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주제: 늙음
인트로덕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2010)
(원서: The Thing About Life Is That One Day You'll Be Dead, Vintage Books, 2009)
얼마 전부터 나는 노화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몸의 변화와 함께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천 년 만 년 계속될 것 같았던 강철 같은 체력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이가 들도록 재생산을 하지 않은 것에 복잡한 심경이 된다.
20대에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마치 도서관에 앉아서 내 삶과 무관한 책을 읽을 때처럼 여유로웠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였다. 물론 아직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약간의 허영과 안도가 섞여든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노년’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고 있다.
늙는다는 것은 죽음보다는 덜 드러나지만 그만큼 중요한 주제다. 특히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죽음을 지연시키는 다양한 기술들이 이전보다 발달해서 우리가 이 과정을 좀더 오래 자세히 지켜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을 관찰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젊음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음은 오늘날 가장 매혹적인 상품이 되었고, 물신화되었다.
50대의 교양 있는 영문학자가 쓴 이 노년과 노화에 관한 에세이는 사실 문학자의 글치고는 일종의 과학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가령 이런 대목.
“폐경, 일반적으로 45세에서 50세 사이에 벌어지는 이 사건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여기에는 진화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있다. 50세가 되면 여성은 노화의 악영향을 여러 가지 경험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그녀가 직접 아기 낳기를 그만두고 대신 자녀를 돌보면서 손주 키우는 일을 돕는다면 후세에 대한 유전적 기여를 극대화하는 것이다.”(159쪽)
이전 같았으면 이런 서술에 섞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지적하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언설에 숨은 정치적 경향을 읽어내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별로 내키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팩트 자체에 대한 관심이 그 태도에 대한 관심을 넘어섰다고 해야 할까. 과학주의는 위험하다. 자연이 늘 옳고 경험이 늘 옳다는 태도만큼이나 유혹적이고 또 그만큼이나 위험하다. 논리적으로 입증되는 것이 진리라는 생각, 또 효율적인 것이 선하다는 생각, 자연의 법칙이 진리이자 선하다는 생각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경도되어서는 안 되는 생각들이다. 특히 유행하는 모든 것은 위험하다는 점에서, 최근 인문학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과학주의는 위험하다. 하지만 과학적인 해석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나 서술은 얼마나 더 빈약해질 것인가.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훌륭한 에세이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감정, 경험(특히 저자가 정리해주는 여러 객관적인 정보들과 상충하는, 97세 아버지의 육체와 정신과 정서가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가 주워 모은 여러 과학적 지식과 정보들, 문학적 기록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여러 선배들이 그에 대해 고민한 내용들이 골고루 들어가 있다. ‘노년’을 주제로 하는 한 한기 공부 과정에서 ‘인트로덕션’의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사람이 어째서 지금과 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있다. 노화가 유전적으로 통제된다는 이론, 노화 속도는 종마다 제게 유리하도록 발달해왔다는 이론, 엔트로피 생성 인자가 세포를 망친다는 이론, (……) DNA 전사 과정에 생기는 오류가 유전적 이상으로 이어져서 죽음을 앞당긴다는 이론. 그러나 반론 없는 이론이 하나도 없고, 우리가 왜 늙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29쪽)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경은 말했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 감동적이고, 고무적인 업적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 (……) 드가는 말했다. ‘25세에는 누구나 재능이 있다. 50세에도 재능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위안이 필요하다면 지식적인 면을 생각하자. 어휘력은 20세일 때보다 45세일 때 3배 풍성하다. 60세의 뇌는 20세 때보다 정보를 4배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136~137쪽)
“미국의 코미디언 겸 배우 제리 사인펠트는 아버지가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아기들이 태어난 목적을 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기들은 우리를 대체하려고 왔다. 아기들은 귀엽고, 안아주고 싶고, 달콤하고, 우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존재들이다.’”(173쪽)
“‘50세에서 57세 사이가 가장 혹독하다.’ T. S. 엘리엇은 말했다. ‘이런저런 일을 하라는 요구를 받는데, 아직 충분히 노쇠하지 않아서 그것들을 거절할 수가 없다.”(208쪽)
“사회역사학자 로널드 블라이스는 말했다. ‘노인들에게는 접촉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키스와 포옹이 필요한 인생 단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의사 외에는 누구도 그들을 만지지 않는다.’ 82세에 E. M 포스터는 말했다. ‘나는 요즘 망령이라도 든 듯이 호색한 행위를 하고 싶다. 제대로 된 사람을 제대로 된 장소에서 만지고 싶다. 육체의 외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으면서 인사를 하면, 아버지는 몸을 떨면서 울고 또 운다.”(219쪽)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세상의 하고많은 놀랄 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주변에서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249쪽)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콜린 데이비스는 38세에 말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통상적인 의미의 야망을 잃는 듯하다. 스무 해 가량 우리를 자극하고 안달하게 하고 자기 안의 나쁜 특질들을 끄집어내게 했던 강력한 추진력이 좀먹은 듯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나 자신을 보더라도 전반적으로 훨씬 차분해졌다. 음악을 전보다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열광하고 도취하던 과잉의 에너지는 사라졌다. 나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자유롭다.’”(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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