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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完)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1-2) 김 회장과 코끼리의 운명적 조우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1부 코끼리 인천 상륙 작전


    2장 김 회장과 코끼리의 운명적 조우 편




아시아나 항공의 코끼리 수송을 보도한 SBS 8시 뉴스.

2003년 6월 1일 아시아나 항공 소속의 보잉 747 화물기 한 대가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화물기이건만 공항에는 한 무리의 취재진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 직원들까지 구경을 나왔다. 드디어 비행기 문이 열리고 일반 컨테이너와 달리 쇠망으로 된 특수 컨테이너가 내렸다. 컨테이너 안에서 기다란 무엇이 쑥 튀어나오자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그 기다란 무엇은 다름 아닌 코끼리의 코. 화물기가 싣고 온 것은 열 마리의 코끼리였다.

코끼리가 실린 컨테이너를 트럭으로 옮기고, 취재진이 조련사와 항공사 관계자를 인터뷰하는 정신없는 상황. 한쪽 편에서 감회에 젖어 이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코끼리 운송을 총괄한 김인옥 코끼리월드 회장이었다.




벤처 1세대, 코끼리 사업에 뛰어들다


코끼리월드는 코끼리 공연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였다. 하지만 코끼리월드의 대표라는 이유로 김회장을 동물 전문가라고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김회장은 어린 시절 고향인 전라남도의 시골 마을에서 소를 키운 것을 제외하고는 동물과 별 인연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김회장이 회장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은 컴퓨터 사업을 통해서였다. 김회장은 스스로를 한국 IT 산업의 1세대라 자부한다.

“나더러 컴퓨터 얘길 하라면 더 잘하지. 코끼리 얘기보단.”

요즘이야 IT 산업 하면 소프트웨어나 반도체 분야를 떠올리지만 한국 IT 산업의 출발은 종로의 세운상가였다. 현재 세운상가는 재개발 사업이 겉돌면서 도심의 흉물이자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다. 하지만 원래 세운상가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었다. 1968년 완공되자 주거 시설에는 고위 공직자, 대학 교수, 연예인 등이 입주했고, 상업 시설에는 종합 가전제품 상가가 들어섰다. 1970년대 말 미국에서 애플 컴퓨터가 처음 나오고 본격적으로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한국에서는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컴퓨터가 거래되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김회장은 그 시절 수많은 사람이 그랬듯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뒤 컴퓨터 무역 회사를 세웠다. 컴퓨터를 수입해 세운상가에 공급하는 회사였다. 김회장의 남다른 성실함과 사업 수완 덕에 회사는 날로 성장했다.

시대 흐름도 김회장을 도왔다. 1980년대 말부터 기업을 넘어 일반 가정에까지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컴퓨터 시장이 붐을 이루었다. 1987년에는 세운상가를 대신하기 위해 용산전자상가가 건설되었었다. 김회장의 주요 공급처도 용산전자상가로 바뀌었다. 용산전자상가는 컴퓨터 붐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다. XT가 AT로, AT가 386으로, 386이 486으로, 486이 펜티엄으로 컴퓨터의 성능이 업그레이드될수록 김회장의 자산도 쌓여 갔다.


▲ 태국 관광청 서울 사무소의 홈페이지. 

메인화면에서부터 코끼리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자수성가한 김회장 주변에는 사업상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부도를 낸 후 도와 달라는 거래처도 있고 유망한 사업 아이템이 있으니 투자해 보라는 지인도 있었다. 통이 큰 김회장은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큰돈도 선뜻 내주곤 했다. 2002년 고향 친구가 김회장을 찾아왔다. 친구는 괜찮은 사업을 제안받았는데 주주로서 참여하려면 5000만 원이 필요하다며 사업 계획서를 내밀었다. 사업 계획서의 첫머리에 적힌 글자는 ‘(주)코끼리월드’. 태국에서 인기 있는 코끼리 쇼를 한국에서도 선보이겠다는 요지였다.

태국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해외 여행지 중 하나다. 해마다 약 100만 명의 한국인이 태국을 방문한다.1) 그중 상당수가 패키지 관광 상품을 통해서 가는데 이 일정에 단골로 껴 있는 것이 코끼리 쇼다. 방콕, 치앙마이, 파타야, 푸켓 등 주요 관광지마다 코끼리쇼가 펼쳐진다. 자전거 타기, 축구 경기하기 같은 묘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제법 그럴싸한 그림을 그리기까지 한다. 입소문을 타다 보니 요즘은 코끼리 쇼를 찾는 개별 자유 여행자도 늘고 있다.

이렇게 태국의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코끼리 쇼에 대한 호응도가 높다, 그러니 수도권에서 코끼리 쇼를 선보이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굳이 많은 돈 들여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코끼리 쇼를 볼 수 있으니 관람객이 몰려들게 된다, 라는 것이 이 사업 계획서에 담긴 큰 포부였다.

그런데 정작 코끼리를 수입할 나라로 지목된 곳은 태국이 아니라 그 옆 나라 라오스였다. 태국은 CITES(Convention on International Trade in Endangered Species of Wild Flora and Fauna)에 가입되어 있는 반면 라오스는 미가입 상태여서 코끼리 반출이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이다.


CITES의 로고


  CITES는 1973년 3월 8일 워싱턴에서 81개 나라가 참여한 가운데 체결되었고 1975년에 발효되었다. 한국은 1993년에 가입했다. 우리말로 풀어 쓴 이름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으로 워낙 길어서 한국에서도 그냥 ‘싸이테스’라는 이름으로 통하곤 한다. ‘씨테스’라고 발음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CITES에서는 5000여 종의 동물과 2만 8000여 종의 식물을 멸종 위험 정도에 따라 부속서 1종, 부속서 2종, 부속서 3종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에 따라 보호한다. ‘부속서’라고 하는 것은 부록, 부속물을 뜻하는 Appendix를 번역할 말인데, 이 동식물 리스트가 협약 뒤에 일종으로 부록처럼 딸려 있기 때문이다. CITES 본부에서는 부속서에 등재된 동식물이 조약 발효 이후 단 한 종도 멸종되지 않았다고 자찬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CITES가 멸종 위기 종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코끼리와 대다수 지역의 아프리카코끼리는 부속서 1종 등급으로 상업적인 국제 거래를 금지되어 있다. 보츠와나, 나미비아,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프리카코끼리는 부속서 2종 등급으로서 까다로운 수출입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야생에서 잡은 코끼리가 아닌, 가축으로서 사육하고 있는 코끼리는 양쪽 정부의 수출 허가서와 수입 허가서가 발부되면 국제 거래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한 것은 결코 아니다.

2004년 5월 30일을 기해 라오스도 CITES 가입했지만 이때만 해도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유일의 CITES 미가입국이었다. 애초에 김회장의 친구에게 코끼리 공연 사업을 제안한 사람들도 ‘라오스를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인들이었다.

영 뜬금없는 사업은 아니었다. 이미 2001년 6월 (주)백상코끼리랜드(現 점보빌리지)가 제주도에 라오스 코끼리 아홉 마리를 들여와 코끼리 쇼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 코끼리들은 구입이 아니라 임대한 것이었다.

친구의 부탁에 김회장은 선뜻 5000만 원을 빌려 주었다. 친구의 부탁에 김회장은 선뜻 5000만 원을 빌려 주었다. 이때만 해도 코끼리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친구의 일을 도와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거면 그 친구가 앞으로 먹고살 수 있겠다고 하니까.”

사업 계획서상으로는 자금만 확보되면 그다음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친구가 5000만 원을 가져간 후에도 라오스에서 전해 오는 소식은 언제나 비슷했다. 현지 출신 조련사들을 고용해서 코끼리 열 마리를 훈련시키고 있다, CITES에 수입 허가를 신청해서 답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다 보니 어느새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김회장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꼭 투자금 때문은 아니었다. 투자금 5000만 원은 적지 않은 돈이기는 하지만, 설령 코끼리 사업이 흐지부지되어 수익을 내지 못한다 해도 김회장이 하고 있는 사업에 타격을 입힐 금액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회장은 직접 코끼리월드의 주주가 되기로 결심했다. 코끼리 공연 사업이라면 일종의 이벤트업. 컴퓨터 무역에 잔뼈가 굵은 김회장에게는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그래도 김회장은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글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코끼리와 무슨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작용한 건지, 허허.”



김회장은 친구에게 주주가 아닌 직원으로서 일만 하라 하고 자신이 대신 주주가 되었다. 일이 지지부진한 사이 경비는 눈덩이처럼 늘어 김회장은 5000만 원을 추가로 내야 했다. 총 1억 원을 투자한 셈이었다. 코끼리월드에는 김회장 외에 네 명의 주주가 더 있었다. ‘라오스를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인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집한 사람들이었다. 이 주주들 역시 처음 5000만 원에 추가로 5000만 원을 더해 1억 원씩을 투자한 상태였다.

김회장이 주주가 된 후에도 진행 속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급기야 해가 바뀌어 2003년이 되었다. 김회장은 그냥 한국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장 답사를 위해 라오스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이 코끼리들이 쇼를 할 수 있을까?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안쪽에 위치한 내륙 국가다.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김회장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의 와타이 국제공항에 내렸다. 다른 주주 두 명과 김회장의 친구도 함께였다. 인천을 출발한 지 열 시간이 훌쩍 넘게 흘러 있었다. 진에어가 2011년 12월 인천-비엔티안 직항 노선을 취항하면서 지금은 한국에서 라오스로 여섯 시간 안에 곧장 갈 수 있게 되었지만 2003년만 해도 태국이나 베트남을 경유해야 했다.

늦은 시각이라 일단 숙소에 짐을 푼 김회장 일행은 다음 날 길을 나섰다. ‘라오스를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인들’ 중 한 명이 김회장 일행을 안내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코끼리들이 훈련받고 있는 장소.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교통수단이라는 것이 버스도 아니고 기차도 아니고 택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뚝뚝이도 아닌 모터보트였다.



라오스 왕국의 국기와 왕실 문장. 코끼리를 넣어 란쌍 왕국을 계승했음을 나타냈다.

라오스의 공식적인 역사는 코끼리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1353년 건국된 란쌍 왕국이 라오스 최초의 나라로 여겨지는데 란쌍은 100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란쌍 왕국이 세 개의 나라로 분열되고 곧이어 멸망에 이른 후 라오스는 외세에 시달렸다. 189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잠시 일본에 점령당했다가, 전쟁 후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끝에 1954년에야 독립을 이루었다. 입헌 군주제인 라오스 왕국의 탄생이었다. 독립 후에도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 덩달아 휩싸인 데다 내전까지 일어나 혼란이 계속되다가 1975년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다. 라오스의 정식 명칭은 라오 인민 민주 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이다. 지금도 라오스는 세상에 몇 안 남은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다.

  라오스는 가난하다. 1인당 국민 소득이 1204달러2)로 세계 150위 언저리에 있다. 국민 총생산 규모는 동남아에서도 최하위다. 전형적인 농업 국가로 제조업 시설은 미미하다.

그러니 교통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 만무하다. 기차선로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런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강, 그중에서도 단연 동남아 최대의 강이자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긴 강인 메콩 강이다. 메콩 강은 중국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내려와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김회장 일행을 태운 모터보트는 메콩 강을 따라 하염없이 질주해 나갔다.

“말이 모터보트지, 나무로 만든 길쭉한 배가 있어요. 그걸 타고 아주 한참을 갔지.”

네 시간을 갔는지, 다섯 시간 아니면 여섯 시간을 갔는지, 하여튼 메콩 강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질리고 물렸을 때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에 이렇다 할 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산골이었다.

그곳에 정말로 코끼리가 있었다. 사업 계획서에서만, 친구가 전하는 소식에서만 존재하던 그 열 마리의 코끼리였다. 김회장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딱 봤을 때만 해도 좋았지. 근데 하는 걸 보니까 이건 뭐…….”

코끼리들이 선보인 재주는 그전에 단 한 번도 코끼리 쇼를 접한 적이 없는 김회장이 보기에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1년 가까운 지난 시간 동안 연습한 것이 겨우 이 정도냐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김회장은 억지로 참았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 대신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어쨌든 코끼리 열 마리의 건강한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는 점이 나름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라오스(라오 인민 민주 공화국)의 국기. 빨간 선은 인민들이 자유를 위해 흘린 피를, 파란 선은 번영을 나타낸다. 하얀 원은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데 라오스 공산당 하에서의 단결, 라오스의 밝은 미래, 메콩 강 위로 떠오른 보름달 등이다.  
▲ 라오스(라오 인민 민주 공화국)의 국기. 빨간 선은 인민들이 자유를 위해 흘린 피를, 파란 선은 번영을  나타낸다. 하얀 원은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데 라오스 공산당 하에서의 단결, 라오스의 밝은 미래, 메콩 강 위로 떠오른 보름달 등이다.

 ▲ 역사적으로 코끼리와 가깝기는 태국도 라오스 못않다. 1855년부터 1916년까지 쓰인 태국 국기.





  김회장의 다음 일정은 태국 남부의 휴양 도시 파타야였다. 물론 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파타야의 주요 관광지로 꼽히는 농눅 빌리지는 200만 제곱미터 규모의 열대 정원으로,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으로 꼽히는 식물원이다. 코끼리 쇼, 전통 민속 무용, 무에타이 등의 볼거리도 마련해 두고 있어 외국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김회장은 농눅 빌리지의 코끼리 쇼를 보고 그 수준을 가늠해 보고자 했다.

태국의 코끼리 쇼는 예상대로 라오스에서 본 것과 격차가 컸다. 태국은 코끼리 조련사 양성 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코끼리 쇼를 관광 자원으로 육성해 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관람객들이 내지르는 탄성 속에서 “잘한다!” “신기하네!” 같은 익숙한 한국말도 섞여 들렸다. 이 한국인 관광객들을 한국에서도 끌어들여야 코끼리월드가 수익을 낼 수 있을 텐데 라오스에서 본 수준으로는 ‘글쎄올시다.’였다.

코끼리 공연 사업에서 발을 빼야겠다 결심하자면 당장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회장은 그러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있던 코끼리들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라오스 코끼리들을 인천 송도로 데려오려면? 


한국으로 돌아온 김회장은 코끼리월드에 의욕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지분으로 따지면 다섯 주주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열성으로 따지면 나머지 네 주주의 합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이미 30여 년 동안 경영해 온 기존의 사업체는 이제 김회장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갈 터였다. 김회장은 정이사를 불러 코끼리월드의 업무를 맡겼다.

정이사는 1980년대 중반 친인척의 소개로 김회장의 무역 회사에 입사했다. 김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회장과 함께한 지 20여 년, 이제 정이사는 김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정이사가 가장 먼저 내린 조치는 코끼리 훈련 방식을 바꾸도록 한 것이었다. 태국의 코끼리쇼와 똑같은 수준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버금가는 정도는 되어야 했다. 조치라고 해 봤자 라오스에 상주해 있는 ‘라오스를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인들’에게 당부해 두는 정도였지만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코끼리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고비가 남아 있었다. 바로 CITES의 승인이었다. 다행히 라오스 정부는 까다롭지 않았다. 코끼리가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거래되었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두말없이 수출 허가를 내주었다. 다만 라오스 출신 조련사들이 코끼리월드에 정식 취업해 코끼리들과 함께 갔으면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다. 강제 사항이 아닌 권고 수준이었지만 어차피 전문 코끼리 조련사가 필요한 코끼리월드로서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CITES 가입국인 우리나라의 수입 허가였다.

환경부 산하에는 일곱 개의 지방 환경청이 있다. CITES 부속서에 속하는 종을 수입하고자 할 때는 해당 환경청에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서류에는 사용 계획서, 수송 계획서, 보호 시설의 도면이나 사진도 포함된다. 코끼리가 살게 될 곳이 인천 송도 유원지이기에 코끼리월드에서는 수도권을 담당하는 한강유역환경청에 수입 허가를 신청했다. 김회장이 코끼리월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이미 서류 제출이 완료되어 수입 허가를 기다리던 상태였다.

현재 한강유역환경청 홈페이지(www.me.go.kr)의 CITES 관련 안내문을 보면 서류 제출 후 허가가 나기까지의 처리 기간이 5일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는 상황이 달랐다. 한강유역환경청에서는 뚜렷한 이유도 대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서류에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좀 더 기다려 보라는 답변만 반복되며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정이사는 그때를 떠올리면 목소리가 높아진다.

“요새 같으면 처리 기간 며칠 딱 나오잖아요. 그때는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우린 답답한 겁니다. 오죽하면 차라리 수입 불가라는 확답이라도 줘라 이렇게 요구했다는 거 아닙니까. 코끼리 오는 게 늦어질수록 그만큼 손해가 날 수밖에 없는데.”

아직 코끼리 공연을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라오스에 있는 조련사들과 한국인 직원들 월급은 꼬박꼬박 나가고 있었다. 수입은 없이 자본금만 계속 까먹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사이 코끼리 공연장은 송도 유원지에서 거의 완공되어 갔다. 이러다가는 공연장이 주인공인 코끼리도 없이 방치될 지경이었다.

수입 허가가 늦어졌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정이사는 다만 이렇게 추측한다.

“안 해 주려고 억지로 꼬투리 잡은 건 아니었고, 그냥 뭘 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코끼리가 열 마리나 한꺼번에 들어오는 경우가 그쪽에서는 처음이니까.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지방 환경청의 인력 부족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동물 수입은 날로 증가 추세다. 애완동물 시장이 커지면서 이색적이고 희귀한 동물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각 지방 환경청마다 외국 동물 수입 허가를 검토하는 담당자는 박사급 인력 한두 명이 고작이다. 그렇다 보니 단순한 애완동물도 아니고 CITES 부속서 1종 등급인 코끼리에 대해 수입 허가를 내리는 까다로운 문제는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한강유역환경청에서 코끼리 공연장의 공사 현상을 답사하고서도 또 한참이 지나서야 코끼리 월드는 겨우 수입 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서류를 제출한 지 약 1년 만이었다. 이제야 드디어 코끼리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코끼리를 옮기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2003년 5월 김회장은 다시 한 번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코끼리 운송을 직접 총괄하기 위해서였다. 그사이 누군가는 한국에서 뒤치다꺼리를 맡아야 했기에 정이사는 국내에 남았다.

코끼리 열 마리를 옮기려면 초대형 화물기가 동원되어야 했다. 하지만 협소한 와타이 국제공항에 초대형 화물기를 감당할 활주로가 있을 리 만무했다. 유일한 대안은 코끼리들을 일단 육로를 통해 태국으로 옮긴 다음, 방콕의 돈므앙 국제공항에서 비행기에 실어 인천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코끼리들은 서너 마리씩 대형 트럭에 실렸다. 육상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라오스에서 전국을 뒤져 어렵사리 구한 트럭들이었다. 코끼리와 함께 갈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운전사들을 제외하고도 라오스 조련사 열 명, 라오스 무용수 열 명, 라오스 수의사 한 명에다 한국인 직원들과 김회장까지. 대규모로 이동을 하자니 출발 준비가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과정 자체는 순조롭게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갑작스럽게 발목이 잡힌 것은 태국 국경 초소에서였다. 국경 초소 관리들은 우리가 허술해 보인다는 둥, 코끼리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둥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통관을 거부했다. 환경부의 수입 허가를 받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렸던 김회장이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살아 있는 코끼리들을 비좁은 우리 안에 계속 두었다가는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김회장은 재빨리 정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행동’에 나섰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었는지에 대해 정이사는 말을 아낀다.

“태국이 라오스보다는 좀 낫지만서도 우리나라 70년대, 80년대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옛날에 우리나라는 안 그랬어요? 그 당시는 법이 필요 없었어요. 공무원이 안 돼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공무원이 돼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이건 비공식적인 일이에요. 국경에서 며칠 지체되다 보면 숙박비나 뭐 여러 가지 경비가 부족하거든요. 그런 거 감안해서 전화하신 거죠.”


비행기 안에 실린 코끼리 수송 상자.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라오스 출신 코끼리 조련사다.

  ▶ 비행기 안에 실린 코끼리 수송 상자.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라오스 출신코끼리 조련사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통했다는 그 ‘행동’ 덕분에 코끼리는 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야말로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갔다. 공항에서 코끼리들은 특별히 제작된 수송용 우리에 한 마리씩 들어갔다. 일단 들어간 코끼리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크기의 우리였다. 코끼리가 밖을 보고 불안해하지 않도록 우리의 앞부분에는 베니어판이 덧대어 있었다.

2003년 6월 1일 점심 무렵 인천 공항에 내린 코끼리들은 저녁 늦게 드디어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송도 유원지에 온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




1) 한국관광공사 「국민해외관광객 주요 행선지 통계」


2) 국제 통화 기금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2012.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