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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쉬고 있는 이야기/에디터김의 워킹데이즈

논리정연해서 감동적인, 잘 쓴 ‘주장하는 글’에 대하여

논리정연해서 감동적인, 잘 쓴 ‘주장하는 글’에 대하여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바로는 소설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계 구성을 가진다고 했다. 반면 논술문, 그러니까 ‘주장하는 글’은 서론, 본론, 결론의 3단계만 가진다. 소설은 저 5단계만 봐도 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드는 데 반해, 논술문의 구성은 구성만 봐도 어쩐지 지루해 보인다. 말을 꺼내고, 할 말을 하고, 그다음엔 마무리를 한다는 것 아닌가. 이 얼마나 건조한지. 이런 구조로는, 무려 5단계의 다채로운 구성을 가진 소설의 재미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가지 ‘주장하는 책’들을 만들다 보면, 잘 쓴 주장하는 글이야말로, 문학처럼 발단과 전개를 거쳐 위기와 절정에 이르렀다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극적인 이야기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극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말에 이르러 어느덧 그 주장에 슬며시 감동받는다.



이번에 만든 펭귄과 리바이어던』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우선, 인간에 대한 통념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태어난 후 길러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발 단’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은 타고나기를 이기적이라고 결론 내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서, 자기 이익만 추구한단다. ‘리바이어던’을 쓴 토마스 홉스도 그랬고,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애덤 스미스도 그랬고, ‘이기적 유전자’를 내세운 리처드 도킨스도 그랬다. 저자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전개’한다. 그러던 중에 이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좋은 위기다. 

위키피디아, 도요타, 시카고 경찰, 사우스웨스트 항공사 같은, 인간의 선의와 협력에 기반한 조직들이 하나둘 성공 사례를 쓰기 시작한다. 이기적 유전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조직들이 존재를 과시한다. 특히 가장 현대적인 산업이자 미래 지향적인 IT 산업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그냥 별난 사례일까?

이들이 특이하고, 예외적이고 별스러운 조직이 아니라, 앞으로의 사회가 지향해야 할 조직 구성 모델이라는 데에서, 저자의 주장은 ‘절정’에 이른다.

인터넷이 사회에 미치는 연구에서 독보적인 존재를 드러냈던 저자는, 이 연구를 토대로 한걸음 더 나아가, 어째서 인간의 이타심과 선의, 협력에 기반한 조직만이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강력하게 논박한다. 단순한 낙관론이나, 코뮌에 대한 남은 로망이 아니라,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현실 세계의 수많은 사례들에 기반해 주장을 펼친다.

책의 대단원은, 인간이 오랫동안 서구 사회가 가정해온 것처럼 이기적이고,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마침내 ‘결말’에 이른다.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대로, 생각보다 협력적이고, 이타적이며, 이따금 조건 없이 선의를 베푼다.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에 대해 모험을 한다. 남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보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에게,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상호작용을 냉소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따른 예측보다는 훨씬 더 자주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인간이 번창한다. 적어도 아무도 믿지 못할 때보다는 더 풍요롭게 산다.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이 중대한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나는 광범위한 관찰을 통한, 이용 가능한 과학적 증거를 파헤쳐가며 남을 믿고 신뢰를 주고받는 사람이 잘 속는 사람이나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협력이 이기심을 어떻게 이기는지도 증명하고자 했다.


논리정연해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믿고 싶어진다.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믿고 싶다.

그러고 보니, 소설과 닮은 점이 또 하나 있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를 길고 복잡하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신경과학, 경제학, 사회학, 진화생물학, 정치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가져다 근거로 제시한다. 인간은 원래 선하다는 뻔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토록 길게 쓰다니. 사실 소설도 결국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져서 가슴 아프다는 뻔한 러브스토리를 그토록 복잡하고 길게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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