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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반비의 스포일러

후설 문서 보관소에 대하여

- 벨기에 루뱅의 후설 문서보관소 -

<철학 연습>의 저자 서동욱 교수님은 현재 벨기에 루뱅에 계시답니다. 먼저 스피노자 동상 앞에서 찍은 동영상 인터뷰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편집부에서 독자분들을 대신해서 보낸 질문에 동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시면서, 이렇게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신답니다. 이번에는 이 후설 문서보관서 앞에서 동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셨는데요, 동영상을 올리기 전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 먼저 서동욱 교수님의 글로 만나보시죠. :-)



서동욱

루뱅에는 어떤 감동이 있는가? 루뱅과 관련해 처음 나를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후설문서보관소였다. 그 기관은 철학적인 관심을 넘어서, 유럽현대사의 한 극적인 단면과 학문에 대한 보편적 열정의 상징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상학의 창시자인 독일 철학자 후설은 유대인이었는데, 그는 속기로 글을 써가면서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다. 그래서 1938년 후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약 45천 장의 속기원고와 1만 장의 타이프 원고가 남았다.
 



그리고 이내 그 방대한 문서들 전체가 유럽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기억가운데 하나인 유대인 저서 말살운동으로 불살라질 위험에 처했다. 당시 루뱅 대학의 철학도인 반 브레다 신부가 나섰다. 그는 유족들을 설득한 후 루뱅 대학 당국과 협의해서 나치의 눈길을 피해 후설의 유고 전부와 그의 서재 전체를 대학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이 진귀한 이삿짐을 실은 기나긴 열차의 행렬이 벨기에의 북쪽 도시로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루뱅에 후설문서보관소가 들어서게 된다.

분서갱유의 위험에 처한 철학의 보물, 이를 구하고자 하는 학자의 열렬한 마음, 순수 학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보호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대학이 등장하는 이 문서보관소 설립의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며 어딘가 아름다운 신화를 닮은 구석이 있다고 젊은 시절에 생각했다. 신화가 한 민족의 마음의 거울이라면, 저 이야기는 유럽인의 마음의 모든 것, 즉 전쟁과 민족 증오와 학문에 대한 고매한 취향 전부를 한꺼번에 비추어주는 신화였다. 그리고 신화의 중심에 유럽 정신을 표현하는 이 오래된 대학이 있었다. 인간의 역사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남아있던 세계 유일의 아이스킬로스 희곡 전집을 불사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유대인의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도서관을 세우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루뱅은 순수 학문의 빛나는 성좌로 오르는 하늘의 사다리처럼 한 젊은 연구자의 마음 안에 들어섰다.

문서보관소 설립 이후 메를로퐁티, 데리다를 비롯한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루뱅에 와서 이 문서들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며, 이제까지 루뱅은 현대 유럽 철학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장소로 자리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