길들을 읽어내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바로 관상술 말입니다. 가령 이런 관상보기의 예가 있습니다. 『철학연습』에서 읽어보겠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로 성공을 거두었던 소설 가운데, 정비석의 『손자병법』이 있다. 춘추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월나라 구천(勾踐)이 20년 가까이 쓰디쓴 쓸개 맛을 보며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복수를 준비한 후 마침내 책략가 범려(范蠡)의 도움으로 승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승리를 얻은 구천이 그간 도움을 준 범려를 소홀히 하자 그는 이렇게 구천의 관상을 본다. “범려는 관상학적 견지에서 구천의 얼굴을 새삼스러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심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구천은 목이 길게 패어 있는데다가 입은 새 주둥이처럼 삐죽 나와 있는 ‘장경조훼형(長頸鳥喙型)’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상학으로는,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 같이 생긴 사람은 ‘환난(患難)은 같이할 수 있어도, 환락(歡樂)은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전해 오지 않던가.” 그 길로 범려는 구천에게서 도망칠 마음을 먹는다. 소설이 기록하고 있는 이 관상보기는 정사(正史)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를 ‘이성을 통해 확정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이 종종 관상보기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잘 예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관상학은 일종의, 외적 징후를 통해 사람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다.(『철학연습』, 304쪽)


사람들은 왜 관상 같은, 일종의 미신에 매달릴까요? 아마도 알 수 없는 운명이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천을 통해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할 지점에서 우리는 멈칫거리며 관상술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헤겔은 관상술에 탐닉하는 사람을 이렇게 혹독하게 대합니다.


누군가 당신 관상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치자. “자네는 정직한 사람인 양 처신은 하지만 사실은 억지로 그러는 척할 뿐, 본심은 악한(惡漢)이라는 것이 자네 얼굴에 드러나 있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행동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적어도 사나이답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장에 세상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의 따귀를 후려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응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밖에 없으니, 참으로 이렇게 대응하는 것만이 ‘인간의 현실성은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을 학문의 으뜸가는 전제로 내세우는 데 대한 반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철학연습』, 305-306쪽)


우리는 오늘 관상술 같은, 지식의 외관을 쓴 미신과 이 미신을 신봉하게끔 하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운명과 실천 등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4. 얼굴을 통해 무한자와 만난다?

앞에서 우리는 얼굴이란 잉여적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눈의 생김새, 눈의 기능, 입이나 코의 조형성과 기능 등등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얼굴입니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늘 ‘초과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이론이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다 한정하지 못하는, 무한한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얼굴의 무한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철학연습』에서는 얼굴의 이 무한성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래 한 구절 읽어 보겠습니다.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l'épiphanie)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다. 또 타자를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타자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이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 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주인처럼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도 나에게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에게 명령하는 타자의 얼굴이란, 형이상학의 대상, 규정 불능의 무한자, 곧 신의 흔적과도 같다. 신은 바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철학연습』, 128쪽)


이번 강연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머리에 씌워진 두건, 얼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강연회 마치고 질답 시간. 하나라도 더 질문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카페 숨도에서의 강연회도 기대되네요. ^^

 강연회 1부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화) PM 7:30 정독 도서관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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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연습> 출간 기념 릴레이 강연회

- 강연회 1부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화) PM 7:30 정독 도서관 => 강연회 후기 보기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위 강연 시간표는 예전 포스팅과 같은 것 또 올린 것 맞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공지된 강연 외에 숨겨진 <철학 연습> 강연회가 한 번 더 있습니다. 반비 블로그는 물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도 아직 공개하지 않았던 강연! 그것은 바로 대치도서관 강연!

5/30(월) AM 10:30 대치도서관 문화교양관 (강남구 대치동 316번지 은마아파트 복지상가 2층)
 

강연 시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강연이라, 참석이 어려우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혹시가능하신 분이 계시면 강연회에 와 주세요. ^^ (이 강연회는 게스트 없이 서동욱 교수님의 강연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회 강연회 때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강연회에 오신 분들께는 예쁜 '반비 노트'를 드립니다! 물론공지된 2, 3회 강연회 뿐만 아니라 대치도서관 강연에 참석하신 분들께도 드립니다. 

1회 때 여분을 챙겨갔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신청해 주셨던 분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늦게 오신 분 중엔 못 받으신 분들도 계셨던 것 같은데요, 이번엔 충분한 수량 챙겨가겠습니다. ^^















posted by Banbi Editor!


5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 정독 도서관. <철학 연습> 출간 기념 릴레이 강연회! 그 첫 번째 시간, "호흡하는 존재"란 주제로 음악과 시와 철학이 있는 강연이 있었습니다.



좌측부터 사회와 시 낭송을 맡아주신 김지녀 시인, 오늘의 강연자 서동욱 교수, 음악을 들려주실 최고은 가수입니다. 강연 시작 전 세팅을 하고 계시네요. 동영상을 올리지 못 해서 아쉽지만, 강연은 최고은님의 아름다운 노래로 시작되었습니다. 철학 강연이 왜 노래로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의 주제 '호흡'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



강연의 시작을 알리는 김지녀 시인. 강연회 진행하시는데 사회 전문으로 보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 매끄럽게 강연이 진행되도록 해주셨네요.

시인과 가수를 모시고 강연을 시작하며, 서동욱 선생님은 "노래와 시가 금과 은이라면, 그냥 강연은 구리 정도에 지나지 않을까."라며 살짝 엄살을 부리셨는데요, 이 말에 김지녀 시인이 "강연이 끝날 때 즈음이면 어떻게 구리가 빛날 수 있을지 서동욱 선생님이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셨지요. ^^


잘 아시다시피<철학 연습>은 책으로 엮어 나오기 전,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가 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서동욱 선생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자리에서 철학적 개념들을 함께 시험해 보고 얘기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지식을 간단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깎고 단순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이 살아남는 문제"였다고 하셨습니다. 




<철학 연습>의 의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이제 김지녀 시인이 <철학 연습>을 낭독합니다. 

“삶은 거친 것이며 의혹투성이다. 인간은 온 힘으로 이 바위를 밀고 나간다. 힘겨운 전진을 하는 이에겐 두 가지 힘 밖에 없는데, 바로 생각하는 힘과 생각한 것을 실천하는 힘이다. 갈대에 걸린 바람이 울 듯 인간은 세상의 기운과 대기가 이동하는 길목에 서서 생각을 하고 소리를 낸다. 기술과 근육과 말로, 그러니까 망치와 노동과 발언으로 생각한 것이 울려 퍼지게 만든다.

이렇게 생각과 생각의 실현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면, 철학은 이미 인생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다만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 듯 생각 역시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의 잠을 깨우려고 한다.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우리는 혹시 이런 머릿속의 악마들과 더불어 한 평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는 것은 아닌가? 무엇이든 해보라고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삶인데!”

―『철학연습』, 7쪽



『철학연습』에는 우리와 같은 시대 속에서 살며 우리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많은 철학 이론들과 개념들이 출현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아마도 ‘타자’ 개념이겠지요.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이질적인 것’ 말이지요. 내가 아닌 것, 그러므로 내가 지배할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나의 삶에 개입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저녁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에 수시로 개입하는 이 이질적인 것, 타자성(alterité)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삶에 개입하는 이 이질적인 것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오늘 강연에서는 ‘숨결’의 문제와 더불어 이 이질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숨을 쉽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신체가 체온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듯 모든 생명에게 예외 없는 이 사실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지요. 철학은 늘 이런 당연한 일 속에서 경이를 발견합니다.
 


숨 쉬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는 일보다 중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생각하고 일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는 ‘숨을 쉬는 것’입니다. 흔히 뇌사자에게서 보듯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없는 호흡은 가능하지만, 숨 쉬는 생명이 아닌 코기토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지요. 코기토보다 숨 쉬는 일이 먼저이며, 주체는 근본적으로 숨 쉬는 자, 바로 ‘허파 주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혼을 뜻하는 프시케(psyche)라는 말은 ‘숨 쉬다’라는 뜻을 가진 프시코(psycho)에서 유래했고, 우리가 영혼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라틴어의 스피리투스나 아니마 역시 모두 바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뤼아가 바람을 뜻하는 것처럼 말이죠. 영혼이라는 것은 이렇게 숨을 쉬는 활동이라는, 생명의 대사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런 뜻에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실체의 밑바닥에서 허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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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이런 숨결을 둘러싼 문제들과 더불어 현대 철학의 중요한 생각거리, ‘이타성’에 대해 물음을 던질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김지녀 시인도 나와 있고, 최고은 가수도 있습니다. 시인과 가수야 말로 숨결 속에서 말을 빚어내는 이들, 숨결의 비밀에 가닿는 이들입니다. 철학과 시와 노래가 그야말로 숨결을 ‘연습’하게 될 것입니다.




김지녀 시인의 시 낭송도 있었습니다.

김지녀

나의 흉곽은 부서지기 쉬운 벽이다

나에게 가득 차 있는 공기는 만연체의 문장들처럼 닫히지 않고

막다른 골목에서, 수만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기침은 밤을 붙잡고 빛을 끌어당기면서

눈을 감는 것


어둠을 펼쳐 놓은 두 날개에게

무늬는 되나올 수 없는 미로다


바깥으로부터 당신이 공기를 밀고 들어올 때

결말을 모르는 말들 속에서 나는 쉼표를 찾고

날개를 폈다 접는다

당신의 공기가 나의 내부로 들어와 있음을 느끼지만


바깥으로부터 당신이 공기를 거두어갈 때

이미 시작된 죽음에서, 죽음 쪽으로 나는 취해가는 것이다

나의 벽은 갈라져 무너지고 있지만


가장 길게 누워 나는 제목 없이도 거의 완성되고 있다

바깥으로부터 당신이 공기를 밀고 들어올 때

나는 나를 되돌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시면서 <철학 연습>의 구절을 인용하시기도 했지요.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차이의 이념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확인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의 차이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는 점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차이의 이념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확인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의 차이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는 점 말이다. 차이가 먼저 존중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차이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타자의 차이성에 대한 존중은 어떤 모습을 지닐까? 도대체 차이에 대한 존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타자가 지닌 가치, 나와는 다른 그의 입장 자체를 존경한다는 뜻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결국 차이에 대한 이 존중이란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연습』, 246쪽




디어 강연을 마치고 질문과 답변 시간. 늦은 시간까지 열강에 동참하셨던 분들답게 질문 시간도 뜨거웠답니다. 질문 시간에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라는 개념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질문을 주셨네요. 
 


질답 시간까지 모두 마치고 기다리던 사인 시간입니다. ^^ 책 나올 시점에 벨기에에 가셨기 때문에 저도 이날 서동욱 선생님의 사인을 받았답니다. 


아무쪼록 철학에 관심은 있지만, 철학이 너무 어려워만 보이는 분들께, 철학이 별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것임을, 생각의 '연습'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는, 더 자극받는 자리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강연회에 참석 못해 아쉬웠던 분들! 아직 두 번의 강연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인터넷 서점벤트 페이지에서 신청해 주세요!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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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anbi Editor!
  • Favicon of http://twitter.com/s1246 BlogIcon 잔디 2011.05.26 15:00

    가지 못했던게 무척이나 아쉬웠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남은 두 번의강연회 중 한 번 정도는 꼭 가고싶은데.. 이벤트를 노려봐야겠네요ㅎㅎ 포스팅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s://banbi.tistory.com BlogIcon Banbi Editor! 2011.05.27 09:57 신고

      무척 즐거운 강연이었답니다. 아쉽지만, 다음 강연회 때 와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