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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의 저자와 함께!

얼굴이란 무엇인가 ~ <철학 연습> 강연회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했던대로 5월 30일(월), 대치도서관에서 "얼굴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철학 연습> 강연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이라는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강의장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아쉽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강연회의 요약 원고를 소개해니다. 아이폰으로 동영상도 찍었는데요, 이것도 곧 공개하겠습니다. ^^

 


얼굴이란 무엇인가?

—『철학연습』의 한 가지 주제



『철학연습』(반비, 2011)은 현대 철학 이론들을 명료하게 보여주려하기도 하지만, 우리 일상적 삶의 평범한 요소들이 숨기고 있는 의미들을 찾아나서는 작업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책입니다. 우리 일상을 이루는 것들, 가령 돈이나 터치스크린이나 사랑 같은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철학연습』이 골똘히 생각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얼굴에 몰두하고 있습니까? 발전일로의 화장품 산업과 성형 열풍이 잘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얼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이런 몰두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가장 일상적인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 얼굴 안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까요?


1. 잉여적인 것?

피부가 벽을 씌우고 있습니다. 거기 기관들이, 그러니까 눈, 코, 입이 걸려있군요. 이 이상한 칠판을 얼굴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얼굴은 그저 피부와 보는 기관(눈), 말하는 기관(입), 냄새 맡는 기관(코)의 조합이 아닙니다. 얼굴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그 초과적인 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낱말을 골라 ‘영혼’이라고 불러 볼까요? 오늘 이야기는 결국 이 초과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2. 시선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만들다.

이 얼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신의 어렸을 때 체험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철학연습』에 쓰인 글을 읽어보죠.

어린 사르트르는 실수 때문에 동네 부인들에게 핀잔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 거울 앞으로 가서 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 찌푸린 얼굴을 회상해보건대 그것은 자기 방위의 구실을 했다. 벼락같은 수치심이 공격해오자 나는 근육을 방패삼아 자신을 지킨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찌푸린 얼굴은 내 불운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감으로써 도리어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이것이 거울을 통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타인이 부과한 의미대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만들며, 이런 의미에서 타인의 시선 앞에 사로잡히는 것은 제한받음이고 구속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의 진실, 나의 성격 그리고 나의 이름도 어른들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야말로 타인의 시선 앞에 나는 먹잇감처럼 주어져 있다. 이와 달리 거울에 몰두하는 행위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내가 규정되는 것을 피해 자신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규정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울놀이는 나를 마음대로 규정하려 드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철학연습』, 94-95쪽)


시선은 그것이 타인의 것이든 나 자신의 것이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여합니다. 시선은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규정하기 때문이지요. 위 글에서 어린 시절의 사르트르는 거울을 바라봅니다. 바로 타인의 시선이 나 나 자신을 규정하는 일을 피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규정하기 위해서지요. 바로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직시함으로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거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는 일, 자신의 얼굴을 반성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하는 일, 가령 ‘화장’ 같은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 자신의 참다운 얼굴을 찾는 일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자기기만’일까요? 이런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얼굴은 얼마나 독창적인 원본인가 하는 것 말이지요.


우리의 헤어스타일, 화장하는 방식, 기분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정 등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다른 얼굴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다른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듯 우리는 남의 표정과 스타일을 복사한다. 이렇게 다른 것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얼굴을 꾸미고 살아가는 형태는 오늘날 성형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생기를 얻고 있다. 성형을 하는 이는 아바타를 구매하듯 상점에 놓인 얼굴을 구매한다. 또는 멋진 그림 하나를 자기 얼굴 위에 베껴 그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인생이라 해야 하는가?(『철학연습』, 251쪽)


어쩌면 원본 없는 인용의 시작도 끝도 없는 나열이 우리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의 인용에서 다른 인용으로, 하나의 표정에서 다른 표정으로 끝없이 이동하는 방랑의 결과일 테고요…….


3. 관상술

얼굴은 또한 미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얼굴이 마치 숨겨진 지도나 되는 듯 사람들은 얼굴 속에서 운명의 길들을 읽어내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바로 관상술 말입니다. 가령 이런 관상보기의 예가 있습니다. 『철학연습』에서 읽어보겠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로 성공을 거두었던 소설 가운데, 정비석의 『손자병법』이 있다. 춘추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월나라 구천(勾踐)이 20년 가까이 쓰디쓴 쓸개 맛을 보며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복수를 준비한 후 마침내 책략가 범려(范蠡)의 도움으로 승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승리를 얻은 구천이 그간 도움을 준 범려를 소홀히 하자 그는 이렇게 구천의 관상을 본다. “범려는 관상학적 견지에서 구천의 얼굴을 새삼스러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심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구천은 목이 길게 패어 있는데다가 입은 새 주둥이처럼 삐죽 나와 있는 ‘장경조훼형(長頸鳥喙型)’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상학으로는,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 같이 생긴 사람은 ‘환난(患難)은 같이할 수 있어도, 환락(歡樂)은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전해 오지 않던가.” 그 길로 범려는 구천에게서 도망칠 마음을 먹는다. 소설이 기록하고 있는 이 관상보기는 정사(正史)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를 ‘이성을 통해 확정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이 종종 관상보기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잘 예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관상학은 일종의, 외적 징후를 통해 사람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다.(『철학연습』, 304쪽)


사람들은 왜 관상 같은, 일종의 미신에 매달릴까요? 아마도 알 수 없는 운명이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천을 통해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할 지점에서 우리는 멈칫거리며 관상술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헤겔은 관상술에 탐닉하는 사람을 이렇게 혹독하게 대합니다.


누군가 당신 관상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치자. “자네는 정직한 사람인 양 처신은 하지만 사실은 억지로 그러는 척할 뿐, 본심은 악한(惡漢)이라는 것이 자네 얼굴에 드러나 있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행동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적어도 사나이답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장에 세상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의 따귀를 후려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응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밖에 없으니, 참으로 이렇게 대응하는 것만이 ‘인간의 현실성은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을 학문의 으뜸가는 전제로 내세우는 데 대한 반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철학연습』, 305-306쪽)


우리는 오늘 관상술 같은, 지식의 외관을 쓴 미신과 이 미신을 신봉하게끔 하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운명과 실천 등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4. 얼굴을 통해 무한자와 만난다?

앞에서 우리는 얼굴이란 잉여적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눈의 생김새, 눈의 기능, 입이나 코의 조형성과 기능 등등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얼굴입니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늘 ‘초과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이론이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다 한정하지 못하는, 무한한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얼굴의 무한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철학연습』에서는 얼굴의 이 무한성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래 한 구절 읽어 보겠습니다.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l'épiphanie)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다. 또 타자를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타자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이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 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주인처럼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도 나에게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에게 명령하는 타자의 얼굴이란, 형이상학의 대상, 규정 불능의 무한자, 곧 신의 흔적과도 같다. 신은 바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철학연습』, 128쪽)


이번 강연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머리에 씌워진 두건, 얼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강연회 마치고 질답 시간. 하나라도 더 질문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카페 숨도에서의 강연회도 기대되네요. ^^

 강연회 1부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화) PM 7:30 정독 도서관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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