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서동욱과 돈독한 사이의 편집자가 <철학 연습>의 최종 표지와는 달리 하얀 운동화 사진이 놓인 심플하디 심플한 시안을 보자마자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편집자의 (유머러스한) 센스가 빛났던 "인문학의 평행이론 -막 갖다붙이며 오바하는 글쓰기 : 서동욱-신해철 편"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평행이론 다음 편을 기대하시는 분들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만, 아쉽게도 오늘은 다음 편은 아니고요, 그 글에서 언급했던 '철학 연습' 표지 시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책이 나온지가 언제인데 이제 표지 시안 얘기를 포스팅하네요. ^^
 

먼저 <철학 연습> 실제 표지를 보시죠. 

그리고 이 최종 표지가 나오기 전까지 표지 시안들입니다.




지금의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초기 시안입니다. 




그리고 이전 포스팅에서 얘기했던 '운동화 사진이 놓인' 표지 시안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 이 책은 약속의 땅에 다가가는 일군의 나그네를 위한, 평원과 능선을 주파하는 운동화 같은 것이다.

<철학 연습> 책을 펴내며 중

철학 연습에서 연습에 방점이 찍히는 느낌이랄까요? 사유의 연습을 도와주는 책이라는 느낌의 디자인입니다. 하지만 이 표지는 채택되지 않았지요. ^^



최종 표지와 반비 노트 표지에 사용된 이미지들 - 외발자전거를 탄 소년, 자전거-
이 들어간 시안입니다.




이 표지 시안에 띠지를 넣어 보고 고민한 결과 현재의 표지가 탄생했답니다. 
 

어쩌면 표지 시안을 보고 현재의 표지보다 시안 중 하나를 더 맘에 들어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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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65 발행된<기획회의> 297호 출판사 서평’란에 실린 반비 편집자의 글입니다.


친절하지만 기품 있는 철학 교양서를 만들다


철학 연습

  서동욱의 현대철학 에세이

서동욱 교수가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를 한다. 이것만으로도 우선 관심이 갔다. 서동욱 교수는 탄탄하고 꼼꼼한 연구로 정평이 나 있고, 물론 시인이나 평론가로도 알려져 있는 분이긴 하지만,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네이버에 들어가 보니 글 한 편 한 편마다 댓글이 몇백 개씩 달려 있다. 가령 이런 것.


"어렸을 적에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진부하고 어렵고 현실적으로 의미 없는 넋두리쯤 되는 양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지혜, 지식들을 고맙게도 책을 통해 공짜로 얻은 후엔 철학, 사랑, 자유, 지혜, 평등, 존중 등 수많은 언어로 표현된 가치들이 얼마나 인간에게 필요하고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 돌쇠 (myuc****)


인문서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독자들 수준을 너무 낮춰보는 나쁜 버릇이 생긴다. ‘이 책은 어려우니까 안 팔릴 거야, 이 책은 두꺼우니까 사람들이 안 보겠지......’ 하지만 어려워서 외면당한다는 것은 절반만 사실이다. 좋은 책들은 어려워도 잘 읽힌다. 최근 철학 교양서들이 독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말과의 씨름, 생각과의 씨름은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쁨 중 하나인데, 책 만드는 사람들이 친절함과 안이함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쉽게 만들겠다면서 알맹이들을 빠뜨리다 보니 독자들에게서 더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철학 연습>은 이런 고민의 와중에 만들어졌다. 서동욱 교수의 글이 이런 고민을 자극했다. 현대철학의 진지한 고민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면서도, 우리 삶과 밀착시킴으로써 더 흥미롭게 만드는 글쓰기.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철학 개론서가 아니라, 저자의 머리와 마음을 통해 충분히 소화된 이야기만을 전하는 철학 교양서. 앞으로도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마치 이런 고민에 답하듯, 저자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터치스크린, 전자책 돌풍이 책읽기와 글쓰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관한 대목이다.


통계나 호구조사 같은 ‘생각하지 않는 계산’이 아닌 진짜 사유의 내용을 담은 정보는, 동굴 벽화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요술이 아닌 지적 노동의 담당 영역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즉 성찰과 연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기기 또는 새로운 장난감을 구입한 이들은 짧은 설렘 뒤에 곧 허무에 빠지기 일쑤다. 인간의 지적 노동의 진보와 새 상품은 아무 상관이 없기에.(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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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기념 강연회 첫 번째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 정독도서관)
출간 기념 강연회 두 번째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 숨도 카페)
얼굴이란 무엇인가?  (5/30, 대치도서관)  

드디어 <철학 연습> 출간 기념 강연회의 마지막 시간,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강연이 6/2(목),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있었습니다.
 



오늘 <철학 연습> 강연의 주제는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입니다. 이 자리를 위해 안무가 이나현 선생님이 자리를 함께 해 주시고, 멋진 즉흥춤을 보여주셨습니다.

음악이 없이 춤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음악이 나오는가 싶더니 다시 고요한 가운데 춤이 이어졌습니다. 모두 숨죽이고 지켜봤던 공연이었습니다. 강연 마치고 질답 시간에, 공연 중 음악이 없는 상태가 있었는데 왜인지라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서 이나현 선생님은 "조용한 상태를 사람이 오래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공연 중 '무음' 상태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음악'이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답니다.



이나현 선생님의 즉흥춤 공연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강연의 시작입니다. 사회는 1회 강연 때처럼 김지녀 시인이 맡아주셨습니다.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무용수의 눈과 몸의 문제들


『철학연습』(반비, 2011)이 다루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신체의 문제입니다. 현대철학이 그 중요성을 발견하고 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신체이지요. 『철학연습』에 나오는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들뢰즈 등의 사상의 주요 부분에 몸에 대한 명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독창적으로 신체에 대한 사유를 전개해 왔습니다. 주관과 객관 이전적인 원초적 ‘살’로서의 존재(메를로-퐁티), 리듬의 자동성(레비나스),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알(들뢰즈) 등등이 신체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개념들이지요.


오늘 저녁엔 안무가 이나현과 함께 신체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몸은 늘 미리 정해진 생활 방식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기능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날의 피상적인 용도성 속에서 신체의 원초적인 모습이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모든 용도성으로부터 떠나 있는 신체 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요? 신체를 쟁기나 다른 연장, 또는 인사하거나 악수하는 기계처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신체 자체인 한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신체 자체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이 바로 무용가라고 생각합니다. 신체를 신체 자체로서 사용하는 사람.


먼저 우리는 오늘 저녁 이나현의 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나현과 저는 종종 춤과 철학을 한 무대에서 사유해 보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나현은 제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의 춤의 생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철학은 춤의 대본이 아니며, 무용수는 철학적 개념의 개입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침해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춤은 이미 존재하는 이론을 청사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저녁 우리는 춤을 보면서 비로소 신체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춤이 신체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래 우리가 춤과 더불어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몇 가지 구절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사유는 앞에 펼쳐진 물살이 거세서, 징검다리가 되어줄 디딤돌 몇 개를 늘 가지고 싶어 하니까요.


메를로퐁티: “지금껏 철학은 고작해야 몸을 인식 주관이 대면하는 여타의 다른 대상과 다를 것이 없이 시공을 채우고 있는 연장(延長)으로 보았다. 즉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을 발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의식이 지각하는 대상이기 이전에, 몸 때문에 바로 외부 대상들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 바깥에 있는 비신체적인, “고공비행을 하며 내려다보는 주체(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주관)”는 없으며, 세계 안의 몸과 뒤섞여 있는 의식이 주체가 된다. 피부의 조직끼리 갈라낼 수 없이 얽혀 있듯 의식은 “세계의 조직(tissu du monde)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철학연습』, 112쪽)


레비나스: “리듬은 시적 질서의 어떤 내적 법칙 보다는 시적 질서가 우리에게 작용하는(affecter) 방식을 가리킨다.……주체는 그 리듬 속에 사로잡히고 또 휩쓸려 버린다. 주체는 리듬의 고유한 표상의 일부가 된다. 그 자신에 거스르면서조차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리듬 안에는 더 이상 ‘자아’가 없고, 자아로부터 익명으로의 이행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와 음악의 매혹 혹은 주술이다. 이런 존재의 양태에는 의식의 형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아는 그런 존재 양태를 소유하는 특권, 그리고 그의 힘의 특권을 버리기 때문이다. 또 이런 존재의 양태에는 무의식의 형식도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경우 전체 상황과 그 상황의 개개 정황들은 분명치 않은 어두운 빛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음악 소리에 맞춘 걸음 걸이 혹은 춤의 특별한 자동성(L'automatisme)은 무의식적 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의 양태이다. 오히려 이 존재 양태에 있어선 자신의 자유 속에서 마비된 의식이 놀이하며, 완전히 이 놀이 속에 흡수되 버린다.”(레비나스, 「실재와 그 그림자」에서)


들뢰즈: “들뢰즈는 특권화된 기관으로서의 눈보다는, 어떤 기관도 특권을 행사하도록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 즉 ‘기관 없는 신체’를 내세운다. 아무런 기관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이런 신체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메타포로서 그는 알(卵)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기관들이 기관화〔유기체화〕되기 이전의, 그리고 층들(strates)이 형성되기 이전의 알로 다룬다…….” “우리는 알이 유기적으로 되기 ‘이전의’ 신체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안다.……알은 ‘입도, 혀도, 이도, 후두도, 식도도, 위도, 배도, 항문도 없다.’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일 뿐이다.”……“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된다기보다는, 우리가 유기체라고 부르는 기관들의 유기체화(organisation)에 더 반대된다.……유기체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서동욱, 『차이와 타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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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내용은 간략하게 이 정도로 마치고,  질답 시간. 

<철학 연습> 출간 기념 강연회를 위해 벨기에에서 한국까지 오신, 짧은 기간 동안 시차 적응 기간도 없이 4개의 주제로 4번의 강연을 해 주신 서동욱 선생님과, 같이 해 주셨던 모든 게스트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늦은 시간에 강연회에 참석하셔서 '철학'이라는 것을 실생활과 유리된 것이 아닌 실제 삶에 부딪치는 주제로 소화하신 모든 참석자분들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

참, 혹시 강연회 세 번 모두 참석하신 분 계신가요? 두 번 참석하신 분들은 제가 몇 분 뵌 것 같습니다만. ^^ 강연회 참석하셨던 분들, 후기를 인터넷 서점이나 반비 블로그에 트랙백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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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기념 강연회 첫 번째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 정독도서관)
얼굴이란 무엇인가?  (5/30, 대치도서관)  

2011년 5월 31일(화), 서강대 앞 카페 숨도에서 <철학 연습> 강연회,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날의 강연은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란 주제로, 김경주 시인이 게스트로 나와 주셨습니다. <철학 연습> 독자라면 <철학 연습>에 김경주 시인의 글이 인용된 걸 기억하시겠지요? ^^ 그리고 사회는 허윤진 평론가가 맡아주셨습니다. (공지에는 없던 깜짝 사회랄까요? ^^)




그럼 강연장에 오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강연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공유해 봅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분들이 강연장을 찾아주셨습니다.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또는 삶의 반복



1. 잃어버린 시절을 찾는 자전거


『철학연습』의 표지에는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온갖 실험을 가시화하고 싶어 하는 듯 소년의 자전거는 위태로운 외발자전거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철학의 시선처럼 자전거는 높기도 하군요. 양 팔은 막 이륙하기 직전의 날개이고요. 어디 하나 위험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철학은 늘 그렇게 우리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위험 속에서 우리는 잠을 깨고 우리가 돌아 나올 수 없는 세계의 심연을 드디어 드려다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소년의 자전거가 향하고 있는 하늘은 부드럽습니다. 밀밭을 부드럽게 떠밀며 바람이라도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부드러운 하늘의 색깔은, 세계가 한잔의 밀크커피 속에 들어있다는 독특한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마치 ‘추억의 시간’을 보여주는 풍경 같습니다. 추억 속에 종종 등장하는 시간, 저 잃어버린 시절을 찾는 일. 그것이 오늘 저녁 우리가 할 이야기입니다.



2. 잃어버린 시절은 반복을 통해 찾아온다


『철학연습』이 중요하게 다루는 현대 철학의 개념이 바로 ‘반복’입니다. ‘반복’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바로 우리는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문제는 곧 ‘반복’의 문제와 같습니다.

『철학연습』은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들뢰즈 세 사람의 철학자와 더불어 반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각각 42-43쪽, 65-69쪽, 186-188쪽)

키르케고르는 성서의 인물 욥의 반복에 대해 말합니다. “욥은 축복을 받았고 모든 것을 ‘갑절’로 되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이라고 부릅니다.”(『철학연습』, 43쪽) 그는 반복을 통해 가장 본래적인 실존에 도달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프로이트에서 반복은 일종의 질병을, ‘트라우마’를 성립시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단지 마음의 병을 해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류의 정신의 근본 국면을 반복에서 찾았습니다. 모세 살해에서 예수 살해로 이어지는 유대 역사의 반복, 죽은 아버지 숭배를 동물숭배 속에서 반복하는 토테미즘 등등. 이것은 모두 과거의 추억이 무의식 속에 보존되는 방식으로서 반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들뢰즈 역시 반복을 통한 우리 경험의 성립을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사의 모든 반복이 들뢰즈의 반복 개념 안에서 종합되고 있지요.

단지 철학자들만 반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복을 이야기하는 매우 풍부한 문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초대 손님 김경주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복의 문제가 그의 시의 중심에 있는데, 김경주 시에 관한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연습』의 한 구절을 읽어보지요.

반복을 통한 기쁨과 성숙의 문제를 우리 문학에서 찾자면,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반복에 관한 이런 구절을 시집에서 읽는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다시’ 보는 일, 곧 반복이 여기서 핵심을 이룬다. 이 반복의 경험과 관련해 시인 김경주는 이렇게 말한다. “제 시의 중요한 코드 중에 휘파람이 있는데요. 어린 시절 대중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신기했어요.……언젠가 타이의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취해 휘파람을 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오열할 것 같았어요.” 과거의 휘파람은 현재의 휘파람이나 바람 속에서 반복된다. 여기서 과거 시간에 뒤늦게(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것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반복인 것이다.(『철학연습』, 187-188쪽)

이런 반복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 경험을 성립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인지 오늘 저녁 우리는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생각입니다.


3. 반복의 다양한 경험들


반복에 대한 몇 가지 인용들과 함께 생각을 전개시켜 볼까 합니다. 문학작품들에서 반복을 다루는 제 글 「이미지와 시간」(『익명의 밤』, 민음사, 2010)에서 주로 발췌한 글들입니다. 문학 작품들이야 말로 사유가 공허한 허공을 디디고 내려앉지 않도록 단단히 한 걸음 한 걸음을 바닥에서부터 떠받쳐주는 사유의 디딤돌이지요.


1) 반복(또는 시간을 되찾기)에 대한 일반적 경험


반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경험을 들자면, 무엇보다도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놀이처럼, 물을 담은 도자기 찻잔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되지 않던 그 종이가, 물에 약간 닿는 것만으로도 곧 펴지고, 꼬부라지고, 물이 들고, 각기 형태가 달라져서, 꽃이나 집이나 사람 등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집 뜰에 있는 모든 꽃들, 스완씨의 집 뜰에 있는 꽃…… 성당과 콩브레 전체와 그 근교…… 이 모든 것들이 형태를 이루면서 나의 한 잔의 홍차 속에서 나왔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재미있게도 프루스트와 가장 거리가 멀게 보이는 작가인 사르트르에게서도 위와 같은 프루스트적 시간 찾기가 발견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봉봉 과자를 줄 때, 어떤 여인이 내 곁에서 매니큐어를 칠 할 때, 시골 호텔의 화장실에서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 야간열차의 천장에 매달린 보랏빛 전등을 볼 때, 나는 내 눈과 코와 혀에 이제는 사라진 당시 영화관의 불빛과 냄새를 되찾는 것이다.(사르트르, 『말』에서).


매우 지적인 독일 작가 제발트 역시 잃어버린 시절을 되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프루스트와 유사한 보도석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두 작가를 비교한 글인데, 제 책 『익명의 밤』에서의 인용입니다.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며 서로 중첩되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현재와 과거를 제발트는 노골적으로 프루스트적 코드를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포석 체험을 떠올리며 이 구절을 읽어보라. “블라슈스카와 네루도바 사이의 집들과 마당 사이로 난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한 걸음, 한 걸음 비스듬히 올라가면서 발밑에서 고르지 않은 보도석(步道石)을 느끼는 동안 언젠가 내 발 밑에서 이 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마비되었다가 이제야 다시 깨어나는 감각들을 통해 내게 기억이 열리는 것 같았어요.”(『아우스터리츠』에서) 제발트의 주인공은 프루스트의 화자와 똑같이 발에 부딪치는 포석의 감각 속에서 현재와 과거의 중첩내지 종합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프루스트의 유명한 다음 구절을 위한 오마주라 할만하다. “몸의 균형을 다시 찾으려고, 먼저 번 것보다 좀 낮게 깔린 다른 포석에 한쪽 발을 딛는 순간, 지금까지의 실망은 나의 인생의 각 시기의 것과 똑같은 행복감 앞에서, 그러니까 발베크 부근을 마차로 산책했을 적에 내가 인식할 줄로 믿은 나무들의 전경이나, 마르탱빌르 종탑의 전경이나, 달인 물에 담근 마들렌 한 조각의 맛이나, 그 밖에 내가 얘기했던, 뱅퇴이유의 최후 작품에 종합되고 있는 것 같이 보인 다른 여러 감각들이 나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행복감 앞에서 사라졌다.”(『익명의 밤』, 136쪽)


2) 영화에서 반복과 지각


장-루이 세페르(Jean-Louis Schefer)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는 시간이 내게 하나의 지각으로서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 시간 자체가 어떻게 지각된다는 것일까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히지 않은 현재, 이전의 현재에 환원되지 않는 과거, 이제 오게 될 현재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란 없다.”(들뢰즈, 『이미지-시간』에서) 즉 과거의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현재적 지각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3) 사랑에서의 반복과 기원의 부재


여기 사랑에 대한 두 개의 놀라운 텍스트가 있습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입니다. 혹시 옛 사랑을 새로운 사람의 얼굴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이 두 텍스트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랑은 현재 속에서 과거의 인물의 반복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반복만이 있을 뿐 기원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역시 『익명의 밤』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에코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공명내지 종합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국면을 엿볼 수 있다. 에코의 소설은 모든 연애의 기원에 있는 사랑을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사랑했던 파올라나 시빌라 같은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사랑, 또는 그가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능케 했던, 현재와 공명하는 과거 자체를 그는 찾고자 한다. ‘과거 자체는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에코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파올라에서 시빌라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찾아 헤맸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로아나』에서) 여기서 화자는 ‘기원적 과거’의 비밀 바로 앞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 배후에서 그 이미지를 가능케 한 과거의 한 순간을 식별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자는 끝내 뭐라 말하는가? “나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로아나』에서) 현재 뒤에 숨겨진 과거를 그 자체로 정시할 수 있을까? 마치 현상의 배후에서 순수 과거로서의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의 바램처럼?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에 그 자체로 직관 가능한 이데아와와 같은 진리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과거는 현재와의 공명 속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며 그 자체로의 과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서 회상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검게 변한 태양,’ 텅 빈 암흑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오랜 성찰 끝에 최종적으로 결론내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 자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발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자체가 있어야할 자리엔  검은 태양처럼 아무것도 없으며, 텅 빈 무가 있다. 이것이 알려주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는 두 항의 공명내지 종합을 통해 성취된다고 여러 번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과거의 항은 그 자체로 기원으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에코의 화자는 자신의 모든 사랑의 기원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려 했다. 거기엔 ‘무(無)’가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텍스트는 현재와 과거의 공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지, 기원적인 과거 자체의 사랑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미 토마스 만이 잘 보여준 바였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쇼사 부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유는 이 사랑의 배후에 과거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 회페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비난하고 싶은 기분으로 이 행실이 나쁜 부인을 보면서, 그녀를 보면 무언가가 연상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마의 산』에서) 그런데 한스 카스트로프는 쇼사의 배후에 있는―또는 배후에서 연상되는―회페를 사랑하였는가? 천만에! 그는 회페를 사랑하고 쇼샤 부인을 통해 이 사랑을 또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이란 한번이며, 현재와 과거가 종합되면서 그것은 가능해진다. 별개로서 현재와 과거 각각은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무일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로아나』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기원적인 사랑이란 없다는 것이다. 과거는 사후적으로 현재와의 공명 속에서만 사랑의 텍스트로 완성될 뿐이며, 결국 시간적 차원에서 이미지의 형성은 ‘기원의 부재’를 전제한다고 말해야 한다.(『익명의 밤』, 138-139쪽)


4) 반복과 무의식


마지막으로 반복은 무의식을 경유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늘 새로운 경험을 하는 듯이 여기는 것은 반복이 의식되지 않는 층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최동훈 감독의 영화 「전우치」(2009)가 이 점을 잘 알려줍니다.


삶이 반복되긴 하는데, 자리를 바꾸고 위장된 채로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는 예술 작품이 최동훈의 영화 「전우치」(2009)이다. 영화 전체가 위장된 반복의 문제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는데, 내레이션을 통해 위장된 반복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마성에 빠진 표운 대덕과 요괴들은 지상으로 쫓겨 와 인간의 몸속으로 숨어들었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 마지막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 기억마저도 잃어버렸다.”는 구절만큼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코기토에 대한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도 없으리라. 윤회 속에서 모든 것은 위장된 가면의 반복이며, 그 자체로 정체성이 확정된 주체란 없다.(『익명의 밤』, 143쪽)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기 의식’입니다. 자기에 대한 앎에서 성립하는 것이 이 의식이고 이것이 근대적 주체의 근본이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분열이 현대적 주체를 특징짓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반복’은 주체의 이 국면과 관계하고 있지요. 앞서 보았듯 반복은 무의식을 경유해 작동합니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작동하는 반복이 주체의 새로운 자리를 가리켜 보이고 있군요……. 만일 ‘윤회’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반복의 개념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철학연습』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철학자 들뢰즈는 ‘윤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동일한 과거를 연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métempsychose)라 불리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은 자신이 연기할 소리의 높이와 톤, 그리고 아마도 가사까지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가사를 말하든 곡조(air)는 늘 같다.”(『차이와 반복』에서) 돼지가 철학자 속에, 범죄자가 성인 속에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일까요? 마치 윤회하듯? 김경주 시인의 시를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그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존재다. 전생에 음악이었지만 현세에 사람으로 다시 환생한다.”

늘 우리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만 우리의 현재를 지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는 완벽하게 새로운 이미지의 범람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잃겠지요. 이 말은 우리는 현재의 삶 안에서 늘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삶은 이런 반복 속에 표류합니다.



그리고 이날 강연 역시 음악이 함께 했습니다. 이아름님이 시작과 마무리를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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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했던대로 5월 30일(월), 대치도서관에서 "얼굴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철학 연습> 강연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이라는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강의장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아쉽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강연회의 요약 원고를 소개해니다. 아이폰으로 동영상도 찍었는데요, 이것도 곧 공개하겠습니다. ^^

 


얼굴이란 무엇인가?

—『철학연습』의 한 가지 주제



『철학연습』(반비, 2011)은 현대 철학 이론들을 명료하게 보여주려하기도 하지만, 우리 일상적 삶의 평범한 요소들이 숨기고 있는 의미들을 찾아나서는 작업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책입니다. 우리 일상을 이루는 것들, 가령 돈이나 터치스크린이나 사랑 같은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철학연습』이 골똘히 생각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얼굴에 몰두하고 있습니까? 발전일로의 화장품 산업과 성형 열풍이 잘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얼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이런 몰두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가장 일상적인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이 얼굴 안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을까요?


1. 잉여적인 것?

피부가 벽을 씌우고 있습니다. 거기 기관들이, 그러니까 눈, 코, 입이 걸려있군요. 이 이상한 칠판을 얼굴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얼굴은 그저 피부와 보는 기관(눈), 말하는 기관(입), 냄새 맡는 기관(코)의 조합이 아닙니다. 얼굴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그 초과적인 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낱말을 골라 ‘영혼’이라고 불러 볼까요? 오늘 이야기는 결국 이 초과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2. 시선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만들다.

이 얼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신의 어렸을 때 체험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철학연습』에 쓰인 글을 읽어보죠.

어린 사르트르는 실수 때문에 동네 부인들에게 핀잔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 거울 앞으로 가서 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 찌푸린 얼굴을 회상해보건대 그것은 자기 방위의 구실을 했다. 벼락같은 수치심이 공격해오자 나는 근육을 방패삼아 자신을 지킨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찌푸린 얼굴은 내 불운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감으로써 도리어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이것이 거울을 통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타인이 부과한 의미대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만들며, 이런 의미에서 타인의 시선 앞에 사로잡히는 것은 제한받음이고 구속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의 진실, 나의 성격 그리고 나의 이름도 어른들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야말로 타인의 시선 앞에 나는 먹잇감처럼 주어져 있다. 이와 달리 거울에 몰두하는 행위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내가 규정되는 것을 피해 자신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규정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울놀이는 나를 마음대로 규정하려 드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철학연습』, 94-95쪽)


시선은 그것이 타인의 것이든 나 자신의 것이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여합니다. 시선은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규정하기 때문이지요. 위 글에서 어린 시절의 사르트르는 거울을 바라봅니다. 바로 타인의 시선이 나 나 자신을 규정하는 일을 피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규정하기 위해서지요. 바로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직시함으로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거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는 일, 자신의 얼굴을 반성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하는 일, 가령 ‘화장’ 같은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 자신의 참다운 얼굴을 찾는 일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자기기만’일까요? 이런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얼굴은 얼마나 독창적인 원본인가 하는 것 말이지요.


우리의 헤어스타일, 화장하는 방식, 기분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정 등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다른 얼굴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다른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듯 우리는 남의 표정과 스타일을 복사한다. 이렇게 다른 것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얼굴을 꾸미고 살아가는 형태는 오늘날 성형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생기를 얻고 있다. 성형을 하는 이는 아바타를 구매하듯 상점에 놓인 얼굴을 구매한다. 또는 멋진 그림 하나를 자기 얼굴 위에 베껴 그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인생이라 해야 하는가?(『철학연습』, 251쪽)


어쩌면 원본 없는 인용의 시작도 끝도 없는 나열이 우리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의 인용에서 다른 인용으로, 하나의 표정에서 다른 표정으로 끝없이 이동하는 방랑의 결과일 테고요…….


3. 관상술

얼굴은 또한 미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얼굴이 마치 숨겨진 지도나 되는 듯 사람들은 얼굴 속에서 운명의 길들을 읽어내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바로 관상술 말입니다. 가령 이런 관상보기의 예가 있습니다. 『철학연습』에서 읽어보겠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로 성공을 거두었던 소설 가운데, 정비석의 『손자병법』이 있다. 춘추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월나라 구천(勾踐)이 20년 가까이 쓰디쓴 쓸개 맛을 보며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복수를 준비한 후 마침내 책략가 범려(范蠡)의 도움으로 승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승리를 얻은 구천이 그간 도움을 준 범려를 소홀히 하자 그는 이렇게 구천의 관상을 본다. “범려는 관상학적 견지에서 구천의 얼굴을 새삼스러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심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구천은 목이 길게 패어 있는데다가 입은 새 주둥이처럼 삐죽 나와 있는 ‘장경조훼형(長頸鳥喙型)’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상학으로는,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 같이 생긴 사람은 ‘환난(患難)은 같이할 수 있어도, 환락(歡樂)은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전해 오지 않던가.” 그 길로 범려는 구천에게서 도망칠 마음을 먹는다. 소설이 기록하고 있는 이 관상보기는 정사(正史)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를 ‘이성을 통해 확정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이 종종 관상보기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잘 예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관상학은 일종의, 외적 징후를 통해 사람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다.(『철학연습』, 304쪽)


사람들은 왜 관상 같은, 일종의 미신에 매달릴까요? 아마도 알 수 없는 운명이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천을 통해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할 지점에서 우리는 멈칫거리며 관상술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헤겔은 관상술에 탐닉하는 사람을 이렇게 혹독하게 대합니다.


누군가 당신 관상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치자. “자네는 정직한 사람인 양 처신은 하지만 사실은 억지로 그러는 척할 뿐, 본심은 악한(惡漢)이라는 것이 자네 얼굴에 드러나 있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행동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적어도 사나이답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장에 세상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의 따귀를 후려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응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밖에 없으니, 참으로 이렇게 대응하는 것만이 ‘인간의 현실성은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을 학문의 으뜸가는 전제로 내세우는 데 대한 반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철학연습』, 305-306쪽)


우리는 오늘 관상술 같은, 지식의 외관을 쓴 미신과 이 미신을 신봉하게끔 하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운명과 실천 등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4. 얼굴을 통해 무한자와 만난다?

앞에서 우리는 얼굴이란 잉여적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눈의 생김새, 눈의 기능, 입이나 코의 조형성과 기능 등등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얼굴입니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늘 ‘초과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이론이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다 한정하지 못하는, 무한한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얼굴의 무한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철학연습』에서는 얼굴의 이 무한성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래 한 구절 읽어 보겠습니다.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l'épiphanie)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다. 또 타자를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타자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이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 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주인처럼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도 나에게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에게 명령하는 타자의 얼굴이란, 형이상학의 대상, 규정 불능의 무한자, 곧 신의 흔적과도 같다. 신은 바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철학연습』, 128쪽)


이번 강연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머리에 씌워진 두건, 얼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강연회 마치고 질답 시간. 하나라도 더 질문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카페 숨도에서의 강연회도 기대되네요. ^^

 강연회 1부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화) PM 7:30 정독 도서관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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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연습> 출간 기념 릴레이 강연회

- 강연회 1부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화) PM 7:30 정독 도서관 => 강연회 후기 보기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위 강연 시간표는 예전 포스팅과 같은 것 또 올린 것 맞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공지된 강연 외에 숨겨진 <철학 연습> 강연회가 한 번 더 있습니다. 반비 블로그는 물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도 아직 공개하지 않았던 강연! 그것은 바로 대치도서관 강연!

5/30(월) AM 10:30 대치도서관 문화교양관 (강남구 대치동 316번지 은마아파트 복지상가 2층)
 

강연 시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강연이라, 참석이 어려우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혹시가능하신 분이 계시면 강연회에 와 주세요. ^^ (이 강연회는 게스트 없이 서동욱 교수님의 강연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회 강연회 때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강연회에 오신 분들께는 예쁜 '반비 노트'를 드립니다! 물론공지된 2, 3회 강연회 뿐만 아니라 대치도서관 강연에 참석하신 분들께도 드립니다. 

1회 때 여분을 챙겨갔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신청해 주셨던 분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늦게 오신 분 중엔 못 받으신 분들도 계셨던 것 같은데요, 이번엔 충분한 수량 챙겨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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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 정독 도서관. <철학 연습> 출간 기념 릴레이 강연회! 그 첫 번째 시간, "호흡하는 존재"란 주제로 음악과 시와 철학이 있는 강연이 있었습니다.



좌측부터 사회와 시 낭송을 맡아주신 김지녀 시인, 오늘의 강연자 서동욱 교수, 음악을 들려주실 최고은 가수입니다. 강연 시작 전 세팅을 하고 계시네요. 동영상을 올리지 못 해서 아쉽지만, 강연은 최고은님의 아름다운 노래로 시작되었습니다. 철학 강연이 왜 노래로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의 주제 '호흡'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



강연의 시작을 알리는 김지녀 시인. 강연회 진행하시는데 사회 전문으로 보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 매끄럽게 강연이 진행되도록 해주셨네요.

시인과 가수를 모시고 강연을 시작하며, 서동욱 선생님은 "노래와 시가 금과 은이라면, 그냥 강연은 구리 정도에 지나지 않을까."라며 살짝 엄살을 부리셨는데요, 이 말에 김지녀 시인이 "강연이 끝날 때 즈음이면 어떻게 구리가 빛날 수 있을지 서동욱 선생님이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셨지요. ^^


잘 아시다시피<철학 연습>은 책으로 엮어 나오기 전,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가 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서동욱 선생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자리에서 철학적 개념들을 함께 시험해 보고 얘기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지식을 간단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깎고 단순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이 살아남는 문제"였다고 하셨습니다. 




<철학 연습>의 의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이제 김지녀 시인이 <철학 연습>을 낭독합니다. 

“삶은 거친 것이며 의혹투성이다. 인간은 온 힘으로 이 바위를 밀고 나간다. 힘겨운 전진을 하는 이에겐 두 가지 힘 밖에 없는데, 바로 생각하는 힘과 생각한 것을 실천하는 힘이다. 갈대에 걸린 바람이 울 듯 인간은 세상의 기운과 대기가 이동하는 길목에 서서 생각을 하고 소리를 낸다. 기술과 근육과 말로, 그러니까 망치와 노동과 발언으로 생각한 것이 울려 퍼지게 만든다.

이렇게 생각과 생각의 실현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면, 철학은 이미 인생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다만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 듯 생각 역시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의 잠을 깨우려고 한다.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우리는 혹시 이런 머릿속의 악마들과 더불어 한 평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는 것은 아닌가? 무엇이든 해보라고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삶인데!”

―『철학연습』, 7쪽



『철학연습』에는 우리와 같은 시대 속에서 살며 우리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많은 철학 이론들과 개념들이 출현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아마도 ‘타자’ 개념이겠지요.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이질적인 것’ 말이지요. 내가 아닌 것, 그러므로 내가 지배할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나의 삶에 개입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저녁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에 수시로 개입하는 이 이질적인 것, 타자성(alterité)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삶에 개입하는 이 이질적인 것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오늘 강연에서는 ‘숨결’의 문제와 더불어 이 이질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숨을 쉽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신체가 체온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듯 모든 생명에게 예외 없는 이 사실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지요. 철학은 늘 이런 당연한 일 속에서 경이를 발견합니다.
 


숨 쉬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는 일보다 중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생각하고 일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는 ‘숨을 쉬는 것’입니다. 흔히 뇌사자에게서 보듯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없는 호흡은 가능하지만, 숨 쉬는 생명이 아닌 코기토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지요. 코기토보다 숨 쉬는 일이 먼저이며, 주체는 근본적으로 숨 쉬는 자, 바로 ‘허파 주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혼을 뜻하는 프시케(psyche)라는 말은 ‘숨 쉬다’라는 뜻을 가진 프시코(psycho)에서 유래했고, 우리가 영혼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라틴어의 스피리투스나 아니마 역시 모두 바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뤼아가 바람을 뜻하는 것처럼 말이죠. 영혼이라는 것은 이렇게 숨을 쉬는 활동이라는, 생명의 대사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런 뜻에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실체의 밑바닥에서 허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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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이런 숨결을 둘러싼 문제들과 더불어 현대 철학의 중요한 생각거리, ‘이타성’에 대해 물음을 던질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김지녀 시인도 나와 있고, 최고은 가수도 있습니다. 시인과 가수야 말로 숨결 속에서 말을 빚어내는 이들, 숨결의 비밀에 가닿는 이들입니다. 철학과 시와 노래가 그야말로 숨결을 ‘연습’하게 될 것입니다.




김지녀 시인의 시 낭송도 있었습니다.

김지녀

나의 흉곽은 부서지기 쉬운 벽이다

나에게 가득 차 있는 공기는 만연체의 문장들처럼 닫히지 않고

막다른 골목에서, 수만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기침은 밤을 붙잡고 빛을 끌어당기면서

눈을 감는 것


어둠을 펼쳐 놓은 두 날개에게

무늬는 되나올 수 없는 미로다


바깥으로부터 당신이 공기를 밀고 들어올 때

결말을 모르는 말들 속에서 나는 쉼표를 찾고

날개를 폈다 접는다

당신의 공기가 나의 내부로 들어와 있음을 느끼지만


바깥으로부터 당신이 공기를 거두어갈 때

이미 시작된 죽음에서, 죽음 쪽으로 나는 취해가는 것이다

나의 벽은 갈라져 무너지고 있지만


가장 길게 누워 나는 제목 없이도 거의 완성되고 있다

바깥으로부터 당신이 공기를 밀고 들어올 때

나는 나를 되돌아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시면서 <철학 연습>의 구절을 인용하시기도 했지요.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차이의 이념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확인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의 차이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는 점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차이의 이념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확인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의 차이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는 점 말이다. 차이가 먼저 존중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차이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타자의 차이성에 대한 존중은 어떤 모습을 지닐까? 도대체 차이에 대한 존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타자가 지닌 가치, 나와는 다른 그의 입장 자체를 존경한다는 뜻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결국 차이에 대한 이 존중이란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연습』, 246쪽




디어 강연을 마치고 질문과 답변 시간. 늦은 시간까지 열강에 동참하셨던 분들답게 질문 시간도 뜨거웠답니다. 질문 시간에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라는 개념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질문을 주셨네요. 
 


질답 시간까지 모두 마치고 기다리던 사인 시간입니다. ^^ 책 나올 시점에 벨기에에 가셨기 때문에 저도 이날 서동욱 선생님의 사인을 받았답니다. 


아무쪼록 철학에 관심은 있지만, 철학이 너무 어려워만 보이는 분들께, 철학이 별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것임을, 생각의 '연습'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는, 더 자극받는 자리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강연회에 참석 못해 아쉬웠던 분들! 아직 두 번의 강연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인터넷 서점벤트 페이지에서 신청해 주세요!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예스24 가기  교보문고 가기   알라딘 가기 
 인터파크 가기    리브로 가기   11번가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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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twitter.com/s1246 BlogIcon 잔디 2011.05.26 15:00

    가지 못했던게 무척이나 아쉬웠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남은 두 번의강연회 중 한 번 정도는 꼭 가고싶은데.. 이벤트를 노려봐야겠네요ㅎㅎ 포스팅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s://banbi.tistory.com BlogIcon Banbi Editor! 2011.05.27 09:57 신고

      무척 즐거운 강연이었답니다. 아쉽지만, 다음 강연회 때 와 주세요! ^^

'이벤트' 카테고리에 쓰는 두 번째 포스팅은 바로 '반비 노트' 소식입니다!


반비 노트의 표지는 2개입니다.
우선 <철학 연습>의 표지 이미지를 가져온 표지.
오른쪽 속지 상단에 <철학 연습>의 구절이 하나씩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 표지는 자전거의 이미지로... 이 표지부터 펼치시면 속지는 무선노트입니다. ^^


그럼 <철학 연습>과 반비 노트를 같이 한 장! 

'철학 연습' 출간 기념 릴레이 강연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이 반비 노트를 드릴 예정입니다. ^^ 

- 강연회 1부 : 음악과 시와 철학 : 호흡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5/24(화) PM 7:30 정독 도서관, (5/20일 당첨자 추첨)
 

- 강연회 2부 : 철학과 시의 만남 : 지나간 시절을 되찾기
                     5/31(화) PM 7:30  서강대 앞 카페 숨도 (5/27일 당첨자 추첨)
 

- 강연회 3부 : 철학과 무용의 만남 : 신체의 비밀을 찾아서
                     6/02(목) PM 8:00 상수동 이리까페 (5/31일 당첨자 추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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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인터뷰 1탄
셀프 인터뷰 2탄
...에 이어서 3번째 셀프 인터뷰!

서동욱 교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1. <철학연습>을 쓰면서 목적으로 했던 것은?

2. <철학연습>의 문제의식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과연? 동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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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평행이론 -막 갖다붙이며 오바하는 글쓰기




서동욱-신해철 편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신입생만 400명이 넘으며, 웬만한 타대학 학생들도 복수전공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강의실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경제학과 얘기가 아니다. 너무 많은 고득점자가 몰려서 공대 위기론에 일조한다는 의과대 얘기도 아니다. 이것은 무려 철학과 얘기다. 대한민국의 경기가 한참 좋았다던 그 찬란했던 시절에도 취업난으로는 독보적이었던 그 철학과란 말이다! 서동욱과 신해철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무난히 들어갈 학력고사 점수를 가지고, 당당히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공통점이 아닐 수 없다! 서동욱은 그의 최근 저서 <철학 연습>에서 철학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험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디테일이어서, 자전적인 경험에서 나온 내용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다함께 감상해 보자.


철학과 학생은 소개팅을 나가 곤욕을 치른다. 눈을 깜빡이며 여학생이 묻는다. “어머, 철학과야? 그럼 관상 좀 봐봐. 손금은 어때? 내 머리통은 똘똘하게 생겼어?” 그러면 어떤 학생은 “철학과에선 그런 거 안 배우거든!” 소리치며 자기 학문의 영예를 지키겠답시고 예쁜 여자를 뒤로한 채 표표히 걸어나가고, 반대로 어떤 학생은 아름다운 관상쟁이의 말로 상대방의 환심을 산다. “누님은 코가 아주 넓고 귀하게 생겼어요. 귀는 부처님처럼 축 늘어졌고요. 흠, 좋아요, 좋아.”


표표히 걸어나가는 학생의 뒷모습에서는 이후 철학도의 길을 쭉 걸어간 서동욱이,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학생의 앞모습에서는 이후 가수로서 백분토론의 단골손님이 된 신해철이 연상되지 않는가? 이렇게 서동욱과 신해철은 비슷한 시기,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입학하며 평행 이론 위에 올라섰다.


기왕 백분토론 이야기가 나왔으니, 백분토론에서 발견한 평행 이론 한 가지를 마저 소개하도록 하자. 최근 백분토론에 출연한 신해철의 모습을 보면서 화들짝 놀랐던 발언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나는 가수다>에 등장한 가수들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검투사에 비유한 부분이다. 신해철은 고대 검투사의 비유를 들어, 오늘날 일밤의 무대에 선 가수들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서바이벌? 강호의 검객들이 일개 검투사가 되면 '아, 저건 여흥이고 난 '명예' 심사위원이구나'하고 놀면 되지 엄지손가락 내렸는데 저놈이 안 죽는다고 난리를 친다.”


현대의 가수들을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검투사에 비유함으로써 신해철은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펼쳤다. 그렇다면 서동욱은? 서동욱의 전공 분야가 현대철학임을 익히 알고 그의 최근 저서 <철학 연습>을 펼쳐든 사람은 프롤로그의 제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평행 이론에 완벽히 부합하는 그 프롤로그의 제목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웹서핑을 했네>이다. 가장 최근의 현대철학 이론을 소개하는 책의 서론을 고대 그리스인으로 시작하다니! 그것도 가장 현대적인 활동의 하나인 웹서핑에 비유하다니! 앞서의 신해철 발언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이와 유사한 비유를 서문에 담은 서동욱의 새 저서가 발간되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평행 이론이 아닐 수 없다.


평행 이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평행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우선 인터넷 서점에서 서동욱이란 이름을 검색해 보자. 처음 검색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하에 뜨는 책들이 모두 한 사람의 책인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힐 것이다. <존재에서 존재자로>, <프루스트와 기호들>과 같은 번역작업들이야 학자들이 흔히 하는 일이지만 <우주전쟁 중의 첫사랑>, <익명의 밤>과 같은 책들은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그렇다! 서동욱은 철학자이자 문학 평론가, 시인으로도 그 이름이 드높다. 서동욱에게 시는 결코 ‘부업’이 아니다. 시 분야에서 서동욱은 뛰어난 감성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한 사람에게 철학자이자 시인, 그리고 문학 평론가라는 다채로운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이는 신해철이 가수이자, 그룹 넥스트의 리더이자,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의 마왕이자 <안녕, 프란체스카>의 앙드레 대교주라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넥스트 리더나 작곡가로서의 활동이야 서동욱이 레비나스의 책을 번역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보여준 마왕으로서의 미친 존재감, 그리고 그 연장선으로서 팬들에게 경악할 만한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앙드레 대교주로서의 모습은 신해철과 서동욱의 평행 이론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서동욱과 신해철은 취향 면에서도 평행 이론을 달린다. 서동욱의 새 저서 <철학 연습>의 표지 시안이 나왔을 때, 서동욱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옆 팀의 편집자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조언을 해주셨다. 참고로 이 편집자의 발언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는 다음의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출판사 사옥을 방문한 서동욱에게 이 편집자는 인사와 동시에 허리에 디스크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동욱은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더랬다.

“그래도 (술은) 마실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서동욱과 돈독한 사이의 편집자가 <철학 연습>의 최종 표지와는 달리 하얀 운동화 사진이 놓인 심플하디 심플한 시안*을 보자마자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내가 아는 서동욱 샘이라면......좀 더 빠다 냄새가 나도 될 것 같아.”


빠다 냄새! 빠다! 빠다! 이 단어만으로도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신해철과의 평행 이론이 성립함을 알아차리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너무 늦게 태어난 탓에 신해철의 젊은 시절을 미처 보지 못해 직감적으로 알 수 없는 분들께는 신해철의 대표 히트곡 중의 하나인 <재즈카페>의 일청을 권한다. 미쿡에서 온 교포 가수들이 ‘범람’하는 요즘과 달리, 느끼한 가수가 많지 않던 90년대 초반 신해철의 <재즈카페>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한마디로 빠다 냄새가 물씬 나는 가수로서 신해철의 이미지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일조했었다. 확인 사살을 위해 <재즈 카페>의 가사 일부를 인용해 보자.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피자 발렌타인데이

까만 머리 까만 눈의 사람들의 목마다 걸려 있는 넥타이

어느 틈에 우리를 둘러싼 우리에게서 오지 않은 것들

우리는 어떤 의미를 입고 먹고 마시는가


도입부의 가사만 보아도 신해철에게서 나는 빠다향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평행 이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신해철의 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꼽히는 <날아라 병아리>를 떠올려보자. 이 곡은 신해철이 어린 시절 키우던 ‘얄리’라는 이름의 병아리를 추억하며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학교 앞에서 팔던 보송보송하고 연약한, 노란 병아리에 대한 저마다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곡은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입혀져 수많은 ‘병아리 구입자’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대히트를 했다. 이 노래를 기억하는 세대로서 서동욱의 이번 저서 <철학 연습>을 펴들고 무심코 읽어 내려가던 독자라면, 제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위그든 씨의 ‘이해의 선물’이 언급되는 부분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평행 이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일까? 마지막 평행 이론이 궁금한 자, <철학 연습>을 구입해 276쪽을 펴들고 읽어 보시라. 이런 애매한 페이지는 온라인 서점에서 미리보기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사서 보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서동욱 - 신해철편'이라고 했지만 연재 여부는 불투명! 과연 편집자는 다음 편을 쓸 수 있을 것인가?


* 당시 <철학 연습>의 표지 시안은 현재의 표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표지 시안 변천사도 조만간 포스팅해야겠네요. ^^
** 신해철 사진 출처 : "신해철 - The Songs For The One"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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