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서관 기행 연재, 여덟 번째 꼭지입니다. :-)
...에 이어 여덟 번째로 소개하는 도서관은 바로 '정독도서관'입니다. '어른들의 도서관 정독 도서관'편은 3회에 걸쳐서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지난 포스팅은 [도서관 기행] 카테고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어른들의 도서관 정독 도서관 ①
by 강예린 & 이치훈
대도시 서울의 역사, 학교와 바꾼 도서관
1976년, 서울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있던 경기고등학교가 지금의 삼성동으로 이전을 한다. 이전하고 남은 학교 건물에는 정독도서관이 들어선다. 당시의 통계로는 국회도서관 국립 중앙도서관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세번째로 큰 도서관.
그런데 의문이다.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서 서울의 요지에 있던 고등학교가 이전한 걸까? 그것도 당시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기 고등학교가. 주로 지가가 낮은 도시의 외곽이나 녹지에 도서관이 지어지는 요즘 상황을 생각하면 도심 한복판에, 걸어가기도 쉽고 찾기 좋은 곳에 공공 도서관이 들어선 것은 파격이다. 하지만 사실 서울의 중심에 도서관을 짓기 위해서 학교가 이전한 것은 아니다.
정독도서관이 개관할 당시 70년대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지금의 강남, 잠실은 도로도 없고 건물도 몇 채 없는 논 밭이었다. 영등포를 제외하면 한강의 남쪽은 대부분이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당시의 서울은 한강 이북의 사대문 안과 그 주변의 일부에 불과했다. 산업화의 바람으로 점점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강북 구도심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힘든 상황에 이른다.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는 서울의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서울시는 이른바 ‘삼핵 도시계획’을 수립한다. 한강 이남의 동쪽과 서쪽에 서울의 새로운 중심부를 두 곳 더 만들어 강북 구도심의 인구를 분산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림 1 대도시 서울의 성장과정 60년대말 70년대 초까지도 지금의 강남은 서울이 아니었다.
서초, 압구정, 역삼 대치동에 이르는 영동지구 개발 계획이 수립되고, 잠실 지구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계획되었다. 78년에는 지하철 2호선 공사가 착공하고, 허허벌판이던 강남에는 아파트와 높은 빌딩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물만 짓는다고 사람들이 이주해 삶을 꾸릴리는 만무하다. 사람들이 들어가 살만한 조건이 필요했다.
인구 분산을 위한 서울시의 여러 정책 중에 단연 효과를 발휘한 것은 강북의 명문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시작으로 1978년 휘문중고등학교, 1980년 숙명 여중고와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광복 전후를 통해서 한국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기고등학교 이전은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들의 반발에 주춤하였다. 정재계에 포진해있던 국내 경기고 동문은 물론 재미동문들까지 합세하면서 강한 반대 여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반발을 달래기 위해 서울시와 정부는 학교 이전 후 “화동의 교사를 허물지 않고 말끔히 개수선하여 도서관으로 쓰겠다.”는 약속을 한다. “교정도 단장하여 도서관 뜰로 남기겠다.”고 했다. 정독(正讀) 도서관의 ‘정’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이름에서 왔다. 정독도서관은 대도시 서울이 전쟁을 치르듯 커가던 와중에 서울 한복판에 독특한 입지로 남게 된다.
어른이 된 도서관
정독도서관은 장서 50만여권, 하루 평균 이용자 수 6,000명, 하루 대출되는 책이 7,000권이 넘는 전국 최대 규모의 공공 도서관이다. 한해 200만명이 넘는 숫자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서관이다.
도서관의 나이도 올해로 서른 다섯 해를 맞는다.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의 효시를 1901년 부산에 세워진 홍도 도서관(현 부산 시립 중앙도서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의 역사는 100여년 남짓으로 생각할 수 있다. 2010년 현재 전국의 공공 도서관은 759개인데, 60년대 중반까지 공공 도서관이 20여개가 채 안되었고 정독도서관이 개관한 76년 당시 70여개의 공공도서관이 있었으니 양으로만 따진다면 정독도서관이 개관한 이래 우리나라의 도서관은 10배의 성장을 했다. 그러니 정독도서관은 약간의 억지를 섞어서 이야기 한다면 10형제의 맏형 정도 될것이다. 대도시 서울이 커가는 역사와 함께 했던 도서관이면서 그 규모와 나이 면에서 정독도서관을 우리나라의 어른 도서관으로 꼽는 데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어온 나이만큼 정독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이 있다. 60년생 중견배우 김학철이 “백수시절 죽치고 살며 소설이란 소설책은 죄다 독파했다”는 곳이 정독도서관이다. 정독도서관에서 공부하면 고시에 합격한다고 해서 청춘을 이 도서관에 바친 현직 법조인들도 부지기 수란다.
정독도서관 이전 경기고등학교의 역사까지 겹치면 이 장소는 더욱더 특별해진다. 세계시민이었던 백남준은 경기고 출신이었다. 동문이라는 이유로 서울시와 문화부 주체의 ‘백남준 기념사업회’는 정독도서관 부지[1]에 백남준 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사서들이 일하고 있는 2층 사무실에는 가끔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들이 들러 “여기가 학교 다닐 때 내 반이었던 것 같은데?” 하며 추억들을 회상하시기도 한다.
도서관이 많지 않던 시절 정독도서관은 개관하자마자 공부할 공간을 찾는 학생과 직장인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새벽 네 시부터 도서관이 열기를 기다려 “입장”하던 풍경은 일상적이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학생들이 중상을 입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정독도서관 몽둥이로 질서 잡다 세 학생 추락, 중경상”이라는 제목의오랜 기사는 도서관이 당시 얼마나 인기였는지 짐작케 한다.
사고는 이날 상오 5시쯤부터 몰려든 학생 및 일반인 1만여명이 도서관 앞 가회동 골목길과 창덕여고 입구 등 3개의 골목길에서 약 5백m씩 줄을 서 혼잡을 이루고 있었는데 질서를 잡는다고 도서관 수위 및 경비원 13명이 몽둥이를 휘둘러 학생들이 이를 피하려고 사고 지점으로 몰리는 바람에 일어났다.
공공 도서관이었음에도 몇 시간씩 기다려 입장료 10원을 내고 이용하던 시절이었다. 소위 386세대부터 장년층, 노년층까지 우리 사회 어른들의 추억에 정독도서관은 중요한 장소로 각인되어있다. 정독도서관은 가장 어른스러운 도서관이면서 어른들의 도서관이다.
[1]백남준 기념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는 장소는 정독도서관 내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부지이다. 원해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 맞은 편에 있다가1981년 전두환 정권 당시 보안사의 요구로 정독도서관으로 이전하였다. 이전된 소격동 터에는 테니스장이 들어섰다. 최근 소격동 자리에 국립 현대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종친부의 원래 터가 발굴이 되고 다시 제자리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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