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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完)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1-3) 송도 코끼리 공연장엔 찬바람만 나부끼고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1부 코끼리 인천 상륙 작전


    3장 송도 코끼리 공연장엔 찬바람만 나부끼고 




아련한 추억의 놀이공원, 송도 유원지



◀ 인천 소래역사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옛 수인선 기차. 수인선은 1995년 폐선되었다가 2012년 부분적으로 재개통되었다. 2015년 완전히 개통될 예정이다.


그런데 코끼리가 가는 송도 유원지는 어떤 곳일까? 이토록 비싸고 귀한 코끼리가 왜 서울대공원이나 어린이대공원이 아닌, 인천의 송도까지 가게 됐을까. 이 행보는 송도 유원지의 흥망성쇠와 연관되어 있다.

송도 유원지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일본은 경기도 수원과 인천 송도를 잇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경기도의 쌀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고 일본인들을 내륙 진출을 확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송도역 근처에 관광지를 조성했다. 열차 승객 수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트럭 30대 분량의 모래를 실어 와 인공 백사장을 조성하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수욕장을 개장했다. 송도 유원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사실 송도라는 이름 자체도 일본이 새로 지은 것이다. 일본 센다이 만 연안에는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로 꼽히는 마쓰시마라는 명승지가 있다. 일본은 마쓰시마가 어찌나 자랑스러웠던지 식민지 조선의 바닷가 여기저기에도 같은 이름을 갖다 붙였는데 마쓰시마의 한자 표기가 바로 ‘송도(松島)’다. 인천뿐 아니라 부산, 포항, 목포 등에도 송도라 불리는 장소들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1)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은 송도라는 지명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인천의 송도라는 지명은 1930년대 일제 총독부의 행정기관인 인천부가 나서서 심어 놓은 노골적인 언어의 쇠말뚝입니다.”2)

송도 유원지 역시 그 출발부터 군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송도 유원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역시 일본이 개발한 월미도 유원지가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일본은 이곳을 점차 폐쇄할 예정이었다. 대륙 침략 계획에 따라 월미도를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월미도 유원지의 대체물로 송도 유원지를 더욱 확장해 종합 휴양지로 확충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곧이어 한국 전쟁까지 터지면서 송도 유원지는 미군과 영국군의 주둔지로 쓰이게 되었다. 해수욕장에 관광객 대신 군인만 가득했다.



송도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자!


 

 

▲ 1960년대 송도 유원지에 몰려든 인파. 이때만 해도 송도 유원지는 전국적인 명소였다.

▲ 송도 유원지에서 열린 패션쇼. 송도 유원지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행사장이기도 했다.



한동안 방치되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하던 송도 유원지는 1960년대 들어 기지개를 켰다. 인천시는 수문을 설치해 수위 조절이 가능한 인공 해수욕장을 조성하고 어린이 놀이터, 야외무대, 보트장까지 갖추어 1963년 6월 송도 유원지를 다시 개장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1순위로 꼽히는 최첨단 관광 시설이었다. 수도권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저 멀리 부산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송도 유원지가 누린 명성과 인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1970년대 말까지는. 하지만 1970년대에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 대형 놀이공원들이 생기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경제 성장을 맛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더욱 크고 화려한 놀이 시설을 원했다. 독재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건넬 당근이 더 많이 필요했다. 대기업은 대규모 테마파크 사업이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을 감지했다. 이런 각자의 욕망이 한데 모여 1973년 어린이대공원, 1976년 용인 자연농원, 1984년 서울대공원, 1988년 서울랜드, 1989년 롯데월드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그에 비해 송도 유원지는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설들이 노후화되었다. 수도권 안에서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으니 접근성 면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졌다. 입장객 수는 줄어들고 그에 반비례해 적자 폭은 커져 갔다.

송도 유원지를 다시 활성화시키려는 계획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천시는 오는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인천에 관광객이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 올해부터 88년까지 남구 옥련동 송도 유원지 인근 매립지 1백 12만 평을 대단위 임해관광단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 매일경제 1982.1.22


인천시는 남구 옥련동 송도 해안 도로변 돌산 일대에 1백 10억 6천 7백여 만 원의 민간자본을 투입, 총 11만 2천 3백 87평에 이르는 송도 유원지 분수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 매일경제 1988.8.23


인천시는 민자 유치 사업으로 도심(송도 유원지)과 강화, 옹진의 유적지를 연계한 종합관광단지 개발을 추진 중이다.

― 매일경제 1995.12.26


인천 연수구 동춘, 옥련동 일대 송도 유원지 매립지 29만여 평에 88층짜리 초고층 호텔과 스포츠센터 등을 갖춘 종합휴양레저타운이 조성된다. (주)대우는 5일 인천시청에서 송도 유원지 개발 사업 설명회를 갖고 올해부터 2003년까지 2단계 사업을 통해 이 같은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경향신문 1996.2.6


대우그룹은 4일 그룹 본사의 인천 이전을 확정하는 한편 인천 송도 유원지 조성 지구 내 13만 3천 평 부지에 오는 2002년까지 대우센터, 호텔, 컨벤션센터, 공항터미널, 위락 단지, 실내 스키장 등을 갖춘 대우타운을 건립키로 했다.

― 동아일보 1997.7.5


인천 송도 유원지가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와 같은 새로운 놀이 공원으로 바뀐다. 인천도시관광(주)은 24일 “우리나라 유원지의 선구자였던 송도 유원지가 시대에 뒤떨어져 매년 입장객이 줄고 있다.”며 “2008년까지 3단계로 신세대에 맞는 새로운 맛의 놀이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한겨레신문 1999.10.25


인천시와 인천도시관광(주)은 오는 2008년까지 5백30억 원을 들여 송도 유원지 내 해수욕장을 매립해 ‘워터파크’ 등을 조성하는 재개발 사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 한국경제 2000.3.3


이 중 제대로 실현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코끼리들이 도착한 2003년 송도 유원지에는 이미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다.

코끼리월드 역시 송도 유원지의 이런 분위기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코끼리월드에서 염두에 둔 곳은 송도 유원지가 아니라 서울어린이대공원과 서울대공원이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반응이 시큰둥했다. 1000만 인구 서울시와 1000만 인구 경기도를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년 365일 관람객이 마를 날이 없으니 굳이 코끼리 공연까지 유치할 이유가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50만 인천 시민에게조차 잊혀가고 있던 송도 유원지는 코끼리월드의 제안에 협조적으로 나섰다. 어차피 코끼리 공연장 건설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코끼리월드의 몫이었다. 고질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송도 유원지로서는 밑질 것이 없었다.

송도 유원지를 관할한 인천도시관광의 이윤호 상무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송도유원지가 지난 70~80년대에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명성을 날렸던 게 사실입니다. 코끼리 공연이 송도유원지의 옛 명성을 되찾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3)

코끼리월드 입장에서 송도 유원지는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이었지만 그래도 수익 창출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송도 유원지가 예전의 명성을 잃은 지 오래지만 엄연히 수도권 소재 놀이공원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에 코끼리 공연이 입소문이 난다면 흥행은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에 또 하나 코끼리월드가 노리는 바가 있었으니 바로 외화 획득이었다. 한류의 영향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으며, 비행기를 타든 배를 타든 중국인 관광객은 반드시 인천을 거치게 되니 이들을 끌어오겠다는 야무진 계산이었다.

여기까지가 바로 김회장이 처음에 받은 사업계획서에 나와 있던 내용이었다. 정이사는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한다.

“판단 미스였죠.”



야심찬 공연의 처참한 실패



◀ 코끼리 공연 중의 한 장면. 코끼리 등에 탄 사람은 사육사,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한국인 진행자다. 이것은 어린이대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2003년 7월 1일, 오랜 여정 끝에 드디어 코끼리 공연이 막을 열었다. 공연은 라오스 여성 무용수들의 전통 무용으로 시작했다. 이국적인 무용이 끝나면 공연장 한쪽에서 아홉 마리 코끼리가 줄을 지어 나왔다. 한 코끼리가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면 나머지 코끼리들은 코를 번쩍 들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이것이 오프닝인 셈이었다.

그다음에는 코너별로 두세 마리의 코끼리가 나왔다. 물감을 묻힌 붓을 코로 잡고 도화지에 꽃 그림 그리기, 드럼통 위에서 자세를 유지하면서 코로 훌라후프 돌리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코로 기다란 줄을 돌리면 사육사가 줄넘기하기, 코로 다트를 던져 풍선 터뜨리기, 일반 축구공의 서너 배 크기인 코끼리용 축구공을 앞발로 차서 골대 안으로 넣기, 코로 농구공을 던져 골대 안으로 넣기 등의 기술을 선보였다.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코너도 있었다. 볼링핀을 일렬로 세워 놓고 관람객 중 신청자를 받아 코끼리와 볼링핀 줍기 시합을 벌였다. 대개는 코끼리의 승리였다.

코너 사이사이에 코끼리들은 관람석으로 다가가 관람객들로부터 먹이를 받아먹었다. 먹이는 공연장 입구에서 파는 당근 조각이었다. 관람객들은 먹이를 향해 죽 뻗은 코끼리 코를 만지곤 했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코끼리 한 마리가 갑자기 쓰러졌다. 무언가 이상이 생긴 줄 알고 긴장한 관람객들은 다른 코끼리가 거대한 주사기를 들고 나와 주사 놓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이것이 깜짝쇼였음을 눈치챘다. 쓰러졌던 코끼리가 일어나 모든 코끼리가 댄스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것으로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총 공연 시간은 50분 정도였다. 공연 후에 관람객들은 코끼리들 옆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연장에서 나온 관람객들은 옆에 있는 트래킹 코스에서 코끼리 타기 체험을 할 수도 있었다. 코끼리 등에 얹힌 의자에 앉아 100미터 정도를 도는 것이었다. 물론 추가로 비용을 내야 했다.

공연 내용은 나무랄 데 없었다. 코끼리가  열 마리나 되어서 여러 가지 쇼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일단 코끼리 자체가 워낙 이국적인 동물이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되었다. 태국이나 라오스의 현지에서 하는 공연만큼 기술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게 구성이 알찼다.

하지만 흥행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6억 원이나 들여 지은,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공연장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훨씬 많았다. 그나마 처음 몇 달 동안에는 해수욕장에 몰려든 피서객들이 호기심에 공연장을 찾곤 했지만 여름이 지나자 송도 유원지도 공연장도 더욱 썰렁해졌다. 기대했던 중국인 관광객은 어쩌다 길을 잘못 찾아든 사람조차 한 명 없었다.  중국인 관광객의 전형적인 관광 코스는 인천 공항이나 인천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서울로 가서 쇼핑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익은 나지도 않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골치 아픈 사건들만 잇따라 일어났다.



1) 오마이뉴스 「송도국제도시의 ‘송도’는 일제식민잔재」(2005.7.8)


2) 인천일보 「‘왜색’ 짙은 지역대표 브랜드 … 제 이름 찾아 줘야」(2010.10.18)


3) 문화일보 「송도 유원지서 코끼리 서커스」 (2003.6.3)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