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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의 책

베를린, 천 개의 연극 : 유럽 연극의 수도에서 삶을 뒤흔든 작품들을 만나다


베를린, 천 개의 연극

유럽 연극의 수도에서 삶을 뒤흔든 작품들을 만나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체호프, 입센, 그리고 한트케의 신작까지

공연 예술의 메카, 베를린에 펼쳐지는 뜨거운 연극의 현장!

 

‘단기’ 베를리너이자 동시에 이방인으로서의 저자의 일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고 인문학의 향취가 진하게 배어 있으며, 연극을 향한 깊은 사랑이 녹아 있다. 읽는 것만으로도 베를린에 있는 저자의 모습이, 베를린 사람들의 삶과 사회가, 베를린의 현대 연극 무대가 선명하게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듯하다. 

김철리(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단장)

 

연극은 예술인 동시에 관객을 교양 시민으로 만드는 교육이기 때문에 독일은 연극을 적극 지원한다. 그래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는 백 년의 전통만큼이나 역사적인 극장이 여럿 있다. 브레히트와 뮐러의 연출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베를리너앙상블, 중요한 작품으로 주목 받는 도이체스테아터…….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을 베를린의 유서 깊은 무대의, 가슴 벅찬 공연으로 안내하며 그곳에서 세계적인 거장의 텍스트와 연출, 배우들의 거친 숨소리, 흐르는 땀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운다. 

맹완호(주한독일문화원 문화협력관)



아비뇽보다 뜨겁고 파리보다 장엄하다! 

‘연극에 미친’ 연출가가 열정으로 써내려간 베를린의 황홀한 매력! 

“베를린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정말 섹시하다.” 현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의 말이다. 그 섹시함을 가장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문화 장르가 바로 연극이다. 이 책은 그런 ‘연극의 수도’로서 베를린의 매력을 해부한다.

연극을 꿈꾸는 전 세계의 젊은이들은 뉴욕, 파리가 아닌 이곳 베를린으로 모여든다. 연출가 박철호도 그중 하나였다. 뒤늦게 발견한 연극의 매력에 깊이 빠져든 박철호는 유럽 연극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고 매일 같이 연극을 보았다. 그렇게 2년 여간 베를린과 인근 유럽 도시에서 관람한 연극만 500여 편. 관람한 모든 연극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는데 이중 유럽 연극의 특징과 매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16편을 뽑아 책으로 정리했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괴테, 입센 등의 고전부터 현대 극작가 한트케의 미발표작까지 망라했고 각 연극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설명부터 무대 위에서 흘린 배우의 땀 한 방울까지 생생하게 서술했다. 책 곳곳에 컬러도판으로 삽입된 연극의 주요 장면들은 마치 세기의 공연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또 페르가몬박물관, 알테나치오날갤러리 같은 베를린의 유명 박물관을 비롯해 룩셈부르크에서 온 이민자가 운영하는 지그재그 카페, 바비큐 파티가 열리는 티어가르텐 공원처럼 일상적인 베를린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도시 베를린이 가진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베를린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성,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 정갈한 문체, 그리고 연극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은 에세이로서의 매력이 아주 풍부하다. 연극 애호가뿐만 아니라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좀 더 알고 싶은 독자, 또 고전적인 문학작품들을 쉽게 접하고 싶은 독자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책이다.


1. 세계 연극의 중심지, 베를린의 재발견

한국 독자들은 ‘연극’ 하면 아비뇽이나 에든버러를 떠올리겠지만, 베를린은 탁월한 문화 예술 인프라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유럽 연극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해왔다. 베를린에는 극장만 무려 50여 개가 있다.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이 세운 베를리너앙상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1년에 200여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도이체스테아터, 최근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한 폴크스뷔네나 샤우뷔네 같은 유명한 레퍼토리 극장들을 비롯해 3곳의 오페라하우스, 최근 새로이 주목받는 라디알시스템 같은 젊은 극장들을 모두 합치면 1년에 베를린에서만 수백 편의 연극이 공연된다. 매일 연극을 보아도 약 2년간 매일 다른 연극을 볼 수 있는 셈이다.

베를린의 연극들은 그 레퍼토리와 완성도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베를리너앙상블과 도이체스테아터의 경우, 그리스 고전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현대적으로 완성해내는 노력과 함께 현대 극작가들의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과감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베른하르트의 희곡「클라우스 파이만 바지 한 벌 사고 나와 함께 식사하러 간다」에서 세계적인 연출가이자 베를리너앙상블의 상임 연출가인 파이만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기 역을 직접 연기하는, 세계 연극사에 남을 만한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베를린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이다.


베를리너앙상블은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레퍼토리 극장 중 하나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그의 부인이자 최고의 배우였던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이 함께 세웠다. 그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런데 매표소 옆 칠판에 ‘오늘 공연 전 좌석 7유로’라고 적혀 있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는 덥석 한 장 샀다. 전에 폴크스뷔네Volksbuhne*에서 19유로 주고 「햄릿」 본 걸 생각하면 거저 아니겠는가.(20쪽)

  

이런 독설 가득한 연극을 보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배우들이 나타나니 연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벌써 웃는다. 그리고 한 배우가 대본을 들고 나와서 읽으면서 연기한다. 이게 무슨 일이람? 혹시나 해서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니 슈나이더 양, 베른하르트, 그리고 바일 역의 배우는 헤르만 바일이고, 파이만 역의 배우가 클라우스 파이만이다. 파이만이 여기 베를리너앙상블의 상임연출로 있었다. 1999년에 빈을 떠나 이곳 베를리너앙상블에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다른 배우를 쓰지 않고 본인들이 직접 연기하기로 마음먹은 거다. (97쪽)

 

2. 차원이 다른 스케일과 깊이! 세계 최고의 연극을 만나다

저자 박철호는 베를린에서 가장 유서 깊은 레퍼토리 극장인 도이체스테아터와 베를리너앙상블 두 곳을 중심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극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그 진면목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남다른 스케일과 깊이, 독창적인 연출과 해석 등을 세밀하게 그려 보여줌으로써 유럽 연극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썼던 ‘엑키클레마’(무대 바깥에서 안으로 시체를 밀어 넣는 일종의 수레)를 피를 뒤집어쓴 배우가 낮은 포복으로 천천히 기어가는 장면으로 재탄생시킨 연출가 미카엘 탈하이머, 모든 무대 가구를 거부한 채 흰 옷을 입은 배우들이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하는 것만으로 폭풍이 몰아치는 파도를 표현해낸 연출가 페터 차덱, 86세의 노구로 단지 책을 읽기만 하는데도 관객들의 숨을 멎게 하는 배우 앙겔라 빙클러 등 저자가 묘사한 몇 가지 사례들만으로도 오늘날 유럽 연극의 수준과 깊이,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갑자기 내 뒤의 관객들이 모두 벌떡 일어난다. 이건 또 뭔가? 코러스였다. 관객으로 위장하고는 객석의 가장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깜짝쇼를 벌인 것인데 내 바로 뒤에서 외치는 바람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이 코러스를 독일어로 슈프레히코어Sprechchor라고 한다. ‘말로 하는 합창’이란 뜻인데 나도 이렇게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다. 40여 명의 합창단이 지휘자의 손동작에 맞추어 마치 나팔을 불듯 대사들을 외쳐댄다. 타박을 하기도 하고 어루만지듯 달래기도 하는데 기가 막힌다. 억센 독일어가 저 높은 곳에서 수십 개의 화살처럼 배우들에게 내려꽂힌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고대 연극의 코러스를 책으로만 접할 때는 이런 걸 왜 하나 했었는데, 막상 무대에서 접하니 내가 연출자라도 이 엄청난 효과를 포기할 수 없겠다. (185쪽)

 

여기서 카트린의 연기가 폭발한다. 벙어리가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을 연기한다. 목에 걸려서 소리는 나지 않지만 그보다 더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울음은 없다는 듯 운다.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북을 두드리면서 운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은 전쟁이니 이젠 감각이 무뎌져서 울지 않을 것 같던 카트린이 지붕 위에서 마지막 홰를 치는 닭처럼 운다. 오빠 슈바이처카스가 죽어 시체로 들려 왔어도 울지 않던 카트린이 훠이 훠이 하면서 운다. 군인들에게 맞아서 얼굴에 상처가 났어도 울지 않던 카트린이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모든 아픔으로 운다.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취사병과 떠나려고 하자 방해되지 않으려 길을 떠날 때도 울지 않던 카트린이 슬픈 삶에 서러움을 더해서 운다. (220쪽)


3. 무대에 오른 고전 읽기, 색다른 즐거움!

이 책은 쉽고 재미있는 고전 해설서이기도 하다. 희곡은 글로 읽기보다 무대에 오른 작품으로 볼 때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그렇게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적다. 이 책에서는 「오레스테이아」, 「일리아스」 같은 그리스 고전부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입센의 페르 귄트」, 체호프 「벚꽃 동산」처럼 서양 희곡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주요 작품들이 오늘날 어떻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지를 실제로 보여줌으로서 책으로만 희곡을 감상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기에 타고난 스토리텔러인 저자가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해석하면서 고전에 담긴 함의를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낸다. 「도적 떼」에서는 연인 카를에 대한 정절을 지키는 여인 아말리아를 성춘향과 비교하고 망나니 아들 ‘페르 귄트’를 묘사하며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 복 있겠느냐?”는 어머니의 탄식을 떠올린다. “자기 둥지를 더럽히는 놈”이라는 오스트리아 속담은 “누워서 침 뱉기”라는 우리 속담을 빌어 설명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라는 이름은 절대 신을 뜻하지 않으며 신발의 속어 ‘고디요’에서 고도라는 이름을 따왔을 뿐이라고 억지를 부렸던 베케트의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 말로는 신는 신이나 믿는 신이나 모두 신이라고 한다는 것을 베케트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하는 저자는 고전 읽기에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신데렐라의 역 버전이랄 수도 있고, 장화홍련전의 코믹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본에게서 나는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를 떠올리지만, 다른 이들은 영국의 다이애나 비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올린다. 같은 연극을 봐도 서로의 의식에서 잠자고 있던 다른 이들이 깨어난다.(28쪽) 


본문 속으로

새벽녘에 빵을 사러 나서는데 정원 벽에 뭔가 붙어서 꾸물거린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팽이가 어딘가로 길을 나서는 모양이다. 저 벽을 타고 어디로 가려는 걸까? 혹시 브로콜리 가루를 듬뿍 뒤집어쓴, 누군가의 식사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지. 등에 집을 둘러메고 기어가는 품이 고되어 보인다. 도와줄까 하다가 모든 살아 숨 쉬는 것은 살아 갈 만큼의 고행이 있는지라 개입하지 않는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주제에 그나마 번듯한 집을 가진 달팽이를 돕는다는 것이 한심스럽기도 해서 내 먹거리나 챙기러 나선다. 그런데 내 모습이 꼭 집에서 몸뚱이만 빠져나온 달팽이 같다. 한국 달팽이 참 멀리까지 왔다. (19쪽)

 

그런데 이 연극을 보다 보면 죽음이 정확히 한 형태로만 방문하지 않는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쿠르트가 죽음을 상징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쿠르트의 방문과 함께 에드가가 졸도를 하기 때문이다. 또 후반부에 알리스가 그에게 키스를 퍼부으려고 매달리자 그는 마치 드라큘라 백작처럼 그녀의 목을 물어뜯는다. 잠자고 있던 야성을 그녀가 깨웠다면서, 목에 구멍을 내서 피를 빨아 먹으려 했다고 태연히 말한다. 이러면 그 역시 죽음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되겠다. 에드가는 이런 죽음과 여러 가지 술수를 쓰면서 싸운다. 마지막에 결국 쿠르트는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부부를 두고 집을 떠난다. 죽음이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부부를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으로 해석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죽음이 도망간다니.(40쪽)

 

크레온의 빨간색 망토가 잊혀지지 않는다. 저주받은 도시 테베에서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다 죽음을 당하는 안티고네의 절규가 크레온의 망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는 안티고네. 그녀의 이름이 상징하는 ‘모성에의 대항anti-gone’이 모성뿐 아니라 모든 부당함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브레히트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연출자 타보리는 크레온의 피 냄새 가득한 붉은 망토로 안티고네를 감싸 안으면서 가족사를, 아니 인간사를 피의 바다에 던져버린다. 집에 가는 길에 그 망토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찔하다. (112쪽)


스타니슬랍스키는 이 연극에서 정작 체호프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현대 비극의 요소들을 발견하고 관객들에게 삶의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선택했다. 체리 나무들이 베이는 것이 비극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집안의 상징인 체리 과수원이 없어진다는 것은 노스탤지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체리 과수원에 안녕을 고하고 떠나는 가예프가의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넘어지는 체리 나무들과 함께 남아 서서히 죽어가는 피르스에게서 우리는 비극을 보는 것이다. 기존의 비극 개념과는 달리 삶의 멜랑콜리가 비극의 요소로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이다.(167쪽)


역시 현대 예술가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이해하는 관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에게 현대 예술은 아직 너무 어려운, ‘당신들만의 고뇌’로 여겨지는 것 같다. 여러 이유로 착잡하다. 페터 한트케의, 말을 아낀 비극에 착잡하기도 하지만, 그의 비극을 비극으로 보아 주지 않는 대중이 나를 착잡하게 한다. 공들여 잘 만든 연극인데도 결국 장기 공연에 실패하고 막을 내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지만 어떠랴! 언젠가는 페터 한트케가 보여준 인간의 비극이 제대로 평가받을 날이

오리라. 그리고 이런 것이 예술가가 선택한 고독의 길인 것이다. 길을 잃은 것은 한트케나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 인간 모두가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한트케는 고독이라는, 고도로 비극적인 무기를 사용해서 오늘 펼쳐보여준 것이다. 고맙습니다, 한트케 선생!(276쪽)


아리안 므누슈킨은 이 연극을 제안만 했지, 연출과 대본은 배우들과 출연진들이 각자 했다고 겸손을 빼시지만, 이 연극은 므누슈킨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만약 인류가 3개월 안에 멸망한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 연극은 이 질문에 대해 전 단원이 9개월 동안 임프로바이제이션, 즉 즉흥 연기를 거쳐 만든 작품이다. 이렇다 보니 기존의 연극과는 다른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보통은 극작가가 희곡을 쓰고 연출자가 그 희곡을 읽은 다음 그에 맞는 캐스팅을 거쳐 연극을 만든다. 하지만 이 연극은 캐스팅이 먼저 다 되어 있고, 그 배우들이 스스로 연출하면서 연극을 만들어나간다. 즉 대본이 없는 연극이다.(286쪽)


식사를 하러 태양극단이 마련한 식당으로 모두 같이 간다. 메뉴는 한 가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쌀과 몇 가지 야채로 된 인도식 식단이 마련되어 있다. 1인분에 7유로다. 더 맛있고 비싼 것을 사 먹고 싶어도 없다. 돈이 많은 이나 적은 이나,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나, 연극을 만드는 이나 보는이나 모두 똑같은 것을 먹는다. 식사는 모두 실제로 공연을 했던 배우들이 직접 나누어준다. 벽도 없고 막도 없다. 관객이나 배우나 모두 연극 안에 속해 있는 것이고, 연극 그 자체이다. 식사하는 동안 극단 전원이 공연 수입 전부를 똑같이 분배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연출자건 소품 담당이건 같은 금액의 봉급을 받는다. 철저한 코뮌이다. 파리 코뮌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여기 파리 외곽의 뱅센 숲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309~310쪽)


지은이 박철호 

한국에서 무역 일을 하다 뉴욕시립대학교로 MBA를 공부하러 떠났는데 그곳에서 연극을 만났다. 언어를 익히려고 신청한 연극 수업을 들으며 연극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뒤 연극 연출로 진로를 바꾸어 파리와 베를린, 마드리드 등 유럽 곳곳에서 연극과 언어를 함께 공부했다. 파리의 제4대학교인 소르본대학교에서 프랑스 문명사와 언어 과정을 이수하여 마기스터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윌리엄 잉, 닐 사이먼, 데이비드 헨리 황 및 가슨 캐닌에 대한 드라마 분석」,「이폴리트와 페드르, 에우리피데스에서 라신에 걸쳐 변형되어 나타난 두 주요 인물상에 관하여」가 있다.

연극 연출가이자 비평가로서 국내보다 외국에서 먼저 기량을 인정받았다. 유럽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했는데, 주요 작품으로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느릅나무 아래 욕망」, 이오네스코의「왕은 죽어가다」, 라신의 「페드르」 등이 있다.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베를린, 아비뇽, 마드리드, 에든버러 등지를 여행하며 10여 년간 1,000편이 넘는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 연출시 참고하기 위해 관람한 모든 연극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빠짐없이 기록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중 가장 대표적이고 의미 있는 작품들만 엄선하여 소개하였다. 

「베를린, 천 개의 연극」은 저자의 이런 연극에 대한 열정과, 서양 연극 이해에 필수적인 그리스 고전부터 프랑스 문학, 독일 문학을 두루 공부하며 익힌 문학적 소양이 잘 어우러져 빚어낸 단아하고 정갈한 문장의 에세이다.


차례 


본문 이미지 등은 반비 페이스북의 <베를린, 천 개의 연극> 사진첩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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