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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연재]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完)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2-2) 조선 코끼리 수난사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2부 한반도에 왔던 코끼리들


    2장 조선 코끼리 수난사



 

동물 상인 하겐베크가 대한제국에 코끼리를 팔다

 


우리나라에 처음 근대적 동물원이 들어선 것은 순종 3년이던, 1909년의 일이었다. ‘근대적 동물원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동물원은 그 자체로 매우 근대적인 시설이다. 근대적 동물원의 시초는 1752년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에 설립된 쇤브룬 동물원이다. 초기의 쇤브룬 동물원은 코끼리, 낙타, 얼룩말 등 다른 대륙에서 데려온 열세 종의 동물을 정원 이곳저곳에 전시해 놓은 구조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동물들을 구경하며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아들인 요제프2세는 쇤브룬 동물원을 일반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진귀한 동물들을 선보임으로써 왕의 권력 내지는 오스트리아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로 동물원은 유럽 곳곳에 생겨났고 1800년대에는 다른 대륙으로까지 확산되었다.


▲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의 전경. 현재 쇤브룬 동물원은 궁전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 칼 하겐베크의 초상화. 그가 세운 하겐베크 동물원은 함부르크의 대표적 관광 명소가 되었다.


단순한 철책 우리 안에 동물들을 넣어 두었던 초창기 동물원들은 1907년 하겐베크 동물원 설립을 계기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독일 출신의 동물 상인 칼 하겐베크(Carl Hagenbeck)가 독일 함부르크에 만든 하겐베크 동물원은 모트, 관목, 바위 등이 철책을 대신했다. 자연과 최대한 가까운 환경에서 동물들이 살게 하려는 하겐베크의 의도가 반영된 설계였다.

동물원 역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 국제적인 상인은 우리나라 코끼리 역사에서도 한 획을 긋는다. 우리나라 동물원에 최초로 코끼리를 들여온 사람이 바로 하겐베크다.

세계 곳곳에 동물원이 세워지는 흐름을 타고 1909년 조선에도 근대적인 동물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굴욕적이게도 조선 땅에 들어선 동물원은 조선 사람들의 뜻이 아닌, 일본인들의 뜻에 따라 조성되었다. 더욱 굴욕적인 것은 동물원이 조선의 왕들이 거처하던 창경궁 안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순종 3년 당시, 조선은 숨이 다해 가던 나라였다. 대한제국이라는 그럴듯한 새 이름을 내걸기는 했지만 을사조약으로 외교권마저 잃은 마당이니 나라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태였다. 이 해 일본은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했다. 다른 장소도 아닌 수백 년 된 궁궐 안에 굳이 동물원을 만든 것은 명백히 지배자로서 일본의 지위를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길목에 도로를 놓은 것이나 일본의 국화인 벛꽃을 수천 그루나 심은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바람에 창경궁 안의 많은 건축물이 훼손되었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 111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은 이렇게 굴욕 속에 문을 열었다. 그다음 해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창경원에는 호랑이, , 원숭이 등 72361마리의 동물이 있었는데 이 중 코끼리는 없었다. 그러다 하겐베크가 코끼리를 한 마리 팔면서 19126월 인도코끼리 한 마리가 들어왔다. 비록 그사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어쨌든 500년 만에 다시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터를 잡은 것이다. 말로만 듣던 코끼리를 직접 보러 몰려든 사람들로 창경원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창경원 코끼리들의 슬픈 운명

 

▶ 창경원에 새로운 코끼리가 들어왔음을 알리는 신문기사. 동아일보 「상(象)군부처입원」(1925.7.4)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코끼리는 192465일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몇 분 동안 경련을 일으킨 끝에 숨을 거두었다.

1925년 이번에는 두 마리의 코끼리가 바다를 건너 창경원에 도착했다. 아마도 일본의 동물원에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 코끼리들은 비교적 평탄한 나날을 보낸 것 같다. 물론 당시 동물원 시설은 지금보다도 열악했을 터이니 마냥 평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병에 걸리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신 훨씬 더 잔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기 약 열흘 전이던 1945725, 창경원의 일본인 책임자가 전 직원을 불러 놓고 도쿄에서 온 분부를 전했다.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류는 모두 죽여 버려야 한다.”

창경원이 폭격을 당하면 동물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게 된다는 이유였다. 이미 1943년 도쿄의 우에노동물원에서도 같은 이유로 코끼리를 비롯한 여러 동물이 몰살되었다. 이번에는 창경원 차례였다. 직원들은 독약을 받아 동물들의 저녁 식사에 섞었다. 그날 밤 코끼리를 포함해 150여 마리의 동물들이 울부짖으며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직원들도 눈물을 흘렸다.

설혹 이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코끼리는 또 다른 불행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거친 창경원의 몰골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코끼리를 기증하다

 

6.25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부터 창경원은 재건되기 시작했고 1955524일에 다시 코끼리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이 태국에서 구입해 기증한 세 살배기 수컷 아시아코끼리였다. 이것은 후에 상공부장관을 지낸 천우사 사장 전택보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전택보 사장은 서울시 안에 설치된 동물원 재건 분과 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동물을 사들여 올 돈을 모아야겠는데 돈을 내라고 하면 모두들 싫어할 것 같아 동물을 한 쌍씩 사서 맡기도록 권유했다. [……] 그래서 사자는 값은 쌌으나(그때 한 쌍에 1200달러였다.) 백수의 왕이므로 경제계의 왕인 한국은행에 할당하자 해서 그렇게 했고 이병철 씨에게는 당신이 제일 부자이니 제일 큰 동물을 기증하라고 해서 4천 달러짜리 코끼리를 기증하게 했다.”


▶ 1984년 5월 1일 서울동물원 개원식.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도 참석했고 많은 인파가 몰렸다.


정부 예산은 모자란 상황에서 값비싼 동물들을 사 오자니 기업인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이 좋아 기증이지 기업인 입장에서는 삥 뜯기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일 부자가 기증한 제일 비싼 동물 코끼리는 이름도 그에 걸맞게 자이언트라고 붙여졌다. 자이언트는 창경원과 서울대공원에서 살다가 20093월 눈을 감았다. 58세로 코끼리로서는 최고령의 나이였다. 코끼리의 수명이 60~70세인 것을 감안하면 동물원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비교적 천수를 누린 셈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전쟁 통에 사라져야 했던 이전 코끼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창경원 동물원 재건을 시작으로 차츰차츰 전국 주요 도시에 동물원이 들어섰다. 1965년 부산 동래 동물원, 1970년 대구 달성 공원 동물원, 1971년에 광주 사직 동물원, 1976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어린이 동물원, 1978년 전주 동물원, 1979년 용인 자연 농원의 동물원 사파리, 1982년 부산 성지곡 동물원, 2002년 대전 동물원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1984년에는 서울 대공원이 완공되면서 창경원의 동물들이 대규모로 이사를 해 왔다. 창경원은 창경궁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자연스럽게 코끼리 수도 늘었다. 2012년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코끼리 수를 표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정렬 순서는 해당 장소에 코끼리가 맨 처음 들어온 연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부산 동래 동물원과 성지곡 동물원은 수년 전 문을 닫았으니 우리나라의 대표 동물원에는 최소 한 마리 이상의 코끼리가 있는 셈이다. 제주도 점보 빌리지는 동물원이 아니라 태국식 코끼리 공연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많은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는 동물원은 서울 대공원이다.

현재 서울대공원에 남아 있는 다섯 마리 코끼리는 1985년 미얀마에서 온 키마와 칸토 커플, 2003년 일본에서 온 사쿠라, 2010년 스리랑카에서 온 가자바와 수겔라 커플이다. 이중 유일한 싱글인 사쿠라는 유독 기구한 디아스포라의 사연을 가진 코끼리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