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가 아니라
책을 읽었는데 왜 뽐내지를 못하니?
그렇다. 자고로 인문사회과학 책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남들에게 뽐내는 데에 있다. 나 이런 책도 읽었어, 나 책 좀 읽는 여자야, 난 이런 것도 알고 있다규. 철학, 역사학, 심리학, 정치학 등 분야를 불문하고 모든 사회과학 책들은 기본적으로 뽐내기를 그 존재 기반으로 한다. 남들에게 유식을 뽐낼 수 없다면, 대체 왜 비싼 돈을 내고 그 두꺼운 책들을 서점에서 사나른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겸손함의 덫에 걸려들어 책을 읽어놓고도 제대로 뽐내지를 못하고 있다. 또 약간의 경박함은 친근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자칫 잘못 뽐냈다간, 순식간에 비호감으로 전락할 수 있어 뽐내기를 아예 포기하고 마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다. 왜소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좀 더 세련되게, 교묘하게, 응큼하게 뽐내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뽐내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 마침내 인센티브가 마구 입금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반비에서 ‘인문서로 제대로 뽐내는 법’을 소개하겠다.
<철학 연습>으로 하는 철학 뽐내기 연습
1. 청바지 가게에서
청바지 안 입는 사람은 없다. 특히 20대라면 가장 많이 들르는 옷가게가 청바지 가게다. 청바지 가게를 돌다 보면 리바이스, 이 가게를 꼭 가게 된다. 여친과 함께 청바지 가게를 전전하다 마침내 리바이스 가게에 들르게 되었을 때, <철학 연습>의 이 부분을 떠올려보자.
레비스트로스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거대한 두 개의 세계를 양분한다. 청바지의 세계와 인류학(민족학)의 세계 말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미국 버클리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 이야기다. 아내와 함께 레스토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종업원이 대기자 명단을 작성하려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종업원은 이렇게 되물었다. “The pants or the books?” 청바지 회사 설립자요, 아니면 인류학 저술가요? 이 재치 있는 유머엔 모종의 진실이 담겨 있다. 리바이스 청바지를 만드는 리바이스트라우스사(Levi-Strauss & Co)가 바지 업계에서 가지는 거대한 상징적 위상을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현대 인류학과 구조주의에서 차지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저자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레비스트로스가 현대 인류학과 구조주의에서 갖는 위상을 핵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리바이스 가게에서 여친이 아무런 의심 없이 스키니진과 부츠컷 사이를 오갈 때, 바로 그 때가 뽐낼 타이밍이다. 문득 생각난 척,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나는 늘 그런 사람인 척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리바이스 가게에 오면 꼭 레비스트로스가 생각나. 이름도 똑같고, 업적도 비슷하잖아. 청바지에 리바이스가 있다면 인류학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있는 셈이지.
이 한 마디면 당신은 여친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쇼핑을 나온 할 일 없는 청년에서 순식간에 현대철학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범상치 않은 지식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 한 마디가 여친의 귀에 들어갔다면 <철학연습>을 사느라 지출한 비용을 전액 회수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혹시 여친이 갑자기 청바지에서 현대철학으로 눈길을 돌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쏟아낼 우려가 있는 성향이라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예컨대, 이렇게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
리바이스 가게 오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식당에 가서 기다리는데 종업원이 와서 이름을 묻더래.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라고 했더니, 종업원이 청바지회사 사장님이냐고 하더래.
이 정도의 고품격 개그만 선보일 수 있어도 <철학연습> 비용은 회수하고도 남는다.
2. 헬스클럽에서
헬스클럽에서도 얼마든지 뽐내기가 가능하다. 역기를 들어올리며 초콜릿 복근 만들기에 힘쓰는 도중에도 뽐낼 타이밍은 반드시 있다. 역기 들기 한 세트가 끝나고 30초간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 <철학연습>의 이 구절을 떠올려 보라.
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다만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 듯 생각 역시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의 잠을 깨우려고 한다.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우리는 혹시 이런 머릿속의 악마들과 더불어 한 평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해보라고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삶인데!
운동을 쉬면 근육도 쉰다. 야구의 신 양준혁도 은퇴 후 6개월쯤 지나면 운동선수의 몸도 보통 사람처럼 된다고 증언하지 않았던가. 운동을 몇 달 쉬었더니 그 사이에 근육이 다 사라졌다고 슬퍼하는 간꽁치 친구가 옆에 있다면 문득 이렇게 조언해 보자.
몸도 그렇고 생각도 그래. 생각을 쉬면 머릿속에 편견 같은 게 가득차 버려. 그게 바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지.
헬스클럽에서 철학을 떠올리는 센스라니! 이 한 마디면 당신이 아무리 간꽁치 같은 슬픈 몸매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헬스클럽에 있는 다른 초콜릿 복근들이 당신을 쉽게 보지 못할 것이다.
3. 계란프라이를 할 때
휴일에 모처럼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날, 배는 고픈데 딱히 먹을 것도 없고, 요리하기도 귀찮아 냉장고에 있는 계란이나 부쳐 먹을까, 하며 프라이팬에 계란을 탁, 깨넣는 순간 <철학연습>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려 보자.
토리노에서 정신병이 니체의 사유를 산산이 깨트렸을 때, 그 깨어진 껍질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바로 현대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이데거, 들뢰즈, 푸코 등 수많은 현대철학이 니체의 조언을 얻으며 전진하였다. 왜 니체여야 하나? 답은 명확하다. 현대적 사유가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선 망치를 들고 탑을 무너뜨리는 자, 바로 플라톤 이래의 서양 철학의 가치를 전도시키는 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철학사에서 니체가 갖는 위상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 저자, 그 표현이 너무 적절하다 보니, 심지어 계란프라이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니까 계란이 프라이팬 위에서 탁 깨지는 그 순간,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니체가 떠올랐다는 식의 고품격 뽐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병 때문에 니체의 사유가 깨지기는 했지. 하지만 그 깨진 껍질에서 현대철학이 흘러나왔잖아?
뭐 이런 식의 혼잣말을 중얼거려보라. 아마 가족들은 당신이 지금까지 방안에서 뒹굴거리며 인터넷 게임이나 클릭질하다 나온 것이 아니라, 니체가 나오는 심오한 철학책에 몰두하다, 너무 몰두한 나머지 끼니마저 잊고 있다가 뒤늦게야 계란프라이로 소박한 점심을 먹으러 나온 고고한 영혼의 소유자로 바라볼 지도 모른다.
이 정도만 예시를 제시해도 나머지는 충분히 집에서 셀프 연습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뽐내기는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습성이므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어 있다. 자, 이제 다시 <철학 연습>을 펴 들고 나에게 맞는 적절한 문구가 어디에 있는지 직접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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