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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完)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2-3) 디아스포라 코끼리, 사쿠라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2부 한반도에 왔던 코끼리들


    3장 디아스포라 코끼리, 사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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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에서 온 코끼리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본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사쿠라의 진짜 고향은 태국이다. 태국 코끼리가 일본에 가서 일본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원래 일본 효고현의 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에는 메리라는 이름의 코끼리가 살고 있었다. 메리는 얼마 전 난산 끝에 새끼를 낳았지만 새끼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남편 코끼리 도 한 해 전 다리에 난 상처가 깊어져 세상을 떠났던 터라 메리의 비극은 더욱 서글펐다.

그런 메리가 죽은 새끼의 몸을 코로 어루만지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자 일본 전역에서 메리를 위로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는 고심 끝에 메리를 위해 새끼 코끼리를 해외에서 입양하기로 했다. 그래서 태국에서 선택된 코끼리가 바로 태국산 1965년생 코끼리 사쿠라였다. 죽은 새끼와 나이가 비슷한 아기 코끼리를 고른 것이다. 그렇게 사쿠라는 생후 몇 달 만에 해외 입양 길에 올랐다.

태국에서 사쿠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친엄마가 병으로 죽어 진짜 고아가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본에서 구매 제의가 오자 멀쩡히 살아 있는 친엄마로부터 강제로 떨어져야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로는, 야생에서 살다가 코끼리 밀렵꾼에게 친엄마를 잃고 자신은 수출용으로 생포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사쿠라가 도착하자 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에서는 이 입양아의 이름을 공모에 붙였다. 양엄마의 전국적 인기에 힘입어 당시 날아온 편지가 수만 통이나 되었다. 시민들의 응모를 통해 선택된 이름이 바로 어떤 이름보다도 일본적인 사쿠라(さくら, 벚꽃)’였다.

다음 해에는 사쿠라보다 한 살 어린 수컷 코끼리 후지가 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서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이지만 메리는 친엄마처럼 사쿠라와 후지를 보듬었다. 사쿠라도 메리를 잘 따랐다.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계모는 이곳에 없었다. 사쿠라와 메리, 후지는 한 가족이 되어 한동안 오순도순 잘 살았다. 하지만 사쿠라의 기구한 운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0년에 양엄마 메리가 그만 죽고 만 것이다.

양엄마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이 무척 컸던 탓이지, 얌전하던 사쿠라는 성격까지 변했다. 자기 똥을 발로 뻥 차는가 하면 소풍 온 학생들에게 코로 물을 좍 끼얹기도 했다. 남아 있던 후지마저 1994년 죽는 바람에 사쿠라는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

외톨이 생활 10년째인 2003년에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93종 600여 마리의 동물들은 각각 다른 동물원들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그런데 사쿠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정하는 것이 지지부진했다코끼리는 워낙 덩치가 큰 동물이라 누구든 갑자기 선뜻 맡기에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일본 국내에서는 사쿠라를 받겠다고 하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난감한 일이었다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의 사육사와 수의사가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다행히 사쿠라의 새로운 거처가 정해졌다바다 건너에 있는 서울대공원이었다. 2003년 5월 사쿠라는 오사카 난코항에서 컨테이너에 갇힌 채 배에 실렸다. 77년 전 한 쌍의 코끼리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갈 때 지나간 그 바닷길을 사쿠라도 지나갔다.



   

(좌측) 재일 한국인 3세 작가 김황이 쓴 어린이 논픽션책 『코끼리 사쿠라』. 김황 작가는 한국과 일본을 오간 동물들에게서 재일 한국인인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 (우측) 김황의 삶과 꿈을 다룬 어린이 그림책 『세탁소 아저씨의 꿈』. 국내 어린이책 작가인 엄혜숙이 글을 썼다.

 


이렇게 일본에서 사쿠라가 살아온 모습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한 재일 한국인 작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 한국인 3세로 교토에서 태어난 김황은 사육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 꿈은 좌절되었다. 사육사는 공무원 신분인데 재일 한국인은 외국인이라 공무원 자격이 없었다. 비록 사육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를 어린이 동물 책 작가로 이끌었다. 황새, 세상의 모든 펭귄 이야기, 따오기야, 돌아와, 우리 땅의 왕 늑대, 꿀벌이 없어지면 딸기를 못 먹는다고?등 여러 권의 책이 나와 있다.

코끼리 사쿠라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책이다. 일본아동문학자협회에서 주최한 제1어린이를 위한 감동 논픽션 대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김황에게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김황이 사쿠라를 취재하게 된 배경에는 그 자신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껴 있는 또 한 명의 디아스포라라는 사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사쿠라뿐 아니라 수백 년 앞서, 그리고 수십 년 앞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보내진 코끼리들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김황은 국내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쿠라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가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양국을 오간 코끼리들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지요. 과거 일본에서 건너갔던 코끼리가 한국에서 행복했다면 사쿠라 역시 한국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미 지난 번 연재에서 밝혔듯이 먼저 왔던 코끼리들의 삶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세 코끼리들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상처를 받고 살아온 재일 교포들의 삶과 닮아 있어요. 앞으로 커 나갈 어린이와 동물은 더 이상 이런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각주:1]

고향을 떠난 경험이 이미 한 번 있어서일까. 태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옮겨 왔지만 사쿠라는 낯선 타지에 잘 적응해 갔다. 서울대공원에서 사쿠라는 일본에 있을 때보다 몸도 건강해졌고,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인기도 끌었다. 서울대공원이 관람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 서울대공원 사육사들과 함께 있는 사쿠라



▲ 서로 코를 감고 있는 사쿠라와 리카. 왼쪽이 사쿠라다. 

리카는 이 당시 서울대공원이 보유한 유일한 아프리카코끼리였다.



다카라즈카 패밀리랜드는 사쿠라를 보내며 사쿠라가 서울대공원에서 수컷 코끼리를 만나 새끼를 낳게 되기를 기대했다. 서울대공원이 사쿠라를 데려온 것도 수컷 코끼리에게 짝을 지어 주려는 의도였다. 이 수컷은 바로 자이언트였다. 자이언트는 이때 쉰 살이 넘은 노총각이었다. 하지만 사쿠라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자이언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신 엉뚱한 상대와 사랑에 빠졌다. 열다섯 살 연하의 수컷 코끼리 리카였다. 연상연하 커플이라서 엉뚱한 상대라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리카는 아시아코끼리인 사쿠라와 달리 아프리카코끼리였던 것이다.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서도 라이거나 타이곤이 태어나곤 하는데 아시아코끼리와 아프리카코끼리가 부부가 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동물원에서는 이종 교배를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종을 새로 만드는 것이 종족 보전 측면에서 바람직할 리 없다. 그래서 아프리카코끼리인 리카는 아시아코끼리들과 우리도 분리되어 있었다. 사쿠라와 리카는 쇠울타리 너머로 코를 쭉 뻗어 서로 휘감으며 안타까운 사랑을 확인할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2008년 리카가 죽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쿠라는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서울대공원에서 하루 1~2회 실시하는 코끼리 먹이 주기 및 설명회이벤트를 열긴 하지만 주로 젊은 코끼리가 주인공이다. 마흔일곱 살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코끼리가 된 사쿠라는 슬슬 사회생활에서 은퇴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실제로 요즘엔 점점 내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다채로운 사연을 간직한 디아스포라 코끼리 사쿠라는 노년을 맞아 비로소 삶에 평온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세 번째 고향이지만 여기에서 안식을 찾고 천수를 다하는 그날까지 평화로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디아스포라로서 앞 세대인 코끼리 사쿠라는 은퇴하여 평화를 되찾았지만 또 다른 디아스포라인 우리의 주인공, 아홉 마리 코끼리들의 파란만장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2005년 어린이대공원에 간 코끼리들에게는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그 사건으로 인해 이 코끼리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1. 연합뉴스 「재일교포 아동문학가 김황」(2007.8.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