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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31일(화), 서강대 앞 카페 숨도에서 <철학 연습> 강연회,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날의 강연은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란 주제로, 김경주 시인이 게스트로 나와 주셨습니다. <철학 연습> 독자라면 <철학 연습>에 김경주 시인의 글이 인용된 걸 기억하시겠지요? ^^ 그리고 사회는 허윤진 평론가가 맡아주셨습니다. (공지에는 없던 깜짝 사회랄까요? ^^)
그럼 강연장에 오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강연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공유해 봅니다.
―또는 삶의 반복
1. 잃어버린 시절을 찾는 자전거
그런데 소년의 자전거가 향하고 있는 하늘은 부드럽습니다. 밀밭을 부드럽게 떠밀며 바람이라도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부드러운 하늘의 색깔은, 세계가 한잔의 밀크커피 속에 들어있다는 독특한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마치 ‘추억의 시간’을 보여주는 풍경 같습니다. 추억 속에 종종 등장하는 시간, 저 잃어버린 시절을 찾는 일. 그것이 오늘 저녁 우리가 할 이야기입니다.
2. 잃어버린 시절은 반복을 통해 찾아온다
『철학연습』이 중요하게 다루는 현대 철학의 개념이 바로 ‘반복’입니다. ‘반복’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바로 우리는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문제는 곧 ‘반복’의 문제와 같습니다.
『철학연습』은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들뢰즈 세 사람의 철학자와 더불어 반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각각 42-43쪽, 65-69쪽, 186-188쪽)
키르케고르는 성서의 인물 욥의 반복에 대해 말합니다. “욥은 축복을 받았고 모든 것을 ‘갑절’로 되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이라고 부릅니다.”(『철학연습』, 43쪽) 그는 반복을 통해 가장 본래적인 실존에 도달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프로이트에서 반복은 일종의 질병을, ‘트라우마’를 성립시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단지 마음의 병을 해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류의 정신의 근본 국면을 반복에서 찾았습니다. 모세 살해에서 예수 살해로 이어지는 유대 역사의 반복, 죽은 아버지 숭배를 동물숭배 속에서 반복하는 토테미즘 등등. 이것은 모두 과거의 추억이 무의식 속에 보존되는 방식으로서 반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들뢰즈 역시 반복을 통한 우리 경험의 성립을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사의 모든 반복이 들뢰즈의 반복 개념 안에서 종합되고 있지요.
단지 철학자들만 반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복을 이야기하는 매우 풍부한 문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초대 손님 김경주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복의 문제가 그의 시의 중심에 있는데, 김경주 시에 관한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연습』의 한 구절을 읽어보지요.
반복을 통한 기쁨과 성숙의 문제를 우리 문학에서 찾자면,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반복에 관한 이런 구절을 시집에서 읽는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다시’ 보는 일, 곧 반복이 여기서 핵심을 이룬다. 이 반복의 경험과 관련해 시인 김경주는 이렇게 말한다. “제 시의 중요한 코드 중에 휘파람이 있는데요. 어린 시절 대중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신기했어요.……언젠가 타이의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취해 휘파람을 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오열할 것 같았어요.” 과거의 휘파람은 현재의 휘파람이나 바람 속에서 반복된다. 여기서 과거 시간에 뒤늦게(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것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반복인 것이다.(『철학연습』, 187-188쪽)
이런 반복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 경험을 성립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인지 오늘 저녁 우리는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생각입니다.
3. 반복의 다양한 경험들
반복에 대한 몇 가지 인용들과 함께 생각을 전개시켜 볼까 합니다. 문학작품들에서 반복을 다루는 제 글 「이미지와 시간」(『익명의 밤』, 민음사, 2010)에서 주로 발췌한 글들입니다. 문학 작품들이야 말로 사유가 공허한 허공을 디디고 내려앉지 않도록 단단히 한 걸음 한 걸음을 바닥에서부터 떠받쳐주는 사유의 디딤돌이지요.
1) 반복(또는 시간을 되찾기)에 대한 일반적 경험
반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경험을 들자면, 무엇보다도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놀이처럼, 물을 담은 도자기 찻잔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되지 않던 그 종이가, 물에 약간 닿는 것만으로도 곧 펴지고, 꼬부라지고, 물이 들고, 각기 형태가 달라져서, 꽃이나 집이나 사람 등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집 뜰에 있는 모든 꽃들, 스완씨의 집 뜰에 있는 꽃…… 성당과 콩브레 전체와 그 근교…… 이 모든 것들이 형태를 이루면서 나의 한 잔의 홍차 속에서 나왔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재미있게도 프루스트와 가장 거리가 멀게 보이는 작가인 사르트르에게서도 위와 같은 프루스트적 시간 찾기가 발견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봉봉 과자를 줄 때, 어떤 여인이 내 곁에서 매니큐어를 칠 할 때, 시골 호텔의 화장실에서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 야간열차의 천장에 매달린 보랏빛 전등을 볼 때, 나는 내 눈과 코와 혀에 이제는 사라진 당시 영화관의 불빛과 냄새를 되찾는 것이다.(사르트르, 『말』에서).
매우 지적인 독일 작가 제발트 역시 잃어버린 시절을 되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프루스트와 유사한 보도석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두 작가를 비교한 글인데, 제 책 『익명의 밤』에서의 인용입니다.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며 서로 중첩되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현재와 과거를 제발트는 노골적으로 프루스트적 코드를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포석 체험을 떠올리며 이 구절을 읽어보라. “블라슈스카와 네루도바 사이의 집들과 마당 사이로 난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한 걸음, 한 걸음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발밑에서 고르지 않은 보도석(步道石)을 느끼는 동안 언젠가 내 발 밑에서 이 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마비되었다가 이제야 다시 깨어나는 감각들을 통해 내게 기억이 열리는 것 같았어요.”(『아우스터리츠』에서) 제발트의 주인공은 프루스트의 화자와 똑같이 발에 부딪치는 포석의 감각 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중첩내지 종합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프루스트의 유명한 다음 구절을 위한 오마주라 할만하다. “몸의 균형을 다시 찾으려고, 먼저 번 것보다 좀 낮게 깔린 다른 포석에 한쪽 발을 딛는 순간, 지금까지의 실망은 나의 인생의 각 시기의 것과 똑같은 행복감 앞에서, 그러니까 발베크 부근을 마차로 산책했을 적에 내가 인식할 줄로 믿은 나무들의 전경이나, 마르탱빌르 종탑의 전경이나, 달인 물에 담근 마들렌 한 조각의 맛이나, 그 밖에 내가 얘기했던, 뱅퇴이유의 최후 작품에 종합되고 있는 것 같이 보인 다른 여러 감각들이 나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행복감 앞에서 사라졌다.”(『익명의 밤』, 136쪽)
2) 영화에서 반복과 지각
장-루이 세페르(Jean-Louis Schefer)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는 시간이 내게 하나의 지각으로서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 시간 자체가 어떻게 지각된다는 것일까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은 현재, 이전의 현재에 환원되지 않는 과거, 이제 오게 될 현재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란 없다.”(들뢰즈, 『이미지-시간』에서) 즉 과거의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현재적 지각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3) 사랑에서의 반복과 기원의 부재
여기 사랑에 대한 두 개의 놀라운 텍스트가 있습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입니다. 혹시 옛 사랑을 새로운 사람의 얼굴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이 두 텍스트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랑은 현재 속에서 과거의 인물의 반복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반복만이 있을 뿐 기원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역시 『익명의 밤』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에코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공명내지 종합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국면을 엿볼 수 있다. 에코의 소설은 모든 연애의 기원에 있는 사랑을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사랑했던 파올라나 시빌라 같은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사랑, 또는 그가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능케 했던, 현재와 공명하는 과거 자체를 그는 찾고자 한다. ‘과거 자체는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에코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파올라에서 시빌라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찾아 헤맸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로아나』에서) 여기서 화자는 ‘기원적 과거’의 비밀 바로 앞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 배후에서 그 이미지를 가능케 한 과거의 한 순간을 식별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자는 끝내 뭐라 말하는가? “나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로아나』에서) 현재 뒤에 숨겨진 과거를 그 자체로 정시할 수 있을까? 마치 현상의 배후에서 순수 과거로서의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의 바램처럼?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 그 자체로 직관 가능한 이데아와와 같은 진리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과거는 현재와의 공명 속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며 그 자체로의 과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서 회상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검게 변한 태양,’ 텅 빈 암흑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오랜 성찰 끝에 최종적으로 결론내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 자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발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자체가 있어야할 자리엔 검은 태양처럼 아무것도 없으며, 텅 빈 무가 있다. 이것이 알려주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는 두 항의 공명내지 종합을 통해 성취된다고 여러 번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과거의 항은 그 자체로 기원으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에코의 화자는 자신의 모든 사랑의 기원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거기엔 ‘무(無)’가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텍스트는 현재와 과거의 공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지, 기원적인 과거 자체의 사랑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미 토마스 만이 잘 보여준 바였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쇼사 부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유는 이 사랑의 배후에 과거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 회페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비난하고 싶은 기분으로 이 행실이 나쁜 부인을 보면서, 그녀를 보면 무언가가 연상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마의 산』에서) 그런데 한스 카스트로프는 쇼사의 배후에 있는―또는 배후에서 연상되는―회페를 사랑하였는가? 천만에! 그는 회페를 사랑하고 쇼샤 부인을 통해 이 사랑을 또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이란 한번이며, 현재와 과거가 종합되면서 그것은 가능해진다. 별개로서 현재와 과거 각각은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무일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로아나』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기원적인 사랑이란 없다는 것이다. 과거는 사후적으로 현재와의 공명 속에서만 사랑의 텍스트로 완성될 뿐이며, 결국 시간적 차원에서 이미지의 형성은 ‘기원의 부재’를 전제한다고 말해야 한다.(『익명의 밤』, 138-139쪽)
4) 반복과 무의식
마지막으로 반복은 무의식을 경유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늘 새로운 경험을 하는 듯이 여기는 것은 반복이 의식되지 않는 층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최동훈 감독의 영화 「전우치」(2009)가 이 점을 잘 알려줍니다.
삶이 반복되긴 하는데, 자리를 바꾸고 위장된 채로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는 예술 작품이 최동훈의 영화 「전우치」(2009)이다. 영화 전체가 위장된 반복의 문제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는데, 내레이션을 통해 위장된 반복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마성에 빠진 표운 대덕과 요괴들은 지상으로 쫓겨 와 인간의 몸속으로 숨어들었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 마지막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는 구절만큼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코기토에 대한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도 없으리라. 윤회 속에서 모든 것은 위장된 가면의 반복이며, 그 자체로 정체성이 확정된 주체란 없다.(『익명의 밤』, 143쪽)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기 의식’입니다. 자기에 대한 앎에서 성립하는 것이 이 의식이고 이것이 근대적 주체의 근본이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분열이 현대적 주체를 특징짓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반복’은 주체의 이 국면과 관계하고 있지요. 앞서 보았듯 반복은 무의식을 경유해 작동합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작동하는 반복이 주체의 새로운 자리를 가리켜 보이고 있군요……. 만일 ‘윤회’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반복의 개념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철학연습』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철학자 들뢰즈는 ‘윤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동일한 과거를 연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métempsychose)라 불리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은 자신이 연기할 소리의 높이와 톤, 그리고 아마도 가사까지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가사를 말하든 곡조(air)는 늘 같다.”(『차이와 반복』에서) 돼지가 철학자 속에, 범죄자가 성인 속에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일까요? 마치 윤회하듯? 김경주 시인의 시를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그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존재다. 전생에 음악이었지만 현세에 사람으로 다시 환생한다.”
늘 우리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만 우리의 현재를 지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는 완벽하게 새로운 이미지의 범람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잃겠지요. 이 말은 우리는 현재의 삶 안에서 늘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삶은 이런 반복 속에 표류합니다.
그리고 이날 강연 역시 음악이 함께 했습니다. 이아름님이 시작과 마무리를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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