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5부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2장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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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와 우리는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 무럭무럭 자랐다. 혹여 누가 코끼리 아니랄까 봐 쑥쑥 크는 모습이 하루가 다를 정도였다. 네 다리는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처럼 두꺼워졌고 코는 피노키오의 코처럼 늘어났다. 조련사들이 다가가면 장난을 걸 정도로 성격도 활발했다. 새끼 코끼리들의 재롱에 웃음을 터뜨리는 관람객들을 보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졌다.

동화 작가 고정욱의 동화책 『코끼리를 만질 거야』(2012, 주니어랜덤). 작가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책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그다음 해에도 열렸다. 2회 때는 국립맹학교와 강원명진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이번에도 역시나 기발한 예술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하지만 이 코끼리들은 엄연히 코끼리월드라는 사기업의 재산이었다. 공연용으로 훈련된 코끼리들이 공연을 중단한 이후로 코끼리월드는 계속 적자를 기록했다. 우치 동물원에서 코끼리 타기 체험이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 수익을 내기는 어림없었다.

코끼리 매매 협상이 진행된 곳은 부산의 대공원이었다.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라는 위치가 무색하게 몇 년째 동물원이 부재한 상태였다. 부산에서 새로운 동물원을 추진하던 관계자들은 이 코끼리들을 꼭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여기도 돈이 문제였다. 공사비 문제로 착공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코끼리 매매 대금이 나올 구석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연락이 온 것이 일본의 후지 사파리 파크였다. 후지 사파리 파크는 전체가 사파리 형태로 되어 있는 동물원이다. 사실 김 회장은 코끼리들이 내심 한국에 남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 회장에게는 그 귀한 코끼리들을 열 마리나 우리나라에 들여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곳도 선뜻 제 값에 코끼리를 구입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후지 사파리 파크는 코끼리월드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열한 마리 코끼리들을 모두 사겠다고 제안해 왔다. 결국 김 회장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단, 열한 마리가 아닌 아홉 마리를 파는 조건으로.

코끼리들이 여러 모로 화제가 되자 광주시에서는 임대 상태인 코끼리를 정식으로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모든 코끼리를 다 구입할 수 있는 예산은 없으니 그중 선택된 것이 바로 봉이와 우리 모녀였다. 우치는 우치 동물원에서 처음 태어난 코끼리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수컷이라서 암컷보다 다루기 힘들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봉이와 우리는 광주시에 입적되었다. 일종의 명예시민 같은 것이랄까. 이제 봉이와 우리는 평생 우치 동물원에 남게 된 것이다.

전국이 물난리로 떠들썩하던 2011년 7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코끼리 수송이 이루어졌다. 거대한 수송 상자가 동물원에 도착했다. 쏘이와 우치 모자가 함께 들어갈 수송 상자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컸다. 이번 수송을 위해 새로 제작된 것이다. 나는 두 코끼리의 건강을 체크했다. 모두 건강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수송 중에는 과일, 야채 같은 연한 먹이만 주라는 둥 간섭을 조금 했다. 섭섭한 마음 때문이었나 보다.


▲ 수송용 우리 안에 들어가고 있는 코끼리. 우치 동물원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낯선 상자가 보이자 떠나는 코끼리도 남는 코끼리도 안절부절못해 요란하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래서는 우리에 싣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떠나는 코끼리들에게 부랴부랴 코끼리용 진정제를 놓았다. 코끼리를 모두 우리 안에 넣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일본에 도착하기까지 20시간 동안 그 비좁은 우리에서 버텨야 했다.

다음 날 봉이와 우리 모녀만 남은 코끼리 우리에 가 보니 한국인 사육사 둘이 부지런히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봉이와 우리는 여전히 불안한지 제자리를 자꾸 돌았다. 두 모녀는 결국 둘만의 생활에 적응할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친구들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특히 쏘이와 우치 모자를 말이다.


코끼리들은 우리나라를 떠났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또 다른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7월 청주맹학교 학생들 여덟 명과 프로젝트 관계자들은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자연 공원(Elephant Nature Park)에 도착했다. 물가의 넓은 초원에 조성된 이곳은 태국의 코끼리 보호 운동가 ‘쿤 렉’이 2003년에 설립했다. 쿤 렉은 동남아 어디든 병들고 지친 코끼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가서 사다가 이곳에 풀어놓고 키웠다. 지상 최대의 코끼리 요양원, 더 고상한 말로 ‘힐링 센타’인 셈이었다. 이곳에는 수코끼리 네 마리를 비롯해 서른여섯 마리의 크고 작은 코끼리가 돌봄을 받고 있었다. 그중 여섯 마리 정도는 눈먼 코끼리, 네 다리중 하나를 못 쓰는 코끼리, 척추가 흰 코끼리 그리고 이제 갓 낳은 아기 코끼리였다. 운영비는 따로 후원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의미 있는 체험을 원하는 유럽과 미국 출신 젊은 자원 봉사자들의 공정 여행비에서 나온다고 한다.



▲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자연 공원에서 있었던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의 모습.


  이곳에서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우치 동물원에서 했던 것 못지않게 큰 울림을 남겼다. 아이들은 3일 동안 코끼리를 엿보고 냄새 맡고 만지면서 속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코끼리는 눈으로보다 속으로 더 잘 보이는 동물이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선명한 코끼리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모습들은 EBS에서 제작한 교육 대기획 10부작 ‘학교의 고백’ 제8부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에 담겨 전파를 탔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우리들의 눈’의 엄정순 회장은 최근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고향 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지금은 서울 대공원에 있는 코끼리 사쿠라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자는 운동이다. 시각 장애 어린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 이제 코끼리라는 종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확대된 것이다.

친구들과 헤어져 둘만 남은 봉이와 우리 모녀는 우치 동물원에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암컷이라 수컷보다 키우기 쉬울 것이라는 이유로 선택된 우리는 기대를 저버리고 장난꾸러기로 자라고 있다. 벌써 힘이 장사라 내실의 철문을 망가뜨린 적도 있다.

코끼리들은 떠났지만 코끼리들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동물들도 이주자, 노동자로서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 우리 사회가 이 동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우리가 동물들과 함께 생존해 나가기 위한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블로그 연재는 이번 회가 마지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책으로 찾아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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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16.05.09 13:10

    좋은글 보고갑니다.



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4부 코끼리, 빛고을 광주로 이사 가다


    7장 축 탄생! 아기 코끼리 우치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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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임신을 진단한 후 7개월이 흘러 2010년 5월. 이미 지난 3월부터 우치동물원은 분만 대기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외국에서 만든 코끼리 출산 비디오와 관련 도서를 참고해 출산 시나리오를 만들어 연습해 두었다. 분만 증세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출산실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사이 쏘이와 봉의 젖은 더욱 불어나고 배는 더욱 아래로 처졌다.

하지만 새끼들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약을 올리는 건지, 분만 예정일을 몇 달이나 넘기고도 여전히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동물원 환경으로 인해 임신 기간이 길어졌을 수도 있다. 사방으로 개방된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끊임없이 접하다 보면 예민한 동물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몸집이 큰 동물들은 주위 환경이 불안정할 때는 출산 시기를 조절해 분만 자체를 미루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걱정은 되었지만 그렇다고 코끼리용 분만 촉진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쏘이와 봉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5월 말의 어느 날, 쏘이가 식욕 부진 증세를 보였다. 귀 뒤쪽의 체온도 뚝 떨어졌다. 출산 징후가 아닌가 싶었지만 조련사들의 판단은 농약 중독이었다. 저수지 근처에서 베어 온 풀이 농약에 오염되어 있어 탈이 난 것 같다고 했다. 쏘이는 농약 중독에 효과가 있는 아트로핀 주사만 맞고 그날을 넘겼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쏘이의 증세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다. 조련사들은 아예 쏘이와 봉의 방 옆 복도에 잠자리를 만들어 놓고 돌아가면서 밤새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농약 중독이 아니라 출산 징후가 맞았다. 며칠 후 아침에 보니 쏘이 곁에 떡하니 새끼가 나와 있었다. 관련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과는 달리 별다른 증상도 보이지 않다가 새벽에 조용히 새끼를 낳은 것이다. 봉이 가슴도 훨씬 더 많이 나오고 배도 더 불렀기에 쏘이보다 먼저 새끼를 낳을 거라는 예상도 빗나간 결과였다. 사람도 저마다 체질이 다르듯이 코끼리도 마찬가지다. 사람 중에도 순산 체질이 있고 난산 체질이 있다고 하던데 쏘이는 쉽게 쑥쑥 새끼를 낳는 복 받은 체질이었나 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었다. 코끼리 출산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관찰할 기회를 놓쳤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다음에 올 봉의 출산은 더욱 철저히 준비했다. 봉의 몸상태를 수시로 관찰했고 내실에는 CCTV를 설치했다. <TV 동물농장>에서도 촬영하러 오기로 했다.

쏘이가 출산한 지 약 일주일 만인 6월 11일, 이번에는 봉의 차례가 되었다. 지금부터 코끼리의 분만 과정을 시간별로 최대한 자세히 풀어 보겠다.


6월 2일 아침 봉이 안절부절못하며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자꾸만 뿌우우 하고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임신으로 처져 있던 엉덩이는 더욱 처져 있었다. 오줌에는 회백색의 진한 아교성 물질이 다량으로 섞여 있었다. 이것은 임신 기간 동안 자궁 입구를 막고 있던 젤라틴양 마개 물질. 전형적인 분만 신호였다. 마개 물질이 배출되면 24시간 안에 반드시 새끼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젖이 조금 나온다면 이제 곧 출산이 시작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겠지만 퉁퉁 분 젖꼭지를 힘주어 짜 보아도 젖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조용한 내실로 봉을 데려갔다. 그리고 봉의 네 다리 중 두 개를 서로 묶었다. 태국에서는 코끼리가 새끼를 낳을 때 이렇게 한다고 한다. 흥분한 나머지 새끼를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히 봉같이 초산인 코끼리는 그럴 위험이 더 크다고 한다.

내실 안에는 봉 혼자만 남았다. 한눈에도 봉은 통증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봉을 도울 방법은 없었다. 코끼리는 출산할 때 방해를 받으면 새끼를 잘 돌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내실로 들어가지 않고 CCTV 화면만 바라보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TV 동물농장> 촬영팀 그리고 코끼리월드의 김회장과 정이사도 함께 자리를 지켰다.


6월 2일 오후 2시 봉은 오히려 진통이 잦아들어 잠잠해졌다. 언제 난리를 피웠느냐는 듯 느긋하게 풀까지 먹었다. 봉은 한밤중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코끼리는 낮 시간을 피해 밤까지 분만을 미루는 분만 지연 현상을 보인다. 맹수들의 눈을 피해 안전하고 조용한 상태에서 새끼를 낳기 위해서다.


6월 2일 방 11시 봉의 진통이 심해져 갔다. 고통이 심하다 보니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CCTV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슬슬 지루함이 밀려 왔지만 이제 분만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에 앉아 CC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식사도 그 자리에서 떼웠다.


6월 3일 새벽 3시 갑자기 봉의 엉덩이 위쪽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쪽에서 무언가 내려오는 것처럼 엉덩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차례로 볼록볼록해졌다. 새끼가 산도로 진입한 것이었다. 코끼리는 생식 기관이 복부에 위치해 있어서 태아가 엉덩이 라인을 따라 수직으로 내려오게 된다. 약 5분 후 복부에서 하얀 주머니의 일부가 쑥 빠져나왔다. 태반이었다. 이제 새끼는 거의 다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련사들은 담요를 들고 내실로 들어가 봉 곁에서 새끼를 기다렸다.

태반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펑 터졌다. 그와 동시에 새끼가 엉덩이부터 쏟아져 나왔다. 코끼리 새끼는 80퍼센트가 이렇게 엉덩이부터 먼저 나오기 때문에 태아 상태에서 거꾸로 되어 있어도 별 문제가 없다. 두 번째 진통이 시작되고 채 10분도 안 되어 이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외국의 자료를 보면 코끼리의 태아가 산도에 진입한 후로 분만까지 세 시간, 길게는 열두 시간이 걸린다고 되어 있던데 봉의 경우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순식간에 새끼를 낳았다.

새끼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조련사들이 잽싸게 새끼를 담요에 싸서 내실 한구석으로 옮겼다. 그리고 새끼의 몸에 남아 있는 분비물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태국에서는 해코지를 막기 위해 이런 식으로 새끼를 일단 어미로부터 격리한다고 한다. 봉은 방금 전에 자기 몸에서 새끼가 나왔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소리만 질러 댔다. 그사이 조련사들은 새끼를 들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무리 새끼라도 코끼리는 코끼리인지라 장정 여럿이 달라붙어야 했다.

초식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벌떡 일어나 걸어다닐 수 있다. 새끼 코끼리는 갑자기 세상에 나온 것이 어리둥절한 듯 비틀비틀하는가 싶더니 곧 네 발로 버티고 서서 첫 걸음을 뗐다. 새끼의 몸이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새끼는 어미에 비해 참 작았다. 키가 70센티미터로 송아지 정도밖에 안 되었다. 물론 송아지보다는 훨씬 통통해서 80킬로그램이나 나가는지라 남자 네 명이 들기에도 벅찼다. 그래서 생김새가 송아지보다는 커다란 돼지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코의 길이는 30센티미터 정도로 아직 짧았고 커다란 회색빛 눈이 참 선량하고 귀여워 보였다.


6월 3일 오전 8시 새끼가 나온 지 다섯 시간이 지나자 태반도 완전히 나왔다. 조련사들은 태반이 다 나왔으니 이제 새끼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고 했다. 새끼는 조련사들에게 이끌려 어미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조련사들은 새끼의 코를 젖혀 새끼의 입을 어미의 앞다리 사이에 있는 젖꼭지에 맞추어 주었다. 그런데 봉은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보고 완강히 피하며 새끼를 거부했다. 코끼리들은 서로 코를 말아 냄새를 맡으며 서로의 유대감을 표현하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안 보였다. 어미가 그렇게 나오니 새끼도 잔뜩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할 수 없이 새끼를 다시 복도로 끌고 나왔다.

태어난 후로 계속 아무것도 못 먹은 새끼는 어미 젖 대신 사육사의 손가락만 자꾸 빨았다. 배고파할까 걱정되어 소젖을 짜듯 어미의 젖이라도 짜서 먹이기로 했다. 봉의 가슴은 겉보기에는 퉁퉁 부어 있는데도 의외로 젖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새끼의 건강에 필수적인 초유인지라 열심히 짜서 커다란 우유병에 담아 새끼에게 남김없이 다 먹였다. 새끼는 우유병을 쭉쭉 빨고는 더 달라는 듯 입맛을 다셨다.


6월 3일 오전 9시 다시 젖 물리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봉은 조금 더 부드러워지긴 했어도 젖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실패였다.


6월 3일 오전 10시 세 번째로 젖 물리기를 시도했다. 또 실패였다. 대신 계속 어미의 젖을 짜서 먹였다.


6월 3일 오전 11시 이제는 새끼도 어미의 곁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조련사들은 내실 한쪽에 울타리를 치고 새끼를 넣어 두었다. 어미와 새끼가 가까이에서 서로 냄새를 맡으며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노력한 덕분인지 네 번째 시도 끝에 겨우 새끼는 어미의 젖을 빨기 시작했다. 봉은 그제야 새끼가 익숙해졌는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때부터 모성 본능을 회복한 봉은 새끼를 끔찍이 사랑하는 진짜 엄마가 되었다. 정말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출산 후 가장 큰 고비를 넘기는 벅찬 순간이었다. 어미젖을 먹으며 자란 새끼는 생존율이 90퍼센트가 넘는다. 코끼리 출산이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음이 분명해졌다.



우치동물원에서 태어난 최초의 코끼리 ‘우치’. 우치동물원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쏘이의 새끼는 수컷, 봉의 새끼는 암컷이었다. 어머니는 달라도 아버지가 같으니 이복 남매인 셈이었다. 며칠 후 사육사들은 새끼 코끼리들의 다리에 무명실을 감고 온몸에 물을 뿌려 주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코끼리가 태어나면 하는 의식으로, 무명실은 우리나라의 돌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수를 의미한다.

남매 중 오빠는 ‘우치’, 여동생는 ‘우리’라고 이름 붙여졌다. 우치는 당연히 우치동물원에서 따온 이름이고 우리는 ‘우리 코끼리’에서 따온 이름으로, 합해서 ‘우리 우치동물원’을 뜻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우치와 우리는 우치동물원 역사상 최대의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이 이름에는 새끼 코끼리들이 앞으로도 우치동물원에서 죽 살아가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SBS에서 방영 날까지 언론 통제를 부탁해서 코끼리들의 탄생을 더욱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런데 이름에 담긴 희망과는 정반대로 코끼리들의 운명은 우치동물원으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뒤로 늦추어야 한다. 이 코끼리들이 이 땅에서 준 가장 큰 선물에 얽힌 사연이 우치동물원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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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코끼리, 빛고을 광주로 이사 가다


    2장 광주에 등장한 '주요 동물'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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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들을 맞이한, 예상치 못한 환대


우치동물원을 찾은 정이사는 예기치 않은 환대를 받았다. 코끼리라는 말에 우치동물원에서는 최정수 소장이 직접 적극적으로 나섰다. 코끼리가 올 수만 있다면 코끼리월드의 요구 조건을 가능한 한 모두 수용하겠다는 것이 우치동물원의 입장이었다. 정이사가 다녀간 지 얼마 후에는 최정수 소장과 담당 직원들이 직접 어린이대공원으로 찾아와 코끼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라권의 인구가 적은 데다 수도권에서 접근성도 떨어진다는 사실이 여전히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우치동물원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우치동물원이 아무리 적극적으로 나선다 해도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는 그것은 공연장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치동물원이 국내에서는 넓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동물 우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호수와 녹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치동물원에서 아무리 코끼리를 원한다고는 해도 다른 동물 우리를 허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코끼리 우리는 겨우 두세 마리만 들어가면 꽉 찰 크기였다. 코끼리 우리 앞쪽에 작은 공터가 있긴 했는데 코끼리 트래킹 코스라면 아쉬운 대로 마련할 수 있을 듯해도 공연장은 절대 불가능했다.

정이사의 답사 보고와 우치동물원의 구애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던 김회장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다른 데도 공연할 만한 데가 딱히 마땅한 것도 아니고. 우치동물원에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오고 일도 편하게 진행되고. 정이사도 광주로 하자 그랬어요. 우리는 시간도 없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회장이 코끼리월드를 접기로 결심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더 이상 코끼리 공연 사업을 계속해 보았자 수지가 안 맞는다는 판단이었다. 만약 이 무렵 코끼리들을 모두 사겠다는 동물원이 있었다면 김회장은 곧바로 손을 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마리나 되는 코끼리를 한꺼번에 살 수 있는 동물원이 금방 나타날 리 없었다. 그때까지 코끼리들을 머물 거처가 필요했다.


▲ 우치 동물원에서 만든 코끼리 홍보 전단지


양측은 코끼리 임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코끼리월드가 원하면 언제든 코끼리들을 데려갈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이대공원과 계약할 때에 비하면 갑을 관계가 바뀐 계약서였다. 계약이 확정되자마자 우치동물원에서는 보도 자료를 언론사에 뿌리는 것은 물론이고 홍보 전단지까지 만들어 광주 시내에 돌렸다. 우치동물원이 세워진 후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오는 동물은 코끼리가 처음이었다. 코끼리월드는 기존의 코끼리 우리를 보수해 조금이나마 더 넓히고 앞쪽의 공터에 코끼리 트래킹 코스와 먹이 주기 체험장을 만들었다. 어린이대공원 안에 조련사들 숙소도 마련했다.






2008년 8월 18일 선발대 격으로 세 마리의 코끼리가 우치동물원에 도착했다. 코끼리들을 나누어 싣고 화물 트레일러의 모습이 마치 기차 같았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던 동물원 사람들은 그 광경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게차가 트레일러에서 수송용 우리를 내리자 조련사들이 코끼리를 밖으로 꺼내 한 명씩 코끼리의 목에 탔다. 코끼리들은 조련사가 이끄는 대로 새로운 우리 안으로 차례대로 들어갔다.


코끼리 트래킹을 하는 모습. 특히 어린이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적응 기간을 가진 후 그달 말 코끼리 트래킹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5000원의 표 값이 비싸다고 느껴졌는지 관람객들은 흔쾌히 다가오지 않았다. 동물원 직원들이 관람객으로 가장해 코끼리 트래킹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표를 사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한 달 후에는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광주 시민들의 머릿속에서 우치동물원 하면 코끼리 타기 체험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코끼리 우리는 동물원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관람객들은 코끼리부터 먼저 본 다음에 다른 동물들도 구경하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연만큼 수익이 나지는 않았기에 코끼리월드는 계속 적자였다.

그사이 서울에서는 맞소송이 마무리되었다. 코끼리월드도 승소하고 어린이대공원도 승소해 결과는 무승부. 어린이대공원에 남아 공연을 계속하던 나머지 여섯 마리 코끼리도 2008년 11월 우치동물원에 합류해 아홉 마리가 다시 모였다. 하루아침에 우치동물원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코끼리가 사는 동물원으로 탈바꿈했다.

코끼리를 보려면 언제나 전라도 밖의 다른 동물원을 찾아야 했던 광주 시민들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코끼리들은 큰 화제가 되었다. 우치동물원은 이 코끼리들이 동물원 소속이 아니라 임대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도자료 등을 통해 분명히 밝혔지만 시민들이 그런 세세한 사실까지 확인하고 기억할 리 없었다. 우치동물원과 코끼리들의 만남은 그렇게 처음부터 불안정하게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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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3부 서울 도심을 질주한 코끼리


    3장 방 빼! 못 빼! 어린이대공원과의 줄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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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공연은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법 자리를 잡아 갔다평일에는 유치원 어린이들의 단체 관람이주말에는 가족 단위의 관람이 꾸준히 이어졌다어린이대공원으로 옮긴 지 첫 해에는 새로 공연장을 짓느라 비용이 들었음에도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데 성공했고 그다음 해부터는 흑자를 이룰 수 있었다. 3년째를 맞는 2008년에도 무난히 흑자가 예상되었다그런데 갑작스럽게 제동이 걸렸다.

2008년 초 어린이대공원은 코끼리 월드에 일방적으로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키즈센터라는 새로운 건축물을 지을 자리가 필요하니 코끼리 공연장을 철수시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사업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김회장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비록 계약서에 어린이 대공원 측이 원할 경우 언제든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내부 규정상의 문구일 뿐최소한 10년은 계약이 지속될 것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김회장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10년 생각하고 공연장 새로 짓는 데 7억 들인 거 아니겠어요. 7억 투자를 했는데 1, 2년 하고 말 줄은 몰랐지.”

어린이대공원은 김회장의 항의에 요지부동이었다키즈센터가 건설된다는 사실은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코끼리 공연장 철수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 어린이 대공원에 있던 코끼리 공연장의 모습. 현재 이 자리에는 키즈센터가 들어서 있다.


상도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눈치 챈 김회장은 철수 불가를 주장하는 대신 한 발 물러났다키즈센터는 건설 계획만 확정되었을 뿐기본 설계도조차 나와 있지 않았다실제 착공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내년까지는 기다려야 했다코끼리 공연장이 당장 없어진다면 그 자리를 1년 이상 빈 땅으로 놀려야 하니 어린이대공원으로서도 손해였다김회장은 착공 전까지만 코끼리 공연을 계속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어린이대공원은 코끼리 공연장을 당장 철수시켜야 한다는 처음 입장을 고수했다착공 시기에 관계없이 무조건 기존 시설을 먼저 철수하는 것이 내부 규정이라는 이유였다계약서의 독소 조항도 내부 규정비효율적인 철수 시기도 내부 규정이었다.

김회장은 철수를 거부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다물론 코끼리 공연도 계속했다어린이대공원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당장 어린이대공원에서 나오면 아홉 마리나 되는 코끼리들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더구나 때는 아직 겨울이었다.

사태는 법정 다툼으로까지 번졌다소송 포문은 어린이대공원 쪽에서 열었다이에 질세라 코끼리월드도 맞소송을 제기했다어린이대공원 내부 규정의 상위법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 조례에 규정된 내용보다 더 많은 임대료를 냈으니 그 차액을 돌려 달라는 소송이었다이제 와서 계약서의 부당함을 호소해 보았자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임대료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당장은 버틴다 해도 결국 철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장소를 확정해야 했다하지만 서울대공원이나 에버랜드에 또다시 타진하기는 여의치 않았고 그렇다고 송도 유원지로 돌아가는 것은 망하자고 작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회장과 정이사의 판단은 수도권이 힘들다면 차선은 반드시 충청권 또는 경남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충청권은 수도권의 인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경남권은 수도권은 포기한다 해도 부산과 울산의 인구라면 아쉬운 대로 수지를 맞출 수는 있을 듯했다정이사는 3년 전 사업 계획서를 들고 서울과 수도권을 다녔던 것처럼 이번에는 충청권과 경남권을 돌기 시작했다.


▲ 2005-2010년 전국 시군구별 인구 증감율. 인구가 몰린 수도권의 비대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은 블랙홀처럼 모든 자원을 빨아들인다사람도 돈도 서울로서울로 향한다우리나라 제2의 도시임을 자랑하는 부산 인구가 350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서울 인구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친다이렇다 보니 서울과 수도권의 동물원이나 놀이공원 시설이 프로야구 1군급이라면 그 외 지역은 2군급이다정이사가 거의 매일 지방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코끼리들이 갈 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부지가 적당하다 싶으면 임대료가 너무 높거나임대료가 적당하다 싶으면 부지가 너무 협소했다.

충청권과 경남권에서 별 소득이 없자 정이사는 전라권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곳이 아닌 만큼 큰 기대는 없었다정이사 본인이 전라도 출신이기에 고향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동네는전라도는내가 미안한데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인구도 없고지역 경제도 다른 데보다 못하고 그래서 아예 배재를 하고 안 갔어요광주 인구가 한 140만 되고 전라남도전라북도 다 해 봤자 이건 뭐그러니까 거긴 타산이 안 맞는다적자다 이렇게 생각을 했죠근데 하도 답답하니까 한번 거기라도 가 보자 해서 간 겁니다.”

정이사가 찾은 곳은 광주의 우치동물원이었다이때만 해도 정이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코끼리를 향한 우치동물원의 애달픈 짝사랑을.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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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3부 서울 도심을 질주한 코끼리


    2장 난폭한 코끼리들이 도로에서 난동을 피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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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대공원 코끼리 탈출 사건이 시작되던 순간을 요약해 보면, 코끼리들은 대공원 안에서 퍼레이드를 하던 중 바로 앞에서 비둘기 떼가 갑자기 날아오르자 괴성을 지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때 코끼리의 괴성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이었다고 표현해야 더 정확하다. 코끼리는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천성이 순하고 겁이 많다. 평소에 사육장 주변에 개나 고양이만 어슬렁거려도 화들짝 놀라고, 어린이 관람객의 장난감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만 들어도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며 불안해하는 동물이 코끼리다. 앞서 송도유원지에서의 탈출 사건도 중학생들의 환호성이 원인이었다.

더구나 낯선 장소로 이사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쉬는 시간을 줄여 가며 퍼레이드를 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미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평소보다 높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군집 생활을 하며 감정을 활발히 교류하는 코끼리의 특성상, 그 두려움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코끼리들에게 삽시간에 전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끼리들이 어린이대공원 밖으로 나가고도 한참을 내달린 데는 두려움 이상의 어떤 감정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어린이대공원역을 지나 어린이대공원 구의문 쪽으로, 공원 담벼락을 끼고 계속 달리면서 코끼리들은 억눌려 있던 본능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닐까. 야생에서 코끼리 무리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넓은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간다. 태어나자마자 말뚝에 발이 묶인 채 사람의 손에 길러진 코끼리라 해도 그 유전자에는 수천만 년 동안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이동 본능이 깊숙이 각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 야생 코끼리들의 모습.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넓은 지역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생활한다.

사진 출처 : http://www.sciencemag.org/


소외된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작업해 온 황윤 감독은 애초에 코끼리들이 밖으로 나간 것부터가 그 본능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나가긴 왜 나갔겠어요. 나가고 싶으니깐 나간 겁니다. 사람들은 마치 있어야 될 공간을 벗어난 야수처럼 말하지만 애초에 거기에 있는 것 자체가 비정상 아닌가요. 수만 년 초원을 이동하도록 진화해 온 동물의 야성을 몇 년간 발에 족쇄를 채운다고 그 본성이 사라지나요. 말이 안 됩니다.”1)

그런데도 탈출 소동에서 코끼리는 난폭한 맹수로 취급되었다. 물론 이 소동 와중에 코끼리들은 골목길에 서 있던 여성을 밀어 뒷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노점상도 자동차도 행인도 모두 놀라울 정도로 잘 피해 다니던 소심한 코끼리가 왜 유독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중년 여성을 밀쳤을까?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코끼리가 자신의 힘으로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사람이 코끼리에게 제대로 들이받히면 자동차에 받힌 것과 맞먹는 충격을 받게 된다. 코끼리가 코를 사람 어깨에 턱 얹기만 해도 잘못하면 어깨뼈에 손상이 갈 수 있다. 그런데 코끼리가 코로 들이미는 바람에, 또는 머리로 들이받는 바람에 입은 부상이 뒷머리가 찢어지는 정도였다?

정이사는 오해였다고 단언한다.

“코끼리가 사람을 진짜로 밀었으면 고작 그 정도 다친 걸로 끝날 수가 없어요. 불가능해. 그분이 코끼리가 갑자기 오니까 놀라서 피하려다가 넘어진 거죠. 코끼리하고 닿은 건 아닐 거예요.”

피해자의 주장대로 닿긴 닿았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코끼리라는 동물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코끼리가 작정하고 사람을 들이받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 식당 안에 들어간 코끼리들. 겁에 질려 식당 한구석에 몰려 있었다.

사진 출처 : 미디어 다음


사건 당시 경찰의 출동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찰은 코끼리가 사자나 호랑이급의 맹수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대응했다. 경찰이 출동하며 울린 요란한 사이렌 소리는 코끼리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어 인근 식당으로 뛰어들게 했다. 정이사는 경찰의 행동을 떠올릴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드러낸다.

“바로 거기서 일이 커져 버린 거예요. 뭐 대단한 거 잡으러 가는 것처럼 사이렌을 울리는 바람에 코끼리들이 또 놀란 거죠. 경찰이 사이렌을 울릴 이유가 전혀 없었단 말입니다. 코끼리들은 점잖게 오고 있었잖아요.”

주택 정원에 들어간 코끼리가 신이 난 듯 헤집고 다닌 데 반해 식당에 들어간 코끼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일제히 식당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겁에 질려 도망칠 곳을 찾다가 막다른 곳에 몰린 셈이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경찰차가 큰 소리로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어느새 몰려든 기자들은 반원형으로 진을 치고 플래시 세례를 터트렸다. 그러니 코끼리들이 진정이 될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마취총을 쏘네 마네, 여차하면 사살을 하네 마네 하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김회장과 정이사가 도착한 것은 이때였다. 김회장은 소동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더 키우기만 한 경찰의 대처에 분개했다.

“내가 되게 뭐라고 했지. 당장 사이렌 끄라고. 욕도 하고. 하도 화가 나니까.”

시끄러운 소리가 가시자 코끼리들은 조련사가 건네는 당근을 받아먹으며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코끼리에 대한 잘못된 시각은 언론 보도에도 이어졌다. 이날 저녁 뉴스와 다음 날 일간 신문에서는 일제히 코끼리 탈출 소식을 소상하게 전했는데, 기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될 수 있었다. ‘난폭’한 코끼리들이 ‘난동’을 부렸다. 며칠 후 언론비평전문지인 미디어오늘만이 현장 분위기를 비교적 과장 없이 전하며 ‘피해자·목격자들 - 무섭기보단 재미있었다.’라는 부제를 달았다.2)

정이사는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언론 보도에 불만을 표한다.

“아주 자극적으로 써 놨더라고요. 코끼리가 얼마나 순하고 겁이 많은 동물입니까. 근데도 그 기사만 보고 사람들이 코끼리를 아주 무섭게 생각하더라니까요. 사람보다 코끼리가 더 놀란 거였는데.”


▲ 천호대교까지 갔던 코끼리를 줄로 묶어 데려오는 모습. 이 코끼리가 가장 멀리까지 간 코끼리였다.

사진 출처 : 미디어 다음


그로부터 아흐레가 지난 4월 29일. 코끼리 공연이 재개되었다.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코끼리 탈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곧 공연 홍보가 된 셈이었다. 뉴스를 보고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며 단체 관람을 취소한 유치원들도 있었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관람석은 코끼리들이 한국에 들어온 이래로 가장 붐볐다.

특히 5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오전 11시 공연은 무료로 개방되었다. ‘속죄의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채. 코끼리들은 죄인으로서 용서를 구해야 했다.

코끼리들의 탈출은 그렇게 미완으로 남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코끼리 퍼레이드는 당장 중단되었고 코끼리들은 하루 24시간을 공연장이나 우리 안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혹시라도 코끼리가 한 걸음이라도 밖으로 내딛지 못하도록 주위에는 쇠파이프가 촘촘히 둘러졌다.

하지만 어차피 어린이대공원은 코끼리들의 ‘제자리’가 아니었다. 셋방살이의 피곤함은 방을 비워 달라는 집주인의 요구가 언제 날아들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코끼리들에게 그 요구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1) 프레시안 「“인간의 ‘관람’은 동물에겐 ‘감금’”」(2005.5.4)


2) 미디어오늘 「해외토픽으로 등장한 ‘코끼리 사건’」(200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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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3부 서울 도심을 질주한 코끼리


    1장 두 번째 보금자리, 서울어린이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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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후의 왕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한일합방조약을 앞두고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순종에게는 순정효황후보다 앞서 또 다른 부인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도 전인 1904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의 능은 능동에 마련되었다. 지금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자리다.


◀ 경성 골프 구락부에서 포즈를 취한 영친왕. 영친왕은 골프를 무척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해 경기도에 안장되자 순명효황후의 묘도 옮겨져 합장되었다. 빈 자리에는 경성 골프 구락부가 만들어졌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도 골프를 쳤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우리나라에 골프가 전래된 것은 1800년대 말이었다. 경성 골프 구락부는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을 거치며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54년 서울 컨트리클럽으로 다시 개장했다. 이곳은 정관계 거물들의 사교장 역할을 했다. 그런 장소가 놀이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 데는 웬만한 정관계 거물들보다 더 급이 높은 최고 거물의 힘이 작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70124일 서울시청에 들른 박정희 대통령은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서울컨트리클럽 부지를 매입해 어린이들을 위한 맘모스 놀이터[각주:1]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요즘같이 간담회나 설명회 같은 여론 수렴 과정 없이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신문을 통해서야 이 소식을 접한 서울 컨트리클럽 회원들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지만 감히 항의할 수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이런 결심을 내린 것일까.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능동 서울컨트리클럽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 것은 워커힐 오가는 길에 한가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을 보고 못마땅해한 박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각주:2]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가롭게 골프 치는 모습이 그리도 못마땅했다면 그 자리에 산업 단지나 직업학교를 짓는 것이 더욱 상징적인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이대공원을 지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한가롭게놀도록 하는 쪽을 택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이것이 어린이까지 이용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다고 분석한다.

어린이는 천진무구한 존재이며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은 천진난만합니다. 따라서 독재자는 어린이의 이미지를 조작하면서 좋은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박정희는 어린이대공원과 육영재단을 통해 미래의 지지자인 어린이들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세뇌시키는 치밀한 계산을 한 것입니다.”[각주:3]

굳이 어린이라는 단어를 넣어 어린이대공원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을 보아도 이러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그렇게 어린이대공원 건립 계획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서울시의 예산은 빠듯했다.

양택식 서울시장은 대기업들을 찾아다니며 각종 시설물 기부를 부탁했다아예 서울시와 경향신문이 공동으로 시민 헌수(獻樹및 어린이 공원 시설물 보내기’ 운동까지 벌였다정주영 씨현대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어린이 헌장비 1, 400만 원 상당김상홍 씨주식회사 삼양사 사장미끄럼틀 1, 250만 원 상당김수근 씨대성산업주식회사벤치 100, 150만 원 상당…… 이런 식의 명단이 신문에 실렸다.[각주:4]


  


▲ 어린이대공원 개원을 축하하는 기업들의 신문 광고. 분수, 미끄럼틀, 벤치 등 시설물 사진 아래에는 기증한 해당 기업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어린이대공원은 197355일 어린이날에 맞추어 개원했다.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정문 현판과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진 커다란 돌이 사람들을 맞이했다. 개원 첫날부터 인파가 밀려들었다. 첫날에만 40, 다음 날엔 30만 명의 입장객을 기록했다. 그 이틀 동안 미아보호소 신세를 진 어린이는 400명이었다. 매표소 주변에는 암표상이 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이대공원이 성공적으로 개원한 것을 치하하는 의미로 건설 담당자들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어린이대공원이 큰 인기를 모은 것은 그 자체가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전국에 놀이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린이대공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성인끼리도 데이트, 야유회 등의 목적으로 몰려왔다. 정작 이곳의 주인공이어야 할 어린이 관람객은 어른들에 치여 제대로 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어린이대공원이 어른을 위한 공원으로 변해 가고 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어린이들을 위한 휴식처놀이터 또는 자연 교육장으로 만들어진 어린이대공원은 일부 몰지각한 시민들의 오락장 내지는 유기장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원, 식물원, 어린이 놀이동산은 물론, 20여 만 평의 공원 내부 어디를 가나 20대 아베크족이거나 셋 또는 다섯 명씩 떼를 지어 몰려온 젊은이들,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부모님을 데리고 온 사람 등 모두가 성인들이다.

이 중에 간간이 눈에 띄는 어린이들은 부모들 손에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 피곤한 모습.

[……]

대구에서 노부모를 모시고 올라온 김모 씨(28)어린이를 위한 시설물을 어른들이 몽땅 차지해 어린이들에게 미안하지만 노인들을 모실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하기도.

경향신문 1976.3.22

 


▲ 어린이 대공원이 맞은 첫 일요일을 보도한 신문기사. 많은 관람객이 몰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송도 유원지는 서울대공원, 롯데월드 등 대형 놀이 공원이 등장하면서 경쟁력을 잃고 쇠락해 갔다. 어린이대공원도 시설물로 비교하자면 송도 유원지보다 조금 낫긴 하나 대형 놀이 공원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어린이대공원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몰려들던 관람객이 분산되면서 어린이대공원 내부는 적당한 여유를 갖게 되었다. 88열차, 바이킹 등 놀이 기구들도 자연스럽게 아이들 차지가 되었다. 서울 안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관람객 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자 한때 민영화를 통한 활성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1996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개통 덕분에 관람객은 다시 증가했다. 코끼리월드가 한창 서울행에 재도전하고 있던 2004년에는 어린이대공원 불황은 없다라는 헤드카피를 단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각주:5]

 

한마디로 어린이대공원은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굳이 코끼리 공연까지 유치할 이유가 없었다.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입장이었기에 계약은 어린이대공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애초에 코끼리월드가 바란 공연장 부지는 어린이대공원 안쪽에 위치한 바다동물관 옆이었다. 하지만 어린이대공원 측은 정문에서 왼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구석진 자리를 배정했다. 2수영장이 있던 이 자리는 관람객들이 주로 다니는 중심 길에서 떨어져 있었다.

계약 조건도 코끼리월드에 불리했다.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대공원 측이 원하면 언제든 계약이 해지된다는 것, 이 두 가지 독소 조항이 있었다. 협상을 맡고 있던 정이사가 계약서 문구를 고치자고 요구해 보았지만 어린이 대공원의 대답은 내부 규정이라는 것이었다. ‘내부 규정이라는 말은 마치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약속처럼 들렸다. 서울행이 급했던 김회장은 더 따지지 않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중력의 법칙에 버금가는 갑을 관계의 법칙이었다.

그래도 수도권 입성을 위해서는 감수를 하자 했어요. 설마 별일 있겠나 해서. 최소 10년 이상은 있을 거 생각하고 들어간 거지.”

이 독소 조항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2005416일부터 어린이대공원에서 코끼리 공연이 시작되었다. 관람객 수가 김회장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은 아니었지만 송도 유원지에서보다는 확실히 늘었다. 이 정도면 순조로운 재출발이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날벼락이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 연재의 맨 앞을 장식했던 바로 그 코끼리 탈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미 서술했으니 이 의문을 파헤쳐 보자. 코끼리는 왜 탈출했던 것일까?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1. 동아일보 「박대통령 지시 “서울컨트리클럽 골프장 어린이 놀이터로”」(1970.12.4) [본문으로]
  2. 주간한국 「[한국초대석]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2005.9.26) [본문으로]
  3. 오마이뉴스 「친일·독재잔재 드리운 어린이대공원」(2004.5.4) [본문으로]
  4. 경향신문 「시민헌수 어린이 공원 시설물 보내기」(1973.3.10) [본문으로]
  5. 서울신문 「어린이대공원 “불황은 없다”」(2004.11.1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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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프렌치 키스하기」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 문학 분야에 선정되었습니다. 우수교양도서는 총 12개 분야 418종의 책이 선정되었는데, 「동물원에서 프렌치 키스하기」는 문학 분야 82종 한 권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동물원에서 프렌치 키스하기: 우치동물원 수의사 최종욱의 야생 동물 진료 일기」는 아프고 다치고 버려진 유기 동물들까지 거두고 보살펴 우치동물원을 출생률 1위의 안식처로 만들기까지, 열정적인 수의사의 고군분투 동물원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는 블로그 포스팅을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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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문화부 우수교양도서 선정결과 공고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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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2부 한반도에 왔던 코끼리들


    1장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코끼리



 

꼬리가 석 자나 되는 이상한 짐승


소같이 생긴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에서 오식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일연의『삼국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통일 신라 소성왕 때인 799년의 기록이다. 이 표현대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영락없이 코끼리가 그려질 것이다. 신라는 국제 무역이 활발한 나라로 당과 일본은 물론이고 이슬람과도 교류했다. 짤막한 대목이지만, 그 활발한 무역의 와중에 어느 코끼리 한 마리가 신라 땅에 발을 디뎠던 것은 아닐까? 신라 사람들은 이 기이한 동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추측은 무성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象(코끼리 상)’이라는 한자로만 그 존재가 막연히 알려졌던 기이한 동물 코끼리. 이 코끼리가 우리 역사에 ‘확실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 후로도 수백 년이 흐른, 조선에 들어와서이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자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 5두씩을 소비하였다. (태종 11년 2월 22일)


신비롭고 기이한 동물 코끼리는 태종 11년에 느닷없이 조선 땅에 등장한다. 라오스나 태국이 아니라, 옆 나라 일본을 통해서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위와 같이 1411년 2월 22일 일본이 조선에 코끼리를 바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일본 국왕 원의지는 천황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실권을 쥐고 있던 아시카가 막부의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 코끼리를 어디서 구했을까? 1408년 6월 22일 남만, 즉 오늘날 동남아 지역의 선박이 말 한 마리, 공작과 앵무새 각각 두 쌍 그리고 코끼리 한 마리를 싣고 일본 와카사 지방에 도착했다. 이 동물들은 쇼군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외교 선물로 받은 코끼리를 다시 외교 선물로 조선에 보낸 셈이다.

이 코끼리는 궁중의 가마, 말, 목장 등을 관리하는 ‘사복시’에 맡겨졌다. 사복시는 몇 해 전 역시 일본이 선물한 원숭이를 잘 길러 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말이나 원숭이와는 급이 다른 동물이었다. 실록에 먹이양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코끼리의 먹성은 조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4, 5말(두)이라면 70~90리터 정도의 양. 사람도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던 그 시절에 날이면 날마다 그만큼의 콩을, 그것도 단 한 마리의 동물이 먹어 치우니 사복시에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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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방영되고 있는 MBC 드라마 「마의」의 한 장면. 주인공 광현(조승우)이 일하고 있는 곳이 바로 사복시이다.  광현은 지금으로 치면 수의사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듬해인 1412년 코끼리는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정삼품 벼슬을 지낸 적이 있는 이우라는 양반이 코끼리를 보겠다며 사복시를 찾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우는 코끼리의 모습이 추하다며 비웃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코끼리는 그만 이우를 밟아 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비록 이우가 코끼리를 비웃었다고 해도 코끼리가 사람 말을 알아듣고 성을 냈을 리는 없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아마도 이 코끼리는 수컷이었고 마침 이때 발정기였던 것 같다. 수컷의 양쪽 눈 옆에 있는 측두샘이 부풀어 오르며 끈적끈적한 검은 물질을 분비하면 발정기라는 표시다. 발정기는 1년에 한 번 두세 달 정도 지속된다. 코끼리는 초식 동물이라 기본적으로 온순한 성질이지만 발정기를 맞은 수컷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흥분 상태가 된다. 코뿔소 같은 큰 동물까지 공격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민감한 시기에 이우가 코끼리를 자극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기록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사건의 파장이 꽤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한 번으로 끝났으면 외교 선물이라는 귀한 신분이니 어찌어찌 넘어갔으련만 코끼리는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사람을 죽이는 사고를 쳤다. 이 희생자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름 없는 평민이나 노비쯤으로 짐작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이 태종에게 청한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 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1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에 두소서.”

『맹자』에 따르면 주나라의 정치인 주공이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를 멀리 쫓아내자 천하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유정현의 말에 태종은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코끼리를 둘러싼 이 모든 소동이 한 편의 희극처럼 느껴진 것일까?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한양에서 쫓겨나 전라도로 내려간 지 약 반 년 만에 코끼리는 다시 실록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를 올렸다.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하여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장도는 오늘날 보성군 벌교읍에서 배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어 오늘날 꼬막과 낙지가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 되어 주고 있다. 하지만 동남아 내륙의 열대우림이 고향인 코끼리에게 수초는 영 입맛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코끼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태종은 코끼리를 육지에 내보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했다. 코끼리를 둘러싼 난리법석은 한동안 가라앉은 듯하다가 세종 2년인 1420년 전라도 관찰사가 청을 올리면서 다시 불거졌다.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한마디로 전라도만 애먹는 것이 억울하니 옆 동네들과 고생을 나누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세종이 곤룡포를 입고 앉아 있긴 해도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정정한 상왕 태종이 가지고 있던 때였다. 전라도 관찰사의 청을 허락한 사람도 세종이 아닌 태종이었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하소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끼리가 또 사람을 죽인 것이다.

“공주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육지로 돌아와 그나마 좀 살 만해졌는데 다시 섬으로 가라니 코끼리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 눈에 코끼리는 곡식을 축내는 것도 모자라 자꾸만 인명 피해까지 일으키는 골칫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세종은 이 기이한 동물에 애착이 있었던 것일까? 충청도 관찰사의 청을 들어주면서도 코끼리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세종의 당부를 끝으로 기록에 코끼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과도한 먹성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낯선 나라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귀양’만 다니던 코끼리는 세종의 당부대로 무사히 제 수명을 다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는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어디에도 코끼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니, 세종의 당부대로 적당한 섬에서 탈 없이 지내다 생을 마쳤다고 상상할 수밖에.

그렇게 기록에서 사라졌던 코끼리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구한말에 다시 우리나라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단순한 외교 선물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근대화라는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에 휩쓸려서 온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코끼리 이야기는 최근 들어 연극과 동화 등 여러 가지 작품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연극 「코끼리와 나」의 포스터와 동화 『귀양 간 코끼리』의 표지.



사실 코끼리는 ‘세계사’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 전에도 인간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살아왔다. 잠깐 코끼리의 역사를 일별해 보자면 가장 오래된 코끼리로 알려진 것은 3500만 년 전에 살았던 메리테리움이다. 이집트에서 화석이 발견된 메리테리움은 어깨높이가 고작 70센티미터로 지금의 코끼리보다 훨씬 작았고 생김새도 코끼리보다는 돼지에 가까웠다. 코가 길지도 않았다. 다만 윗입술이 약간 두드러져 있긴 했다. 메리테리움의 후손들은 진화를 거듭하며 조금씩 덩치가 커지고 코도 길어지며 지금의 코끼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그 긴긴 세월 동안 여러 종의 코끼리가 멸종해 갔다. 잘 알려진 매머드도 그중 하나.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코끼리는 진화라는 치열한 경쟁의 생존자들이다.


▲ 가장 오래된 코끼리로 알려진 메리테리움. 현재의 코끼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코끼리의 생태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틈틈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터이니 딱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다. 일단 코끼리는 육지에서 가장 거대한 몸집의 소유자답게 힘이 세다. 그 코로 적을 휘감아 들어 올려 내동댕이치면 적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호랑이 같은 맹수도 코끼리에게 쉽사리 덤벼들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코끼리는 천성이 온순하다. 위험을 느끼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 정도 많아서 서로에게 헌신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코끼리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해왔다. 기원전 2000년 전에 이미 인더스 문명에서 코끼리를 조련해 탈것으로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인간은 코끼리 등에 탄 채 길을 다니고, 짐을 옮기고, 맹수를 사냥하고, 전쟁에 나갔다. 한니발이 로마를 칠 때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갔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사람들은 코끼리를 이용하는 동시에 신성시했다. 힌두교에서 지혜와 학문의 신 가네샤는 코끼리 얼굴을 가졌다. 불교에서 마야 부인은 코끼리 꿈을 꾸고서 싯다르타는 잉태했다. 아프리카에는 코끼리를 우러르는 토테미즘이 존재했다. 로마에서 코끼리는 태양, 달, 별을 숭배하는 불가사의한 동물이었다.

코끼리는 서식지도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광대했다. 여기서 다시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된 『맹자』의 그 대목을 떠올려 보자. 주공이 코끼리를 쫓아냈다니 중국에도 코끼리가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 오늘날 동양에서 코끼리의 서식지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한정되어 있지만 기원전 5000년 전만 해도 코끼리는 황허 강 유역까지 널리 분포했다. 코끼리를 길들이고 이용한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코끼리 상(象)’자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구가 늘고 농경문화가 확대되면서 중국은 코끼리의 서식지인 숲을 파괴해 농지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코끼리의 서식지가 점차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농경이 아니라 오락에 코끼리를 활용하면서 코끼리의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례로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로마는 코끼리를 마구잡이로 사냥했다. 산 채로 잡혀 간 코끼리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 찬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와 대결을 벌여야 했다. 그러면서 코끼리는 중국과 북아프리카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코끼리의 생존이 본격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이다. 현대에는 검투사와의 대결은 새 발의 피라 할 정도로 대대적인 코끼리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아프리카 대륙 중부의 나라 차드를 들 수 있다. 20년 전에 4만 마리의 코끼리가 있던 것이 지금은 고작 2000마리다. 현재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은 아프리카코끼리를 취약(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음) 단계, 아시아코끼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심각한 위기(야생에서 멸종할 가능성이 높음) 단계로 지정해 두고 있다.


◀ 말레이시아에서 적발된 불법 상아. 코끼리 밀렵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대대적으로 살육하지 않더라도, 현대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코끼리의 생존을 다각도로 위협했다. 코끼리 상아에 대한 수요 증가는 가장 대표적인 요소로 꼽힌다. 과거에는 왕족이나 귀족만 상아를 소비했으나 현대로 올수록 세계적으로 상아의 수요가 급증했다. 밀렵꾼들은 적외선 탐지기, 자동 소총, 헬리콥터 등 신형 무기를 이용해 코끼리 무리를 빠른 시간 안에 학살한다. 현대에 부쩍 늘어난 내전도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다.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많은 국립공원이 파괴되면서 코끼리가 급속도로 서식지를 잃게 되었다. 인구의 급격히 증가도 코끼리의 터전을 위협했다. 아시아의 높은 인구 밀도로 인해 코끼리 서식지에까지 개발의 손길이 미치면서 코끼리는 점차 농지와 주거지를 위협하는 침입자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서구 식민 지배와 근대화이다. 이 거대한 물결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코끼리와 공존하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고 이는 사람들의 삶뿐 아니라 코끼리의 삶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식민 지배와 근대화가 거꾸로 한반도에는 다시 코끼리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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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1부 코끼리 인천 상륙 작전


    5장 서울로 가야 적자를 면할 수 있다!






▲ 당시 어린이대공원에 있던 유일한 코끼리 태산이. 가족을 잃고 오랫동안 홀로 생활하다 2011년 숨졌다. 현재 어린이대공원은 새로 들여온 코끼리 한 쌍을 보유하고 있다.


코끼리월드가 송도 유원지에 오게 된 것은 애초에 서울행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코끼리월드는 그 서울행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최소한 손익분기점이라도 맞추려면 서울에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송도에는 계속 있어도 좋아질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서울행이란 서울 내부에 또는 서울 시민이 일상적으로 접근 가능한 경기도 지역에 위치한 놀이공원으로 간다는 의미다. 따라서 타깃은 서울어린이대공원, 서울대공원, 에버랜드 이 세 군데가 되었다.

사업 계획서를 넣고, 관련 부서의 담당자를 만나고, 사업 취지를 설명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미 한 번 실패했던 서울행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코끼리월드는 더욱더 적극적이었다. 서울행은 차선책을 따로 염두에 둔 최선책이 아니었다. 코끼리월드가 계속되느냐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선이었다.

마침내 희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어린이대공원에서 다음 해 상반기 중으로 코끼리 공연장을 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제 계약서만 쓰면 서울행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코끼리월드의 다른 주주들이 발목을 잡았다.


▲ 당시 수도권의 유원지들 위치. 송도 유원지가 수도권 안에서도 구석에 치우쳐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회장이 실질적으로 코끼리월드를 꾸려 가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법적으로는 다섯 명의 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 코끼리들을 서울로 옮기기 위해서는 다른 주주들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김회장을 제외한 네 명의 주주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코끼리월드의 자본금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어린이대공원에 새로운 공연장을 짓기 위해서는 주주마다 2억 원씩을 더 투자해야 했다.

주주들에게 코끼리월드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았다. ‘코끼리’ 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 한 번도 흑자는커녕, 흑자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끊임없이 비용만 소모되고 있었다. 더욱이 송도에서 실패한 코끼리 공연 사업이, 서울에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터에, 2억 원이나 더 투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다른 주주들의 입장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김회장은 코끼리 사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자면 서울행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김회장은 이 시점에서 아예 코끼리월드 전체를 인수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원래부터 주도적으로 사업을 이끄는 것에 익숙한 김회장에게 주주들과 일일이 논의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그럼 다 빠져라 이랬지. 그동안 당신들 투자한 돈 내가 다 줄게, 나가.”

김회장은 모든 지분을 넘겨받는 대가로 선뜻 다른 주주들에게 그간의 투자 금액을 모두 물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주들은 당연히 오케이를 외쳤고 그렇게 모든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코끼리월드를 완전히 소유하게 된 김회장은 그동안 나간 비용과 관련된 모든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김회장이 매의 눈을 치켜뜨자 서류 곳곳에 허점이 보였다. 횡령의 흔적들이었다. 처음에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그때까지 코끼리월드의 실제 업무를 진행해 왔던 사람들이 경비를 부풀리는 식으로 몰래 챙긴 돈은 2, 3억 원에 달했다. 여기에는 김회장의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책임을 물릴 수도 있었지만 김회장은 그저 당사자들을 불러 놓고 증거를 보여주며 말했다. 물어내라 그리고 그만둬라. 여기서 방점은 ‘물어내라.’보다 ‘그만둬라.’에 찍혀 있었다. 사업하는 김회장으로서는 회사 돈 도둑질하는 직원을 두고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직원들은 횡령액의 일부만 물어내고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김회장은 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게 주주들에 이어 직원들까지 정리되었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서울행뿐이었고 서울행에는 흑자의 희망이 있었다.  정이사는 그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저도 보니까, 서울 가면 되겠더라고요. 코끼리 공연이 생소한 거라 되겠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판단을 했죠.”

그리고 멋쩍은 표정으로 덧붙인다.

“지금 생각하면 판단 미스였죠. 허허.”

코끼리들은 송도 유원지에 온 지 2년 만인 2005년 4월 다시 트럭에 실려 서울로 향했다. 코끼리월드 소속의 노동자로서 코끼리들에게는 수익을 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흑자 모델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주해야 하는 이주 동물의 자본주의적 운명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시간을 되돌려 보자. 600년 전 한양으로 말이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한반도에 최초로 등장한 코끼리에 관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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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코끼리


by 최종욱, 김서윤


제 1부 코끼리 인천 상륙 작전


    4장 서른 살 코끼리 쿤의 죽음




코끼리가 탈출했다고?


코끼리가 송도에 온 지 석 달 후인 2003년 10월 11일 오전 9시경이었다. 사육사들은 코끼리들을 수돗가로 데려가 물을 먹였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으레 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그 옆에 소풍을 나온 중학생들이 한 무리 있었다. 코끼리들이 한꺼번에 열 마리나 나타나자 중학생들은 신기한 마음에 와아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이 소리가 코끼리들에게는 위협적으로 들렸나 보다. 그중 네 마리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사육사들이 미처 진정시킬 틈도 없었다.

어찌나 빨리 달렸는지 코끼리들은 사육사들 눈앞에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덩치 큰 동물이라 무방비로 길에 나서면 위험했다. 사람도 위험할 뿐더러 코끼리도 위험했다. 사육사들은 경찰서와 119 구조대에 신고했다.

경찰들과 119 구조대원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사육사들까지 모두 60여 명이 수색에 나섰다. 119 구조대 하면 보통 화재 같은 사고 현장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내는 활약상을 떠올리지만 위기에 처한 동물을 구해 내는 것도 119 구조대가 크게 활약하는 분야다. 2011년 119 구조대의 구조 실적을 살펴보면 벌집 제거가 22.2퍼센트, 동물 관련이 11.2퍼센트로 화재 11.2퍼센트, 교통사고 9.7퍼센트를 능가한다.1) 동물 관련 구조 요청은 보통 “가로수 위로 올라간 애완용 앵무새를 구조해 달라.”, “길 잃은 고양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달라.”, “안타까운 유기견을 구조해 달라.”라는 내용이다.2) 다양한 동물 구조에 동원되다 급기야 고양이를 구조하던 구조대원이 사고로 숨지는 일까지 벌어지자 이후 2011년 9월 9일부터 응급 상황이 아닌 애완동물 구조에는 119 구조대가 출동하지 않도록 관련 법률이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경우가 달랐다. 애완동물이 아닌 동물원 동물, 그것도 맹수가 탈출한 것은 명백한 긴급 상황이다. 동물원에서 동물이 탈출하는 일이 왕왕 벌어지는데 이때 특별한 규정이나 매뉴얼은 없다. 순한 동물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편이지만 맹수의 경우에는 동물원 직원들만으로는 포획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119 구조대에 신고하게 된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2010년 12월 서울대공원에서 ‘꼬마’라는 이름의 여섯 살짜리 수컷 말레이곰이 탈출했을 때도 119 구조대원은 물론 경찰까지 수색대로 동원되어 9일 만에 간신히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 서울대공원에서 탈출한 말레이곰 ‘꼬마’의
        포획 장면. 당시 이 사건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 송도 유원지에서의 코끼리 탈출 사건을 보도한 

    YTN 뉴스 화면. 이 사건은 지상파 방송이나 

    주요 일간지에는 보도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코끼리 탈출 사건은 의외로 싱겁게 흘러갔다. 탈출한 네 마리 중 야외극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코끼리와 유원지 정문 근처 실탄 사격장 앞에 있던 코끼리는 조련사들에게 이끌려 금방 공연장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두 마리는 유원지 밖 차도를 건너 계속 달렸다. 다행히 이날은 토요일이었고 더구나 이른 시간이라 길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두 코끼리가 발견된 곳은 청량산 골짜기였다. 청량산은 송도 유원지에서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해발 172미터의 작은 산이다. 이 코끼리들까지 공연장으로 돌아오면서 1시간 30분 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목격자도 별로 없고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도 물론 없었기에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남았다. 얼마 뒤 일어난 그다음 사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었다.



코끼리가 주저앉았어요!


다른 일로 지방에 있던 김회장은 연락을 받고 황급히 송도 유원지로 향했다. 서울 사무소에 있던 정이사도 부랴부랴 송도 유원지에 도착했다. 코끼리 한 마리가 주저앉은 채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서른 살 먹은 암컷 코끼리 쿤이었다. 조련사들 설명으로는 이러고 있은 지 예닐곱 시간째라 했다. 코끼리는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장이 눌려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비상 사태였다.

일단 급한 대로 쿤의 배를 로프로 묶어 천정에 연결해 억지로 일으켜 놓았다. 당시 공연장에는 수의사가 상주하지 않았다. 코끼리들이 한국에 올 때 비행기에 함께 탔던 현지 수의사는 코끼리들이 무사히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돌아갔다. 우리나라에는 동물원을 비롯해 어떤 시설이든 수의사 상주를 강제하는 법률이 없다. 그래서 사설 동물원이나 수족관에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수의사를 두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코끼리월드에서도 따로 수의사를 고용하지 않고 조련사들이 곧 수의사 역할까지 도맡아 했다. 노련한 조련사들은 기본적인 치료법이나 응급처치 요령을 익히고 있어서 평소에 코끼리들이 아프면 알아서 약도 먹이고 주사도 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련사들조차 속수무책이었다.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정이사는 인근의 동물병원들에 연락했다. 하지만 애완동물을 주로 진찰하던 수의사들에게 코끼리는 너무 낯선 존재였다. 동물원에 와서 코끼리를 진찰해 달라는 요청에 대부분 처음부터 거절하거나, 왔다가 아무 치료도 못하고 되돌아가거나, 주사제만 겨우 처방해주었다. 수의사들로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을 섣불리 진찰하고 약을 처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반 동물병원 수의사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코끼리가 있는 큰 동물원에 연락해보았다. 하지만 상황을 설명하자 동물원 수의사들도 그런 증상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답변뿐이었다.

사람을 진료하는 의사도 그렇지만 수의사의 경우 특히 이론보다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 수의학과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 흔히 기르는 동물들, 예컨대 개,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나 소, 돼지 같은 가축에 대해서 가르친다. 실전에서는 이 동물들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응용해서 다른 동물에게까지 적용하는데 아무래도 세세한 면에서는 정확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처음 보는 증상에 맞닥뜨리면 수의사들은 국내외 전문 서적 찾아보기,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문의하기, 수의학 관련 외국 사이트 뒤지기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씩 치료해 나간다. 그런 경험을 쌓으면서 수의사의 실력도 향상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동물이 다양하지 않아 수의사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을 기회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나마 동물원 수의사는 비교적 그 기회가 많은 편이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동물원은 대부분 해당 지자체 소속이라 동물원 수의사가 자주 교체된다는 것이다. 공무원 순환 보직은 장기 근무에 따른 부패를 없애고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지만, 동물원 수의사의 경우에는 전문성을 낮추고 경험 축적을 방해하는 부작용도 따른다. 그래서 코끼리의 경우처럼 특이한 동물에게 특이한 병이 발병하면, 더구나 그 병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내과 질환이라면 동물원 수의사라도 뾰족한 방도가 없다. 

그렇게 이렇다 할 처방도 받지 못한 채, 낯선 나라에서 앓기만 하던 쿤은 결국 일주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혹시 쿤은 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낯선 땅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간 쿤의 모습은 지켜본 사람들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된 이주 노동자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코끼리를 ‘분해’하던 밤



코끼리는 지능이 높은 만큼 유대감도 강하다. 가족이나 동료가 죽으면 무리 전체가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진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련사들은 애도할 겨를도 없이, 나머지 아홉 마리의 코끼리가 동요하지 않도록 얼른 쿤의 사체를 우리 밖으로 옮겼다. 덩치가 너무 크다 보니 사람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터라 지게차를 이용해야 했다. 일단 옮기고 난 후에는 코끼리의 사체를 처리하는 것이 또 큰 고민거리로 남았다.


▶ 야생 코끼리 무리. 코끼리는 나이 많은 암컷을 중심으로 수십 마리가 함께 살아가며 끈끈한 유대를 나눈다.


원래 라오스에서는 코끼리가 죽으면 그냥 들판에 방치해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불법이다. 폐기물 관리법에 따르면 동물 사체를 아무 곳에나 버려서는 안 된다. 전염병에 걸린 동물 사체는 파묻거나 소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체는 생활 쓰레기 봉투에 넣어 배출하거나 소각해야 한다. 사람이 죽어서 화장이 된다면 동물은 죽어서 소각이 되는 것이다. 소각하는 것도 그냥 아무 데서나 해서는 안 되고 지정된 소각업체에 의뢰해야 한다. 큰 동물원에서는 자체적으로 소각장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가족같이 키우던 애완동물의 사체조차 폐기물로 분류하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일단 법적으로 동물 사체는 이 법에 따라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에 코끼리 크기를 감당할 만한 ‘쓰레기 봉투’는 물론 소각로도 없다는 것이다. 코끼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자 원래 우리나라에 없던 동물이니, 그만한 소각로가 있을 리 만무했다. 코끼리를 소각하려면 소각장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분해해야 했다. 이 작업에는 소를 다루는 도축장 직원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톱으로 코끼리 사체를 수십 조각으로 분해했다. 톱질이 빠른 전문가들인데도 초저녁에 시작된 분해 작업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정이사도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며 겨울밤을 보냈다.

“코끼리 몸이, 이건 뭐 바위 덩어리예요. 그걸 전기톱으로 잘랐지요. 하도 딱딱하니까 자르다 보면 전기톱이 서 버려요. 전기톱을 갈아 가면서 잘라야 했지요. 휴, 힘들었죠.”

사체를 소각한 후 코끼리의 죽음을 환경청에 신고하는 것으로 사건은 공식적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일이 코끼리월드에 남긴 여파는 컸다. 금전적인 손해도 손해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쿤은 그전까지만 해도 건강에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렇게 갑자기 숨을 거두었으니 다른 코끼리들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조련사들도 의기소침해했다.



코끼리를 ‘소 키우듯’ 키워야겠다!


그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코끼리월드의 대표인 김회장은 다시 의욕을 다졌다. 

“내가 내린 결론은, 코끼리들을 잘 먹이지를 못했다, 먹이에 문제가 있었다, 이거였지. 나도 시골 출신이니까 소 키우던 기억이 있어요. 이 코끼리들을 소 키우듯이 잘 먹여서 키워야 되겠다, 영양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됐지.”



◀ 영화 『워낭소리』의 한 장면.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소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코끼리의 죽음은 김 회장의 기억 저편에 있던 소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냈다. 화가 이중섭의 유명한 「황소」그림을 비롯해, 소를 소재로 한 예술 작품, 문학 작품도 적지 않을 만큼, 소는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은 동물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김회장 연배의 사람 중에는 어릴 때, 소를 살뜰히 보살폈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당시 농사짓는 시골 마을에서 소는 집안의 소중한 노동력이자 재산이자 벗이었고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여물을 챙기고 외양간을 치우며 열심히 소를 키웠다. 그렇게 소를 키웠던 경험은 ‘소중한 짐승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의 원형이 되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기억이 코끼리가 소는 아니지만 ‘소 키우듯’ 코끼리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이끌어 냈다. 마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인류애로 발전하듯 소에 대한 우리 민족의 남다른 애정과 애착은 ‘범동물적’ 공감대가 되어 코끼리라는 이주 동물을 돌보는 데까지 확장된 것이다.

대표의 결심에 따라 코끼리들의 먹이는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때까지 코끼리월드에서 코끼리에게 준 먹이는 수입한 건초가 전부였다. 이는 국내 동물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쿤의 죽음 이후, 건초 대신 조련사들이 직접 베어 온 생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주식 외에 영양식도 챙겼다. 쌀겨, 호박, 고구마, 당근, 건빵 등 좋은 음식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중에는 실제로 김회장이 어릴 적에 시골에서 소에게 주던 그 음식도 많았다. 농가에서 나오는 여러 부산물이 들어 있기에 소의 여물은 상당한 고영양식이었다. 라오스에서는 비용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양파, 마늘 같은 자극적인 채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자연식은 초식 동물에게도 잘 맞기 마련이다. 이후 근 10년 동안 다른 코끼리들이 모두 무탈하게 잘 지냈으니 ‘소의 기억’은 코끼리들의 생존에 큰 공을 세운 셈이다. 먹이가 달라지니 안 그래도 덩치 큰 코끼리들이 더욱 더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코끼리들의 영양 상태가 좋아졌다고 해서 관람객 수가 늘지는 않았다. 1년 만에 3억 원의 적자가 예상되었다. 코끼리월드는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서울행이라는 승부수였다.




1) 소방방재청 「2011년 소방 구조 활동 실적 분석」(2012)


2) 경향신문 「“고양이․유기견 구해 달라” 몸살 앓는 119」(2012.7.9)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posted by Banbi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