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철학자인 서동욱의 글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들뢰즈, 라캉 등,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임에도, 그가 말하면 머리를 싸매고서도 따라나서게 된다. 서동욱의 글은 깊은 넓은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
“정갈하게 빚은 음식을 여러 접시에 올린 요리상처럼 현란하고 다양하다. 철학자들의 이름을 붙인 요리가 있는가 하면 철학 주제들을 다룬 요리도 있다. 어느 하나 내치기 힘들 정도로 식욕을 자극한다.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들이 주로 쓰는 개념들을 맛보고 아는 데는 이만큼 좋은 식사도 없을 것이다.” ―강영안(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철학이 세계에 대해 질문을 하는 방식에서부터라면 지금도 나는 가장 앞자리 책상에 앉아 말똥말똥하게 그가 건네준 철학의 작은 곁을 지키고 있다. 독자들이여, 저자의 말대로 운동화를 신고 이 책을 따라가보야야 한다. 이 책은 철학을 여행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근사한 히치하이킹이 되어줄 것이다.” ―김경주(시인, 극작가)
스피노자에서 데리다까지,
돈 쓰는 일의 어려움에서 스마트폰 시대의 책읽기까지,
삶의 골칫거리들과 현대철학의 고민거리들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나?
이 책은 현대철학에 대한 쉬운 안내서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서동욱의 독창적인 에세이이다. 책은 1부 ‘이론’과 2부 ‘연습’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현상학(실존주의), 구조주의(탈구조주의)라는, 현실에 특별히 밀착했던 두 흐름을 중심으로 주요 철학자들을 살핀다. 각 꼭지 뒤에는 철학자들의 핵심 개념과 저작에 대한 설명, 더 공부할 때 도움이 될 만한 국내외 자료들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철학자들의 대표 저작을 백과사전을 참조해 정리한 자료가 아니다. 저자가 20년 이상 공부해온 내용을 압축해 알짜배기만 담아놓은 노트나 마찬가지이다.단 한 줄의 설명에도 저자의 내공이 스며들어 있다.
2부에서는 1부의 이론을 바탕으로, 주제를 앞세워 생각을 전개시키는 에세이들이 등장한다. 존재와 무, 차이와 환대, 진리, 진짜와 가짜 등 고전적인 주제에 관한 논의들을 현대철학 버전으로 재정비한 글들이 준비운동을 돕는다. 그러고 나면 돈, 사랑, 외모, 스마트폰 시대의 책읽기와 글쓰기 등 현대적 삶의 국면이 철학의 언어와 만나는 흥미진진한 장면들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책 곳곳에 실린 올컬러 사진들은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즐거움, 혹은 괴로움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현대철학, 이보다 쉬울 순 없다!
학생부터 주부까지,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마옴속에 간직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오해하지 마시라. 쉽게 썼지만 현대철학이 품고 있는 깊이를 무시한 채 단순화하고 도식화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저자의 생각과 마음을 통해 철저히 소화된 이야기만을 실었다. 또 철학자들이 고심했던 문제를 소개할 때, 그 치열함과 진지함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전달한다. 가령 스피노자나 키르케고르 철학이 당대의 네덜란드와 덴마크 사회와 어떤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으로 귀결되는 ‘의식의 익명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 어떤 경험과 연관되어 있는지,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자유와 예속의 체험 모두를 통해 스피노자의 사유를 자극했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당한 파문을 감수한 것,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초빙을 거절한 것 등은 모두 그의 삶 전체가 예속에 맞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루어낸 하나의 작품임을 알려준다.(31쪽)
의식은 말을 통해 대상에 의미 부여를 하고 의미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일을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사르트르가 자신의 성장에 관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는 없었다.” 거울 놀이 속에서 자기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소극적인 방어를 했던 어린이는, 이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의식 바깥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규정하려고 한다.(96쪽)
이렇게 철학자들의 사유가 발을 디디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하는 장치 역시 이 책이 깊이를 양보하지 않고서도 쉽게 읽힐 수 있는 비결이다.
관상학자의 따귀를 때리고, 골상학자의 머리를 깨부수라는 헤겔의 조언처럼, 의외의 면모를 만나고, 또 “동등하고 친구였지만 동류는 아니었던”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처럼 철학자들 사이의 인연에 대해 알게 된다. 또 철학자들이 주고받은 영향을 따질 때도 학파보다 개념과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기 때문에, 현대철학의 고민거리들이 어떻게 줄기를 이루고 가지를 치는지 더 세밀하게 지도 그려볼 수 있다.(특히 책의 이런 부분들은 저자의 독창적인 서술인 경우가 많다. 가령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를 거쳐 들뢰즈로 이어지는 ‘반복’이라는 주제의 계보학이 그 예이다.)
헤겔의 변증법에 맞서서 키르케고르가 내세우는 것은 바로 ‘반복’의 사상이다. 이 반복은 니체의 ‘영원회귀’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현대철학에 와서는 들뢰즈 같은 사상가가 자신의 반복 개념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키르케고르는 『반복』에서 이렇게 말한다. “반복은 새로운 범주로서, 새로 발견되어야만 하는 범주이다.” “반복은 현대적인 인생관이다.”(42쪽)
우리는 남에게 먼저 보이는 모습대로 우리 자신을 본다. 화장을 할 때 그 기준이 타인에게서 온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아울러 우리는 타인에게 보이는 대로 외부 대상도 본다. 선망하는 학교, 직업, 배우자 등은 타인에게 먼저 선망의 대상으로 보인 후, 내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이것이 알려주는 것은, 의식적 차원에서 우리가 보기 이전에, 무의식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보여지며 보여지길 바라고 있다는 것, 즉 무의식 안에 시선에 대응하는 충동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라캉은 메를로퐁티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중요한 주제인 ‘무의식적 대상’과 그에 상응하는 ‘충동’의 사상을 발전시킨다.(116쪽)
현대철학의 핵심적 내용을 성실하게 소개하는 책이지만, 독창적이고 비평적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가령 책에서는 종종 우리 문학에서 찾은, 현대철학자들의 생각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사례들이 등장한다.
보려는 욕망을 지닌 눈이 근본적으로 탐욕적임을 지적하며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 라캉에 따르면 심지어 『성서』에서조차 선한 눈은 단 한 군데서도 찾을 수 없다. 베푸는 눈 또는 선한 눈의 사례는 없는지 찾아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가령 임철우의 소설 「아버지의 땅」에 나오는 “눈매가 고운” 아버지의 눈은 어떤가?(156~157쪽)
철학을 연습해서 어디에 쓸까?
스피노자에서부터 데리다까지 철학자들의 주요 개념과 문제의식들을 살펴보고, 현대철학이 고민한 삶의 현장을 훑어보는 사이, 독자들은 철학적인 고민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효용과 가치, 혹은 재미를 갖는지에 대해 나름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철학관의 도사들이 들려주는 장밋빛 미래나,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들이 선사하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값싼 치유와는 다르다.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몸을 움직여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얻듯이, 그렇게 이성의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다만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 듯 생각 역시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의 잠을 깨우려고 한다.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우리는 혹시 이런 머릿속의 악마들과 더불어 한평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해보라고 주어진 단 한 번뿐인 삶인데!(7쪽)
철학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기쁨, 슬픔, 질투, 고통, 불안)이 깊숙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찾아내, 그 원인들과 당당하게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짜로 대면해야 할 문제들을 밝혀주기도 한다. 늘 새로운 것이 출몰하는 현대의 삶에서, 정말로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는 것도 바로 철학이다.
주체가 죽은 시대에, 이 모범도 원본도 없는 복제물들의 파편을 가지고서 어떤 삶을 꾸며나갈 수 있을까?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아바타와 RPG 게임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놀라운 생산자들 속에서 표류하는 우리가 오늘날 던져야 하는 윤리적•정치적 물음이란 이런 것이다.(259쪽)
통계나 호구조사 같은 ‘생각하지 않는 계산’이 아닌 진짜 사유의 내용을 담은 정보는 동굴 벽화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요술이 아닌 지적 노동의 담당 영역이며, 오로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즉 성찰과 연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에 새로운 기기 또는 새로운 장난감을 구입한 이들은 짧은 설렘 뒤에 곧 허무에 빠지기 일쑤다. 인간의 지적 노동의 진보와 새 상품은 아무 상관이 없기에.
★ 지은이
서동욱은 벨기에 루뱅 대학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세계의 문학》과 《상상》 봄호에 각각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저서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익명의 밤』 등이 있고, 시집으로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이 있다. 역서로는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등이 있다. 서울대, 서울예대, 연세대, 홍익대 등에서 철학과 문학을 강의했으며, 현재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계간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 차례
책을 펴내며: 현대철학의 불을 찾아서 7
철학의 탄생: 고대 그리스인들도 웹서핑을 했네 17
1부 오늘의 철학 이론
1. 현대적 사유를 위한 준비
바루흐 스피노자: 어떻게 예속에 맞서 자유를 찾을 것인가 29
쇠얀 키르케고르: 보편적 이성 상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39
프리드리히 니체: 허무주의 너머에 어떤 새로운 대지가 펼쳐지는가 53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후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63
2. 현상학과 그 너머
마르틴 하이데거: 어떻게 번잡한 근대적 일상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77
장 폴 사르트르: 개인의 선택은 보편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 92
모리스 메를로퐁티: 몸은 어떻게 의식 활동에 개입하는가 106
에마뉘엘 레비나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신의 흔적인가 121
3. 구조주의와 그 너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역사는 이성의 발전 과정인가, 우연의 전개 과정인가 139
자크 라캉: 우리의 삶을 이끄는 욕망의 비밀은 무엇인가 153
미셸 푸코: 지식은 시대와 권력에 따라 구성되는가 166
질 들뢰즈: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 179
자크 데리다: 순결한 기원이라는 신화는 왜 기만적인가 195
2부 오늘의 철학 연습
존재와 무: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217
진리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진리를 찾는가, 강제로 진리와 만나는가 229
차별, 차이, 환대: 차이는 환대를 불러올 수 있는가 239
시뮬라크르: 우리는 진짜 인생과 가짜 인생을 구분할 수 있는가 249
노마디즘: 철학의 세계에도 유목민이 있는가 261
돈의 존재론: 돈은 타자를 환대하는가, 지배하는가 273
사랑과 정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는가 283
신체에 대한 실천: 몸을 어떻게 자유롭게 할 것인가 291
관상과 행위: 철학자는 관상도 보나 301
터치스크린 시대의 읽기와 쓰기: 책의 종언 뒤에는 어떤 읽기와 쓰기가 도래하는가 311
인물 찾아보기 323
상세 차례 326
★ 본문 속으로
이 이성이 가진 역할인 분별력을 후에 데카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라 불렀다. 이런 공평한 바탕만을 인정하고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교류란 그리스인들의 위대한 정치 형태인 민주주의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성이라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바탕에서 자라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숙명적으로 철학은 민주주의와 한배에서 나온 형제다.
― 「철학의 탄생: 그리스인들도 웹서핑을 했네」 중에서
토리노에서 정신병이 니체의 사유를 산산이 깨트렸을 때, 그 깨어진 껍질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바로 현대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이데거, 들뢰즈, 푸코 등 수많은 현대철학이 니체의 조언을 얻으며 전진하였다. 왜 니체여야 하나? 답은 명확하다. 현대적 사유가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선 망치를 들고 탑을 무너뜨리는 자, 바로 플라톤 이래의 서양 철학의 가치를 전도시키는 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중에서
우리가 무한하게 사는 존재자라고 생각해보라. 이런 삶에는 인생의 어떤 계획도 들어설 수 없고, 성취를 위한 척도도 있을 수 없다. 무한한 시간을 뭐하러 계획하며, 또 어떻게 계획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무런 지표도 기준도 가질 수 없는, 앞뒤로 뻗어 있는 망망대해와 같다. 오로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일 때만, 우리는 인생에서 앞날을 ‘염려’하며 시간을 쪼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우리에게 이런 모든 자유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끝’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중에서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글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이란 ‘탄약을 장전한 권총’인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 (...) 내가 지금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할 때 나는 동시에 독자로서 여러분의 행위와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란 타자의 의식의 ‘인정’ 내지 승인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 「장 폴 사르트르」 중에서
한번 실험해보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여러분의 의식이 가닿는 각종 대상, 상념, 수학적 개념, 물리학적 이론, 기억 등등으로부터 의식을 고립시키려고 해보라.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은 잠을 잠으로써 의식 없음(무의식)에 도달할 수는 있을지언정, 깨어 있는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과 무관하게는 존재할 수는 없다.
― 「모리스 메를로퐁티」 중에서
인간이 성취하고자 하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국가, 제도화하고, 특히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발생하는지 아니면 모두를 위하는 한 사람의 환원 불가능한 책임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인가에 관해 알고, 국가가 우정과 얼굴이 없이도 지속될 수 있는가에 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중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미국 버클리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 이야기다. 아내와 함께 레스토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종업원이 대기자 명단을 작성하려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종업원은 이렇게 되물었다. “The pants or the books?” 청바지 회사 설립자요, 아니면 인류학 저술가요? 이 재치 있는 유머엔 모종의 진실이 담겨 있다. 리바이스 청바지를 만드는 리바이스트라우스사(Levi-Strauss & Co)가 바지 업계에서 가지는 거대한 상징적 위상을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현대 인류학과 구조주의에서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중에서
그런데 주체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타자의 언어에 대해 ‘왜?’라고 질문한다. ‘엄마가 원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에서부터 애인이 원하는 것에 대한 의혹을 거쳐 심지어 경전의 언어를 앞에 두고 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혹에 빠진다. 상징계가 완벽했다면, 즉 타자가 만들어낸 언어적 질서가 완벽했다면 우리는 결코 의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의혹을 가질 새 없이 타자의 언어가 답을 마련해놓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사태를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오가 의혹에 빠지는 것은 매트릭스가 만든 세계 안에 종종 결함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닌가?(모르피우스의 말을 상기하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지. 그게 뭔지 모르지만.”)
― 「자크 라캉」 중에서
여러분 모두는 자기 동일적인 한 인간이다. 여러분의 활동은 언제 시작되는가? 여러분이 자신에게 불만을 가질 때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혐오하면서, 여러 분은 거울 안의 자기에게 말한다. ‘학교에서(또는 일터에서) 이렇게 능력 발휘를 못 하다니! 너는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야!’
― 「질 들뢰즈」 중에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에게 라이프니츠의 저 질문을 던져보라. ‘왜 나는 태어났나?’, ‘왜 존재하게 되었나?’ 라는 질문은 필연적인 사건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 「존재와 무」 중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는 사유, 사유하는 자에게도 그 밖의 다른 이들이게도 일체 고통을 주지 않는 사유는 도대체 사유일 수 있을까? [……] 사유를 강제와 강요를 통해 시작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 바로 그런 와해와 더불어 (새로운 인식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 「진리에 대하여」 중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타자들이 있다. 외국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지고 찾아온 가난한 손님들이 노동을 하고 있으며, 홀로 남겨진 지친 노인들이 있고, 버려진 고아들과 장애인들이 있다. 이것은 차이의 세계이며, 이 개념을 동어반복적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낱말은 환대밖에 없는 것이다.
― 「차이와 환대」 중에서
우리의 헤어스타일, 화장하는 방식, 기분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정 등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다른 얼굴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다른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듯 우리는 남의 표정과 스타일을 복사한다. 이렇게 다른 것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얼굴을 꾸미고 살아가는 형태는 오늘날 성형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생기를 얻고 있다. 성형을 하는 이는 아바타를 구매하듯 상점에 놓인 얼굴을 구매한다. 또는 멋진 그림 하나를 자기 얼굴 위에 베껴 그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인생이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순수하게 우리에게 속하는 원본적인 것과 다른 것으로부터 인용한 것을 결코 구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원형적인 것 또는 근본적인 것’과 ‘복제된 것 또는 첨가된 것’을 칼로 자르듯 나누기란 불가능하다. 원본과 가짜는 서로 이렇게 뒤엉켜 있는 것이다.
― 「시뮬라크르」 중에서
철학자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격투기 선수일 수도 있고 아우렐리우스나 에픽테토스처럼 황제나 노예일 수도 있으며, 스피노자처럼 첨단 과학의 기술자일 수도 있고, 라이프니츠처럼 외교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동은 될 수 없는가? 양을 치며 유목하는 민족을 통해 한 종교가 탄생한 이후 목자의 이미지는 종종 사상을 지배해왔다.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자’라는 인상 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자의 이미지, 즉 지킴이의 이미지와는 다른 목동의 이미지는 없는가? 물론 있다. 그것이 노마드(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민의 사유가 있다.
― 「노마디즘」 중에서
여기서 버찌씨는 오로지 이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세계 속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돈, 그 무엇과도 등가적이지 않은 양도할 수 없는 돈, 소통되지 않는 돈이다. 어른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인 버찌씨를 폐지하고, 타인들 사이에 약속된 추상물인 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 「돈의 철학」 중에서
이 얼마나 신기한 광경인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 그리고 사회를 가동시키는 정치의 바닥에 우리 마음의 능력, 즉 우리의 욕망으로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니! 결국 사회도 국가도 어떤 특별한 목적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타고난 기본적 욕망, 바로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 「사랑과 정치」 중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관상학자의 따귀를 때리고 골상학자의 머리를 부수는 책이다. 철학이 이렇게 과격해도 좋은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실 『정신현상학』이라는 저 유명한 책은 많은 부분 추상적이기도 하지만 저잣거리에서나 벌어질 법한 인간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관상이나 골상을 보며 운명을 읽어내는 이의 따귀와 머리를 때려주자는 ‘구체적 행위’에 대한 저 제안은 과격한 대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데, 바로 인간의 본질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과 운명은 미리 마련되어 있고 얼굴을 관조하는 관상학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 「관상과 행위」 중에서
더 이상 직선적으로 글을 쓰는 노동을 하지 않는 손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글쓴이의 말에 따르면 손은 퇴보한다. 나는 이 퇴보를 ‘게으른 손의 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손은 또 해방된다. 무엇에서? 직선적 서사의 구조를 지닌 사유에서 벗어난다. 이제 사유는 종말론을 재현하듯 시초로부터 최종 지점까지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콜라주처럼, 혹은 벽에 던져 붙인 젖은 휴지처럼 다수가 동시적인 배치를 갖게 된다. 우리 시대의 기기들과 더불어 이야기하자면, 퇴보한 손(게으른 손)은 벽에 툭툭 떨어져 있는 멀티 이아콘들을 터치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