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파란 계절 (1)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모네, 「베네콧의 부빙」, 1893.
1892년에서 189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센 강이 단단하게 얼어붙었다가 녹자 모네는 「부빙(浮氷)」 연작을 그렸다. 유리 같은 은회색과 금색 물 위에 파스텔 빛깔 얼음이 떠 있는 신비한 풍경이다. 가장 하얀 부분은 아예 색칠을 하지 않아 빈 캔버스로 남아 있다. 눈이 하얗다고는 하지만 주관적인 눈으로 보면 겨울 햇빛을 받아 색종이 조각을 뿌린 것처럼 반짝일 때가 많다는 점을 모네는 알았다. 눈 속에 구덩이를 파면 아래쪽에 파란 그림자가 생긴다. 우리 지구에서는 모든 그림자가 하늘 빛깔을 띠어 푸르스름하기 때문이다.
오팔 빛깔 하늘이 모스크의 타일이나 무대 배경 그림처럼 얼얼한 파란빛으로 변한다. 이런 색깔을 'azure' 파란색이라고 하는데 청금석(라피스 라줄리)을 가리키는 고대어에서 나온 단어다. 청금석은 금가루가 섞인 진한 파란색 광물로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나 궁궐벽 장식에 쓰였다. 윤을 낸 청금석을 모자이크에 쓰면 영혼이 깃든다. 가장자리가 흐릿하게 윤곽이 뒤섞이고 상이 어른거리는 새벽의 환영을 표현하는 데도 제격이다. 겨울이 되면 우리는 옷을 껴입지만 나무는 헐벗는다. 나는 헐벗은 나뭇가지에 걸린 하늘이 좋다. 섬세한 장식 무늬 같은 잔가지 안에 갇힌 하늘이 마치 납으로 틀을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 같다.
ⓒ pixabay
서쪽 하늘의 보름달은 가로등하고 크기도 빛깔도 밝기도 똑같다. 야행성 동물이나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달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가로등 역할을 해준다. 갑자기 조용한 기상나팔처럼 청회색이 하얗게 밝아지더니 씨꼬투리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사람도 보인다. 달그림자는 요술 잉크처럼 증발한다. 밤의 환영이 사라지고 낮의 환영이 넘쳐난다.
곧 해가 창백한 노란색 유령처럼 떠오른다.
ⓒ pixabay
얼음장 같은 아침이다. 발아래에서 여린 눈이 눌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오리가 꽉꽉거리는 소리 같다. 기온이 찰 때는 조그만 얼음조각들이 뭉쳐지며 불가사리 모양 팔들을 잃고 단단하고 바삭거리는 눈이 된다. 눈이 바삭거릴 때 좋은 점은 밤새 누가 다녀갔는지 알 수 있따는 것이다. 단단하게 뭉쳐지기 때문에 눈 집을 만들기는 좋지만 눈 위에서 걷기는 힘들다. 사슴들이 싸라기눈 위를 걸을 때처럼 다리를 끌지 못해서 디디는 자리마다 파인 데가 하나씩 생긴다. 오늘 동이 트기도 전에 신이 났는지 새들이 설형문자를 남겨놨고 사슴은 앞쪽에 있는 사람 다니는 길과 나란히 달려갔고 개 한 마리가 잠깐 파티오 테이블 아래 앉았다가 나무가 있는 쪽으로 갔다.
첫눈이 비교적 따뜻한 공기 중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이때 눈송이가 가장 크다. 눈송이 하나는 수백 개의 얼음조각이 떨어지면서 부딪혀 붙어서 만들어진 돗자리다. 되새, 갈가마귀 따위 새가 솜털눈으로 목욕을 하고 눈에서 구르고 미끄러지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면 즐겁니다. 도래까마귀 떼(까마귀의 불친절(unkindness of ravens)나 어치의 꾸지람(scolding of jays)이 모여 눈 놀이를 하기도 한다. 오늘은 나뭇가지마다, 또 지붕, 새집, 차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눈은 사물의 원래 모습을 따르며 세상을 덮는다. 우편함 위에 있는 지구본 모양 같은 사물 위에는 동그란 언덕이, 네모난 새집 위에는 평평한 덮개가, 목련 가지 위에는 울퉁불퉁한 이불이 얹혔다. 가지가 부러진 히코리나무가 마치 자유의 여신상 같아 보인다. 들어 올린 팔, 재색 가슴, 물결치는 나무껍질 치맛자락.
ⓒ pixabay
나는 첫눈이 내려 얼기 전에 장미나무에 겨울나기 준비를 해놓았다. 흙을 높이 쌓고 낙엽을 덮으면 단열재 노릇도 하는 눈가루 설탕옷이 마무리하듯 뿌려진다. 눈이 보온을 해준다니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눈 결정 담요가 닿는 부분은 차가워도 눈이 보온을 해주고 식물이나 극지 사냥꾼들이 찬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흙을 덮기 전에 장미 덤불을 철망으로 둘러놓아 마당이 조그만 굴뚝 수십 개가 있는 도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길을 따라 늘어선 집집마다 현관 등불이 흰색, 노란색, 금빛으로 빛나 안에 무슨 가스를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색을 띠는 먼 별 같다. 전등불 때문에 나무 뒤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목련 가지는 이리저리 꺾여 온통 팔꿈치다.
겨울은 파란 계절이다. 새벽은 청회색, 풍경은 청백색,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분도 우울하다.(blue에는 우울하다는 뜻도 있다. ─ 옮긴이) 해가 날마다 뜨긴 하지만, 붉은 색 · 주황색 빛을 쏟아내는 대신 구릿빛을 호수에 조금씩 뿌리기만 하니 햇빛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낮이 짧아져 빛의 저수지를 채우지 못하고, 동물들도 보기 힘들고 식물들은 대부분 죽어버린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신나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도 그랬듯이. 나는 눈이 햇빛 속에서 프리즘이 되어 여러 빛깔로 물결치는 모습이나 얼음이 철망을 덮어 불꽃놀이할 때 생기는 모양을 만드는 것도 좋다. 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십억 개의 순간적인 별이라는 것이 좋다.
파란 계절 (2)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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