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비의 책

논객시대 :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논객시대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청년 논객 노정태가 다시 읽은 진보 논객들,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시대


그러나 나는 ‘논객들의 시대’를 ‘나의 시대’와 날카롭게 대립시킬 생각이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들처럼, 나 역시 그들의 글을 읽으며 머리가 굵어졌고, 이 논객들의 영향력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나와 다른 독자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다른 이들 또한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논객시대’는 곧 나의 시대이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시대이다.(25쪽)




1.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1990~2000년대 인문사회 담론의 총정리, 혹은 비판적 성찰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은 대한민국 역사상 문화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로 회고된다. 물론 이 과장된 수사는 노스탤지어를 자극해 문화적으로 구매력 있는 마지막 세대의 소비를 최대화하려는, 불황의 늪에 빠진 각종 업계의 몸부림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가령 가장 열악한 문화 업종 중 하나인 출판을 보자. 이 시기는 특히 인문사회 출판계의 전성기로 꼽힌다. 진중권, 김어준, 유시민, 박노자, 한홍구, 강준만, 홍세화 등 이 시기에 인문사회 필자로 알려진 이들은 십만 부 단위 베스트셀러 필자들이기도 하다.

  또 1988년 ‘직배’가 풀리고, 1995년 『키노』와 『씨네21』이 창간되고,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되고, 1998년 일본 문화까지 개방되면서, 영화산업 역시 이 시기에 1960년대를 능가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1990년대 PC통신에서 영화평을 주고받던 사람들과 유사하게 음악평을 주고받던 사람들 역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고정 향유층을 거느린 창작 집단과 비평 집단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의 문화적 역량을 재평가하고 회고하는 서술들이 기사의 형태로, 논문이나 책의 형태로, 혹은 문화상품의 형태로 쏟아져나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아니 오히려 더 다양한 관점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도록 장려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큰 줄기는 1990~2000년대의 회고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재현들과 달리,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낭만적으로 회고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책의 성격을 ‘총정리’라고 (부제에서) 설명하긴 했지만 오히려 비판적 성찰에 가깝다. 대중들이 다양한 인문, 사회 담론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던 그때를 회고하기는 하지만, 그때의 어떤 논리들과 방법들과 선택들이 오늘의 상황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의도, 효과, 부작용, 가능성)에 천착하는 책이다.

  물론 이미 이런 문제의식에서 ‘민주화’ 이후 혹은 신자유주의 이후를 성찰하는 작업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특히 사회과학의 시대가 저물던 무렵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준 논객들을 통해 이 시기 이후의 변화를 정리해본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논객시대의 ‘벽지’에 비유된 강준만, ‘잉여’ 청년들의 감수성을 건드려 ‘횽’ 소리를 듣는 유일한 논객이 된 진중권부터 지식소매상이라는 완벽한 명함으로 정치도매상을 겸해온 유시민, 터무니없을 정도의 해박함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는 급진 불교도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대중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박노자,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2000년대 중후반을 뒤흔들며 논객시대의 막차에 올라탄 우석훈, 중간계급 지식인의 죄책감을 타깃으로 해왔으나 목표물이 흐려지자 미궁에 빠진 김규항,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와 음모론적 정치 선동가라는 두 개의 얼굴로 대중의 (성찰 없는) ‘열광’을 이끌어낸 김어준, 남민전 투사의 이미지를 벗고 친절한 ‘빠리'의 안내자를 자처했으나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 빠져버린 홍세화, 기자-소설가-언어학자라는 세 겹의 정체성을 균형 잡히게 이끌어오다 절필을 선언하고 트위터리안 JS로 거듭난 고종석까지. 숲(의 변화)을 보려면 숲 속에 서서 나무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건너편 들판에서 쳐다봐야 한다는 통념에 반대하며 이 책은 변화의 한복판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짚어가며 숲의 새로운 형상을 또렷이 그려낸다.


본인의 ‘풍자문학’이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이라고 스스로를 조롱했던 이가, 15년이 지난 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글을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소개한다. 전자는 ‘놀이’로 포스트모던’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일’로 ‘포스트모던’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글을 모아서 책을 내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의 진중권은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라고 절규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잡문’을 하나씩 흩뿌린 후 ‘별자리’를만들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을 설득하고 있다.(93쪽)


2010년부터, 즉 2012년 대선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던 시점부터 강준만이 쓴 정치적 텍스트는, 거의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10여 년 전에 썼던 글과 거칠게 충돌한다. 마치 무기 상인이 평화운동가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다.(…) 가령 우리는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에서 박찬종을 비판할 때 썼던 논리를 고스란히 안철수를 향해 휘두룰 수 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혐오를 인기의 동력으로 삼는다고,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동경심에 바탕을 두고 포퓰리즘 정치를 수행한다고 기타 등등. 강준만이 박찬종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낸 화법은 거의 어김없이 안철수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물론 강준만은 “알고리듬으로 놓고 보자면, 안철수 현상은 한국형 포퓰리즘의 업보였지만, 콘텐츠로 놓고 보자면, 한국형 포퓰리즘의 원인이 된 증오 상업주의의 전면 타파”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박찬종 역시 알고리듬으로 보자면 양김 시대의 업보였지만 콘텐츠로 보자면 양김 시대의 전면 타파였다.(60쪽)


유시민은, 그렇게 만든 열린우리당마저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뀌고, 대통합민주신당이 통합민주당으로 변하고, 통합민주당이 다시 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2009년이 돼서야 “개혁당의 정신을 열린우리당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시도는 실패했으며, 그 원인이 오판에 있든, 능력부족에 있든, 실패의 가장 큰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며 때늦은 사과의 말을 남겼다. 고양 덕양갑에서 개혁국민정당 깃발 아래 당원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에 힘입어 재보선 국회의원이 된 지 약 6년 만의 일이었다.(109쪽)


월드컵에서 황우석으로 이어지는 김어준의, 말하자면 ‘흑역사’를 그의 단행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형태로 ‘은폐’돼 있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거야말로 의미심장한 일이며,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에 들린 단행본을 열쇠 삼아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고, 김어준이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나머지 반쪽의 자아를 확인했으며, 더불어 그가 살아온 시대의 밑그림을 얻었다.(234쪽)




2. 대중 인문학의 시대, 멘토의 시대에 공론장의 변화를 고민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사회참여형 지식인들 중 빅네임이라 할 만한 개인들의 역사를 탐색하며 그들을 사후적으로 평가하고 비난하는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논객들이 주요한 사안들을 놓고 어떻게 대립하거나 협력했는지를 다룸으로써, 1990년대 이후의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사건들(그리고 그에 대한 논쟁들)의 지도를 그려보는 기능도 담고 있다. 가령 김대중 정권의 탄생,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월드컵, 이라크 파병, 황우석 사태, 디 워 논란부터 옥석논쟁,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 논쟁, 월장 사태, 영어공용화론 등의 소소하지만 중요한 논쟁들까지가 촘촘히 호명되는 것이다. 또 ‘대중’들이(‘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고, 어떤 열망이 그들을 만들어냈는지 역시 놓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미덕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동시에 정권이 교체되었다. 1997년은 그런 면에서 한국 현대사의 한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경제 차원에서 분석해본다면 1997년의 외환위기는 그해 태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면서 벌어진 아시아 금융위기의 연장선에서, 정부의 보증을 받아 무리하게 단기 외화를 차입해 공격적인 경영을 하던 기업들이 순식간에 지급 불능 상태에 빠져 결국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당시를 살아가던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이는 제2의 을사조약이요, 경제 주권 침탈이며, 잿더미 속에서 일으켜 세운 나라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나머지 빚더미 위에 나앉게 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68쪽)


  사실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는 ‘안티조선’ 운동, 혹은 언론개혁 운동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기존언론에 대한 지식인과 시민의 불신과 불만과 비판이 매체 환경의 변화와 어떻게 마주쳐서 정치사회적 논의의 형식과 내용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또 그것이 거꾸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


실명비판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오늘날의 대중들이 김구라처럼 ‘독설’을 내뱉는 연예인에게 환호하는 세태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강준만의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명비판은 어쨌든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 즉 주체와 객체를 개인 단위에서 명료하게 드러냈다.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근대 세계의 문이 열린 것이다.(37쪽)


언론개혁운동, 혹은 ‘안티조선’이라는 쇠는, 이미 강준만이라는 대장장이의 생각보다 훨씬 뜨거워졌다. 반면 강준만이 “처음에 구상했던 그 방식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기 구독자 10만 이상을 목표로 했던 잡지는 1만을 넘어서더니 그 이후론 계속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강준만의 상각과 달리, 인쇄매체가 아니라 인터넷에 뿌리를 둔 정치운동, 선거운동, 언론 소비자 운동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시민사회에서 진행되던 언론운동은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과 서서히 한몸이 되어갔다. 이에 대한 강준만의 입장은 양면적이었다.(46쪽)


정치적 목적으로 콘텐츠를 쏟아내기 위해 자신만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만들어냈던 강준만은, 국가정보원이 출판사가 아니라 ‘일간베스트’나 ‘오늘의 유머’를 관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MBC에서 30년을 근무한 손석희도 종편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진중권은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진보도 상업주의적일 수 있지 않느냐’고 따져묻던 강준만의 근작 『증오 상업주의』는 2010년도 전북대학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출간되었다.(62쪽)


그러므로 『디 워』 논란을 다룬 각도에서 보자면 이러하다. 어떤 이론가가 주창한 방안을 진작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던 한 창작자가 있다. 그런데 이론가는 창작자의 결과물을 보고 진저리를 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마법소녀의 주문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한 매력이 있다고 느낀 대중들은 이론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론가는 기존 독자층을 벗어나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을 ‘횽’이라고 부르는 팬 집단을 거느리게 된다.(84쪽)


  정통적인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고리타분하고 위선적인 언어를 고발하고 비판하며 시작된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대중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구체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며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회 참여형 지식인들을 대거 데뷔시킨 후, ‘횽’이라 부르며 따르는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닥치고’라며 지령을 내리거나, 심지어 그들을 힐링해주는 스타 지식인들 몇몇을 남기고는 공론장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졌다.


강준만은 활자 매체를 읽고 인용해서 비슷한 종류의 매체를 통해 타인들을 호명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하는 주체들이 대량생산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담기는 내용은 전근대적이거나 탈근대적이었다. 조선 말부터 이어지는 기득권 세력을 표상하는 하나의 언론사, 이에 맞서는 한 사람의 영웅, 영웅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나. 전근대적 자기 동일시는 탈근대적인 매체인 인터넷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네티즌들은 강준만이 김대중을 위해 만들어낸 다음 노무현을 위해 갈고닦은 논리를 무한 증식했다.(61쪽)


  김어준의 『딴지일보』와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유시민의 『100분토론』, 김규항의 블로그, 진중권의 민노당 게시판, 고종석의 트위터. 이 책에서 다루는 논객들은 우연찮게도 각자 다양한 매체를 구사하고 활용하거나 심지어 만들어내기까지 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정리’하는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책들에 의거’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10년 후 쯤 우리가 어디에 서있을지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은 정치인들이 직접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의견을 올리고, 그것을 기자들이 기사화하고, 논란이 생기면 다시 SNS를 통해 해명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당시만 해도 사정이 전혀 달랐다. 당시는 종이 신문의 전성기였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대항마로 인터넷이 겨우 거론되던 시점이었다. 하여 우리의 논객들은 신문이나 잡지의 지면에 칼럼을 쓰거나, 어떤 언론에서도 받아주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스스로 매체를 창간하거나, 아주 빨리 단행본을 써서 펴내는 방식 등으로 대응했다.

당시 만들어진 웹진이나 인터넷 사이트 가운데 오늘날에도 접속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책은 다르다. 내 책꽂이에서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있고, 도서관의 서가에 꽃혀 무심히 흐르는 세월을 지켜보는 책도 있다. 여전히 책은 과거로 돌아가는 데 가장 빠르고 믿음직한 타임머신이다. 하여 나는 한 꼭지, 한 꼭지를 쓸 때마다 서울 시내 공립도서관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엇다. 최선을 다해, 논객들이 쓴 책을 모두 구해, 전부 다시 읽어낸 결과 『논객시대』 한 권이 나온 셈이다.(10쪽)


생계를 위해 고종석은 글쓰기 강좌를 하기도 했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그만두겠다고 했지, 아예 입도 벙긋하지 않고 살겠다고 한 것은 아니므로, 트위터를 통해서건 다른 경로를 이용해서건 계속 무언가를 말할 테고 우리는 들을 것이다. 한 시대를 가장 치열하면서도 단정하게 돌파해온 문인이, 이전까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혼탁한 언어의 늪에 서 스스로를 감염시키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어차피 돌아가야 할 이상향 따윈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비비고 섞이고 흔들리고 뒤집히고 씹어 먹히고 내뱉어지는 온갖 지저분한 삶과 언어의 현장속에서만 새로운 변종이 탄생할 테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한 줌의 말들 속으로 뛰어드는 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일도 없음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얕은 뻘밭에서 뒹굴다 지칠 때면 종종 「아내」 같은 글을 꺼내 읽는 나와 여러분들처럼, 2013년의 고종석 또한 어느 시절의 고종석으로부터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291쪽)




3. 20대 문제, 청년 문제, 세대론이 가리키는 진짜 문제


  이야기가 시작되는 1990년대 중반 저자는 『인물과 사상』을 처음 접하고 불만이 많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중학생이었다. 저자는 2000년대 중반 『88만원 세대』가 불러일으킨 세대논쟁, 혹은 20대 문제라는 이슈를 통해 발언 기회를 얻은, 이른바 ‘청년 논객'이다.


필자를 포함해, 2007년 이후 ‘20대 논객’으로 새삼스럽게 호명되며 매체의 지면을 얻고 언론에 오르내린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우석훈의 ‘세대 간 경쟁’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은 논외로 하고, 당시 나는 ‘우석훈의 말에는 일리가 있지만 그가 말하는 20대는 20대 대졸자에 국한되는 듯하다. 또한 『88만원 세대』가 현재 대학을 다니는 고학력 엘리트들의 자기연민을 위한 논리로 이용되는 것은 보기 흉한 일이다.’라는 주장을 즐겨 퍼뜨리고 있었다.(166쪽)


  이 책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서문은 김윤식의 작업 『이광수와 그의 시대』(와 저자가 그의 프리퀄이라 부르는 『내가 읽고 만난 일본』)를 다룬다. 그것은 김윤식의 입장에서 제대로 도래하지도 않은 근대와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중의 모순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1970년대라는 자신들의 시대를 세우기 위해 1930년대와 단절하기. 이것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뿐 아니라 모든 보편적인 세대론에서 등장하는 ‘단절의 의지’이다.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기 위해 아버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 하지만 소위 ‘청년 논객’인 저자는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좀더 현실적이고도 영리하게 조정한다.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논객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청년 논객은 그들을 타자화하거나 그들과 단절하거나 그들을 (부친)살해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히려 그들에게 받은 영향, 그들에게 품었던 기대, 그들에게 투사한 욕망, 그들 안의 우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작업에 가깝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2000년대 중반 크게 화제가 되었던 ‘88만원세대’의 세대론이 여타의 세대론(가령 4.19세대, 386세대)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을 더 섬세하게 짚어낸다.


『논객시대』는 내 이름을 걸고 혼자 써서 펴내는 첫 번째 단행본이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나의 20대를 바라보며 쓴 책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인 아홉 명의 진보 논객들이야말로 가장 큰 감사 인사를 받으셔야 할 분들이다. 10여 년 전 그들의 책을 읽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으며, 다시 한 번 그들의 책을 읽었기에 『논객시대』가 나올 수 있었다.(12쪽)


  20대(80년대생) 문제라고 언급된 것은 실상 외환위기 이후 하나둘 허물어져간 표준적 삶의 모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기존 정당이나 노동운동 조직은 와해되고, 삶 전체가 불안정해진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독자의 문제, 매체의 문제가 되어 우리 앞에 던져진다.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 캐릭터가 김어준을 ‘쿨’한 존재로 만들어줬다면, 음모론적 정치 선동가의 캐릭터는 그를 ‘핫’하게 만들었다. 얼핏보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입장이 한 사람의 몸에, 모종의 담론적 굴절을 통해 안착해 있다. 그 둘을 떼어내기란 불가능하다. 개인주의자보다 정치 선동가가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적 팬덤이 훨씬 더 크지만, 정치 선동가가 삐끗할 때면 언제나 개인주의자가 구원투수로 나서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두 원리로 작동하는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열광의 정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파시즘의 이상향으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238쪽)


김어준이 말하고 실현하는, ‘인생은 비정규직’이기에 오는 자유는, 그의 자유를 동경하는 수십만 비정규직 청취자들의 비자발적 자유가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이 간극과 양면성이야말로, 늑대소년이 피시방에 앉아 이번 시즌 아르마니 수트를 검색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 하지 않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자체다.(239쪽)



차례


1. 강준만 |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다

2. 진중권 |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3. 유시민 | 돌아온 지식소매상, 부도 난 정치도매상

4. 박노자 | 어디에도 없는 남자

5. 우석훈 | 청년들에겐 꼰대, 386에겐 광대

6. 김규항 | 예수·건달·지식인

7. 김어준 | 늑대소년은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보았나

8. 홍세화 | 혁명 투사가 된 ‘빠리의 택시운전사’

9. 고종석 | JS를 이해하기 위하여


지은이 노정태

자유기고가이자 번역가이다.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터넷 매체 《딴지일보》의 온라인 에디터를 거쳐, TV 드라마 및 대중문화 전문지 《드라마틱》에서 기자로 근무했고, 시사·정치 전문지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무엇이 정의인가』 『싸우는 인문학』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아웃라이어』 『마이크로스타일』 『진보의 몰락』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등이 있다. 2014년 현재 비정기 문화 잡지 《도미노》의 편집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인터넷 서점 링크

 예스24 가기

 교보문고 가기

 알라딘 가기

 인터파크 가기

 도서11번가 가기

 반디앤루니스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