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의 인문학, 겨울]은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의 '겨울'을 옮겨온 연재글 입니다.
<새벽의 인문학> 겨울
: 잘 보낸 시간 (2)
지은이│다이앤 애커먼
옮긴이│홍한별
ⓒ pixabay
80세가 넘어 시력이 약해졌을 때 모네는 자기 정원에 있는 가파른 아치 모양의 일본식 인도교를 한 차례 더 그렸다. 이번에는 짙은 가을 색으로 그렸다. 밤색, 붉은색, 금색, 주황색, 녹색 등으로 칠했고 파란 난간의 다리는 희미한 형체만 있을 뿐이다. 황토색과 흰색의 수직 방향 붓질이 화폭에서 반짝인다. 전에 그리던 안개가 형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둥글리고 여름날 강렬한 녹색과 화려한 꽃 색깔을 뒤덮는 아침의 인상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점점 탁해져가는 눈으로 바라본 추상이다.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하고 물감의 각과 묵직한 붓질이 서로의 관계, 세상과 이어진 끈, 떠오른 해의 반향, 순간적인 것에 매달려온 모네의 늙어가는 감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마치 모네가 무대 옆에서 다시 무대 쪽으로 붓을 쥔 손을 뻗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억에만 남아 있는 청중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여전히 활동적이고 창의적이고 살아 있으나, 쇠락해가는,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묵직하고 추상적이 되어가는 모네. 세부는 사라졌으나 모네의 세계는 여전히 빛의 변화하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파란색만 보여." 1924년 6월 지베르니에서 모네는 의사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은 안 보여. 그런 색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 내 팔레트에 빨간색, 노란색, 특별한 녹색, 어떤 보라색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지금은 전에 보던 것처럼 볼 수가 없어. 하지만 그 물감들이 어떤 색을 내는지 잘 기억하고 있어." 이 시기에 모네가 그린 해돋이는 어두워 보인다. 모네도 그렇다고 느꼈다. 몇 차례 수술을 받고 백내장을 제거한 뒤의 일이다. 수술 뒤 최근에 자기가 그린 그림이 온통 갈색인 것을 보고 낙담하여 몇 점은 파기했다. 눈에서 백내장을 벗겨내고 세상이 원래대로 보이자 모네는 수련을 좀 더 그렸고 전보다 더 밝게 칠했다. 친구이자 미술 거래상인 폴 뒤랑루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온통 비둘기 목 색깔 아니면 펀치 색깔로 타올라. 정말 놀라워."
Claude Monet, Water Lilies, 1906 ⓒ wikipedia
모네가 기록한 것처럼 바로 지금만큼 생생한 시간은 없다. 지금 현재의 진실만은 영원하다. 우리의 시간 감각은 자라면서 변한다. 어릴 때는 하루가 긴 것 같더니 늙으면 한 해 한 해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리는 다른 시간대를 지난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받아들인다. 모든 게 새로운 데다 대부분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양이 많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느린 신진대사를 통해 세상을 감각하고 놀랄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삶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충격 등을 주어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와 비상 상태에 대처한다. 그러면 뇌가 정보를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간이 느려진다. 이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나는 아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바로 이것이 우리를 정의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이 질문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뒤늦게 찾아오는 일이 많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에야 떠오르는 사람도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동안은 꾸준히 찾아오더라도 물리칠 수 있다가(특히 한창 자녀를 키우고 있을 때는) 나중에는 도저히 미루기 힘들게 닥치기도 한다.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 그럴 때는 달라진다. 나는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꿈속에서 자주 깼다가 다시 죽음을 부인하는 잠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배우자가 죽음에 다가가고 있고, 나보다 젊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도 깊은 잠을 자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 그럴 때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순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 혈관 깊숙이 흘러 들어 가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나를 가득 채운다. 그냥 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도니다. 빛의 세상에 태어났으니 내 감각은 성숙하고 또 쇠락하리라. 그러나 쇠락하는 날까지는 감각들이 내가 사는 신비한 왕국, 차마 상상해보지 못한 곳, 희망과 영광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으로 가는 관문이 되어줄 것이다.
ⓒ pixabay
우리는 허깨비, 괴물, 기적, 혹은 하나의 온전한 테마파크로 존재하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대체로 알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가끔 자기 모습을 거울을 통해 포착해보려 하면서 벌이는 숨바꼭질을 생각한다. 어느 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존재인 것 같다가, 다른 날에는 죄다 사기인 듯하고, 한순간은 스치듯 지나가고, 다른 순간은 절절하게 삶의 대위법 푸가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어는 손안에 놓인 조약돌 같아서, 성가시면서도 마음을 달래주는 염주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다. 이 순간만의 바로 그러함을 대신할 것은 없다. 존재는 늘 선물, 저절로 주어졌고 포장을 뜯는 도중이고 탐구되기를 기다리는 선물이다.
그저 살아 나타라라. 그러기만 하면 된다.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완전히 존재할 때, 그래서 좋건 나쁘건, 일이건 휴식이건 생각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동이 터올 때 잠자던 사람은 깨어나서 하늘의 마법에 의해 침대 밖으로 끌려 나온다. 잘 보낸 시간. 어쨌거나, 언제나, 내가 이 문장을 마칠 때까지, 펜을 들고 종이 위에 조그만 검은 점을 찍을 때까지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였고 지금은 지금이다. 존재의 지금, 무르익는 새벽.
<새벽의 인문학> 겨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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